광룡기 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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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65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48화
48화
“어? 어, 이리 앉아.”
유군명과 황보진욱은 혼자 히죽이고 있는 이무환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도 이무환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천룡부와 약간의 관계가 있다는 것.
물론 엽상이 이무환의 능력에 대해서도 말해주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말은 완전하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무환이 천룡부라는 배경 때문에 책임자가 된 거라 여겼고, 아니꼬워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착잡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지금 하는 꼬라지를 보니 속이 확 뒤틀렸다.
“부르셨소?”
유군명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툭 던지듯 물었다.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만…….”
황보진욱은 아예 짜증난 표정을 솔직히 드러냈다.
그러자 이무환이 손을 들어 올렸다.
‘헛!’
지레 놀란 엽상이 움찔하며 숨을 멈췄다. 그러고는 긴장된 표정으로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별 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이무환이 손가락을 뻗어서 의자를 가리켰을 뿐.
“일단, 거기, 앉으라니까요?”
아무리 상관이라지만 새파랗게 어린 사람이, 그것도 마음에 별로 안 드는 날건달 같은 놈이, 손가락질하며 반말 비슷하게 찍찍 갈기니 유군명과 황보진욱도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냥 서서 듣겠소.”
“하실 말씀 있으면 그냥 하시구려.”
여전히 뻣뻣한 두 사람을 보고 이무환이 피식 실소를 지었다.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분들이시군.”
엽상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총대주님이 이해를 좀…….”
이무환의 웃음이 좀 더 짙어졌다.
“물론 이해야 하지. 그런데 말이야. 눈발, 밖에 눈 많이 내리지?”
“예? 예.”
“뒤쪽 연무장에도 눈이 많이 쌓였겠지?”
“아무래도…….”
“어지간하면 귀찮아서 안 하려고 했는데, 눈도 좀 치울 겸, 뻣뻣한 저 두 분 몸도 부드럽게 만들 겸, 수련삼아 몸 좀 움직여 볼까? 물론 눈발도 함께하고 말이야.”
“저, 대주님.”
‘님’ 자에 힘까지 준 엽상이 사력을 다해 막으려 했다.
그런데 속도 모르는 유군명과 황보진욱이 불쑥 나섰다.
“남자답게 힘으로 해보자는 거요? 그거라면 마다하지 않겠소.”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군.”
두 사람의 말에 엽상은 속이 새카맣게 타버렸다.
‘이 양반들이! 죽으려면 둘만 죽으쇼!’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져서 바닥으로 스며든 후였다.
이무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악귀의 웃음을 지었다.
“그럼 가보자고. 눈발, 앞장 서.”
퍽!
“커억!”
정통으로 옆구리를 맞은 유군명이 데굴데굴 굴렀다.
쌓인 눈이 그의 몸에 덕지덕지 묻어 눈사람이 따로 없었다.
기회를 엿보던 황보진욱이 진천권을 펼치며 이무환의 우측으로 파고들었다.
유령처럼 몸을 흐느적거린 이무환이 손을 흔들자 펄펄 내리던 눈이 회오리바람에 휘말린 것처럼 휘돌았다.
퍼벅!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황보진욱의 몸이 붕 떠서 일 장 밖에 떨어졌다.
“크윽!”
그 와중에도 엽상은 설홍에 내력을 집어넣은 채 고요히 서서 그 상황을 지켜만 봤다.
“눈발은 공격 안 할 거야?”
이무환이 재촉해도 악착같이 버텼다.
“아직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기회를 잡으면 번개처럼 공격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이건 비무다. 수련이 아니다. 하기에 이무환도 달려들지 않는 사람을 패지 않는다.
엽상은 두 번을 덤벼들었다 얻어맞고 난 다음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는 공격을 자제했다.
그런데 그게 또 묘했다.
설홍에 공력을 팔성 이상 집중시키고 묵묵히 서 있다 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검로가 보였다.
펄펄 날리는 눈송이가 그의 검을 한 자가량 비켜가면서 호선을 그리는데,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눈송이들이 춤을 추며 흔들렸다.
보통 때는 눈에 보이지 않던 검기의 움직임이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덕분에 생각만으로도 검로를 그려볼 수가 있었다. 기의 움직임도 미세한 부분까지 조절할 수가 있었고.
뭔가 벽이 하나 뚫린 기분!
그때다. 문득 조금 전에 본 이무환의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혹시 내 변화를 알고?’
악귀가 달리 악귀인가? 자신이 덤비지 않는다고 하염없이 손을 쓰지 않을 악귀가 아니다.
수련할 때처럼 무자비하게 먼저 손을 쓰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끝까지 기다려 줄 악귀 이무환이 아니란 말이다.
답은 하나였다. 이무환은 자신에게 중요한 때가 왔다는 것을 눈치 채고 공격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주……!’
