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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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5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43화
43화
“내가 들고 올라가면 좋겠는데, 당신까지 들고 능공비(凌空飛)를 펼칠 수 있을지 모르겠수. 조금만 참으쇼. 올라가서 밧줄을 내려놓고 다시 올 테니까.”
아무리 들어도 꿈이 아닌 듯했다.
몸을 조금 움직이자 부러진 다리에서 솟구친 통증에 입이 딱 벌어진다. 아직 정신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공은효가 다시 눈을 떴다.
그런데 눈을 뜨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힘들게 눈을 치켜 올리고 위를 바라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파란 하늘이오,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공은효의 입에서 자조에 찬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큭, 크큭, 나 공은효가 이제 미쳐 가는가? 헛소리가 들리고, 헛것이 보이다니.”
순간, 철렁! 갑자기 눈앞에 뭔가가 뚝 떨어졌다.
기다란 칡넝쿨이었다. 몇 개를 이어 만든 듯했다.
그 직후 꿈속에서 보았던 미친놈도 보였다.
“오래 기다렸죠?”
미친놈은 여전히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것을 끝으로 공은효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역시 꿈이었어.’
이무환 일행이 공터로 돌아온 것은 반 시진 만이었다.
“거기다 내려놔.”
이무환의 손짓에 막위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칡넝쿨 더미를 내려놓았다.
머리만 삐죽 밖으로 나온 공은효였다.
누에고치처럼 칡넝쿨로 돌돌 말린 공은효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전상휘는 물론이고, 유소경조차 입을 반쯤 벌린 채 공은효를 바라보았다.
“이게… 어찌 된 일…….”
이무환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팔다리가 부러져서 일단 응급조치를 취했소.”
응급처치가 고치를 만드는 거라면, 제대로 치료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궁금한 것은 나중 일이었다.
“공 사형!”
유소경은 급히 공은효에게 달려가 검을 빼 들고 칡넝쿨을 자르려 했다.
이무환이 그녀를 향해 분명하게 말했다.
“자르는 건 좋은데, 앞으로 팔다리를 못 쓰게 되면 내 책임이 아니오.”
당황한 유소경은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당분간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소. 부러진 팔다리가 비틀릴지 모르니까.”
물론 심하다 싶을 정도로 묶은 게 꼭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무환은 또 다른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가만히 있었으면 저렇게까지는 안 했지. 뭐? 실컷 구해줬더니, 미친놈이라고?’
처음에는 팔다리 부러진 곳만 묶었다. 그런데 절벽 위로 올라온 후, 정신을 차리자마자 울고불고 몸부림치며 방연을 찾았다. 자신을 미친놈 취급하면서.
“아무리 꿈이라도 그렇지, 이런 미친놈 대신 차라리 방연이나 나타날 것이지. 하늘이여, 이 미친놈을 데려가고 방 사제를 돌려주시오! 크윽, 방 사제!”
결국 이무환은 설명 대신 그의 몸 전체를 칡넝쿨로 묶어버렸다. 그나마도 다른 사람이 말려서 절벽 아래로 던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공은효가 다시 정신을 잃은 것은 그 이후였다.
이무환이 조금 전의 상황을 생각하며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데 전상휘가 물었다.
“혹시 다른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소?”
이무환이 재빨리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말했다.
“절벽 아래에 한 사람이 떨어져 있었소. 그가 당신들이 찾던 방연이 아닌가 싶은데…….”
2
용항객잔은 모든 것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언뜻 봐서는 싸움이 일어난 곳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귀 조창은 객잔의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이곳이 문제의 싸움터였다는 것을 알아챘다.
구석의 바위에 긁힌 자국. 담장이 깊게 파인 자국. 객잔 기둥에 난 검흔.
흔적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는 즉시 객잔의 주인을 불러서 어젯밤의 일을 물었다. 목에 한 자루 시퍼런 칼을 올려놓은 채.
객잔 주인은 벌벌 떨며 그리 길지 않으면서도 확실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자시 무렵에 무사님들이 죽고 죽이고 했습지요. 저는 무서워서 얼굴도 내밀지 못했습니다요.”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했지?”
“모두 저 뒤쪽의 야산에 묻은 것 같았습니다요.”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조창은 객잔 주인에게 입을 열면 가족이 모두 죽을 거라는 협박을 하고, 수하들을 시켜 마당을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별다른 것을 찾지 못하자 객잔 뒤쪽의 야산을 뒤졌다.
한두 명의 시신이 아니었다. 그들이 묻힌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조창은 다른 사람의 시신은 수하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동생인 조민과 함께 적혈삼마의 시신을 찾아보았다.
“이마 서웅기뿐입니다, 형님.”
적혈삼마의 시신은 하나뿐이었다. 둘이 없었다.
사인은 간단했다. 가슴이 완전히 함몰되어 등뼈마저 부서졌다. 외공을 겨루며 마구잡이로 싸우다 죽은 모습이었다. 옷자락이 찢어지고 팔목이 꺾인 것은 그 전 단계일 뿐.
그래서 더 고민이었다. 적혈삼마가 이렇게 무식한 수에 당하다니.
너무 쉽게 죽은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머리를 굴려봐야 나올 답이 아니었다.
“나머지 둘은 어떻게 된 거지?”
“부상을 당해서 약속 지점에 늦게 도착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지도 몰랐다. 적혈삼마 중 둘이 도주를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들을 잡을 수 있는 자는 강호에 흔치 않았다. 살아 있을 가능성이 죽었을 가능성보다 훨씬 더 컸다.
‘그들을 만나면 더 확실한 것을 알 수 있겠지.’
조창은 고심 끝에 몸을 일으켰다.
“너는 이곳을 정리하고, 객잔에 가서 이곳을 떠난 놈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어라. 한 놈도 빼놓지 말고.”
“예, 형님.”
“나는 두 사람이 도주한 흔적을