순간 이무환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말고 계속 집중해, 멍청아!>
짐작이 현실로 드러나자 엽상은 안간힘을 다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때 이무환의 목소리가 또 이어졌다.
<나 하고 이 두 얼간이하고 싸우는 걸 심상에 연결해 봐! 그럼 더 도움이 될 거야!>
어둠을 따라 흐르며 이무환이 유령처럼 움직였다.
손이, 발이 보이지 않게 흔들리며 유군명과 황보진욱을 두들겼다.
너무 심하지 않게. 그래야 또 일어나서 덤빌 테니까.
손을 칼처럼 세워 찌르고, 베고, 내려치는가 싶더니, 주먹으로, 구수로, 때로는 손가락만으로 두 사람을 요리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태극을 그리며 휘돌고, 창날처럼 뻗어가고, 칼에 맞은 듯 쩍 갈라졌다.
그런데도 그의 곁으로 떨어지는 눈송이들은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달궈진 철판 위에 올라간 메뚜기처럼 펄쩍거리는 두 사람이 불쌍해 보였지만, 엽상은 그들을 염려할 틈이 없었다.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타앗!”
엽상이 더 참지 못하고 설홍을 뻗었다.
설홍을 타고 흐르던 눈송이가 하나로 뭉쳐서 검끝으로 뻗었다.
하얗게 모습을 드러내는 한 자 길이의 완벽한 검강!
“허엇! 엽 형의 검이 저 정도였나?”
“멋지군!”
“기가 막힌데?!”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광룡대원들이 감탄을 터뜨리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때 이무환이 좌수를 내려치며 소리쳤다.
“얼씨구? 조금 늘었다고 덤빈다, 이거지!”
쾅!
“흐읍!”
엽상의 몸이 미끄럼 타듯이 주르륵 뒤로 밀렸다.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엽상은, 낯빛이 떨어지는 눈송이만큼이나 하얗게 변했다.
“그, 그게 말입니다.”
“그거고 뭐고, 덤벼봐!”
한 시진. 연무장에 쌓였던 눈이 거의 다 치워졌다.
유군명과 황보진욱이 눈바닥을 뒹굴고, 박박 기어서 치운 것이었다. 나중에는 엽상마저 가세했지만, 그가 치운 것은 일 할도 채 되지 않았다.
“멋쟁이, 봤지? 깨달음은 한순간에 오는 거야. 맞는 도중에 올 때도 있고, 두려움에 질려 있을 때 올 수도 있어. 그만큼 집중이 잘되고 감각이 최대한 끌어올려져 있으니까.”
이무환은 손을 탈탈 털고, 영호승과 단우경과 막위와 혁수린에게 깨달음에 대한 강의를 했다.
그 사이 정신을 차린 유군명과 황보진악은 젖 먹던 힘까지 다 끌어올려서 상체를 일으켰다. 주저앉은 그들의 표정은 쪼그라든 호박처럼 허탈감과 고통으로 처절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헉! 헉! 헉! 어떻게…….”
“제, 제기랄. 지, 지미…….”
반면에 엽상은 고통이고 나발이고 즐거워 미칠 지경이었다.
“큭, 크크, 크크큭!”
남들이 미쳤다 해도 상관없었다.
지난 삼 년간 뚫지 못했던 벽이 얼마 전 금이 가더니, 마침내 오늘 뻥! 뚫렸다. 더 크게 웃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이무환은 미친 듯 웃는 그를 힐끔 보더니 영호승 등에게 말했다.
“어때? 이해했으면 시작해 볼까?”
다시 한 시진이 지났다.
그사이 쌓인 눈을 이번에는 영호승 등이 치웠다.
좀 더 처절하고, 확실하게!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유군명과 황보진욱이 시퍼렇게 질린 눈으로 엽상에게 물었다.
“왜… 저러는 건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수련하는 건데, 매일 하는 거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사람을 저렇게 죽도록 패는데? 저게 정말 수련이란 말이야?
어떻게 저렇게 무식한 수련을 매일 한단 말인가!
오만 가지 의문이 두 사람의 뇌리를 혼돈으로 몰아넣었다.
이무환, 저자는 미친 자다!
그런 생각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한편으로는, 엽상이 완벽한 검강을 펼친 것과 저 지독한 수련 사이에 어떤 상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기재라 불리는 엽상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과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보니 장강 넓이만큼이나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정말 저렇게 수련하면 검강을 펼칠 수 있는 걸까?’
그때였다. 대충 수련을 마친 이무환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 이제 들어가서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후르륵, 찻잔을 단숨에 비운 이무환이 말했다.
“누구에게도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단주에게도 말하면 안 됩니다.”
유군명과 황보진욱의 눈이 커졌다.
이무환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안. 됩.니.다.”
그래도 두 사람은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했다.
그들을 대신해서 엽상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총대주.”
두 사람이 쳐다보자 엽상이 말했다.
“허락하기 전까지라고 했으니, 허락하면 말해도 된다는 말이지요. 설마 할 말을 못하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뭐가 못마땅한지 두 사람은 대답을 안 했다.
이무환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
“사실 부인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는데, 두 사람이 총각이라 안 한 거요. 아! 맞아. 대체 그 나이 먹도록 여태 뭐 한 겁니까? 혼인도 않고.”
두 사람이 눈을 부릅떴다.
서른이 넘도록 총각인 것도 서러운데 그걸 콕 짚어서 쏘아대다니!
게다가 그게 지금 이 자리에서 할 말인가?
그때 이무환이 열 받은 두 사람을 향해 다시 말을 이었다.
“좌우간, 호 단주께 말하면 안 됩니다. 제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아시겠습니까?”
“알… 겠습니다.”
두 사람이 엉겁결에 대답했다.
“남자로서, 무사로서 맹세할 수 있습니까?”
이미 대답을 한 마당이다. 두 사람은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이제야 대화가 제대로 되는군.”
이무환도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내가 믿지 않는 사람하고는 진실 된 이야기를 하지 않아. 믿는 사람에게도 하지 않아야 할 말은 하지 않지. 그걸 알아주었으며 좋겠어. 아! 그리고 지금부터 편의상 반말을 쓸 거니까 두 사람이 이해해 줘.”
편의상 반말?
유군명과 황보진욱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지위가 높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하루아침에 나이 어린 상관을 모시게 된 자신들이 한심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처참하게 깨져서 바닥을 기지만 않았어도 마지막 자존심은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그마저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지 않는가 말이다.
“당연한… 일이지요.”
한 살이라도 많은 유군명이 인정하자, 황보진욱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제야 이무환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가 세 사람을 향해 툭 던지듯이 말했다.
“조사 대상엔 누구도 예외가 없어. 설사 부주들이라 해도.”
엽상과 유군명과 황보진욱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었다.
이무환은 그런 세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끊어서 물었다.
“혈.지.겁.난. 그 말을 들어봤어?”
얼음처럼 굳은 세 사람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아는 모양이군. 그럼… 전설의 무공, 절대사천좌의 무공에 대해서도 들어봤겠지?”
크게 뜨여진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불거졌다.
엽상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걸… 왜 지금 말씀하시는 건지……?”
이무환이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부터 우리가 조사해야 할 일이거든.”
멍하니 쳐다보는 엽상, 입을 반쯤 벌린 채 침이 고인 유군명과 황보진욱. 세 사람은 아무 정신도 없었다.
혈지겁난과 절대사천좌의 전설에 대해 조사한다고? 자신들이?
그들은 그 일이 지옥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보다 못한 이무환이 엽상을 꼬나보며 소리쳐 물었다.
“약초는 어떻게 된 거야? 알아봤어?”
엽상이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그게… 아직 특별하게 들어온 소식은 없습니다. 하지만 무창 일대의 약초상들을 집중 탐문하고 있으니 곧 어떤 식으로든 소식이 들어올 겁니다.”
“쯔읍, 첫인상은 괜찮았는데, 어째 갈수록 더 어벙하게 느껴져.”
“…….”
“그건 그렇고, 눈발. 수룡단에 문서고가 있다며? 어디야? 뭐 좀 찾아봐야겠는데.”
2
문서고는 수룡단주가 있는 건물의 지하에 있었는데, 이무환은 호연청의 특별 배려로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하 문서고의 철문이 열린 순간, 이무환의 입이 쩍 벌어졌다.
빽빽이 꽂혀 있는 수천 권의 책자. 개중에는 일반 강호문파에 관련된 정보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구룡성의 내부 문건이었다.
게다가 그곳 말고도, 수룡단의 단주가 직접 관리하는 비밀 문건을 모아놓은 곳이 또 있다고 했다.
“젠장, 뭐가 이렇게 많아?”
그는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비룡도에서 그가 읽은 책은 오백여 권. 아버지가 나갈 때마다 옥이 엄마에게 부탁해서 들여온 것들이었다.
그조차도 죽을상을 해가면서 읽었는데, 수천 권에 달하는 책을, 그나마도 재미없는 문서를 좋아라 하며 읽을 이무환이 아니었다.
그는 즉시 문서고 관리자를 만났다.
“수룡구대에 있는 꼬마 계집아이를 좀 데려다 주쇼.”
문서고 관리자는 냉정하게 손을 저었다.
“꼬마 계집애를 왜 데려다 달라는 거요? 이곳은 아무에게나 개방하는 곳이 아니오.”
그러나 순순히 물러날 이무환이 아니었다. 기름이 잔뜩 든 등잔불을 벽에서 떼어낸 그가 점잖게(?) 말했다.
“단주께 가서 내 말 좀 전해주시겠소?”
“무슨 말을……?”
“안 데려오면 확 불을 질러버릴 거라고 전하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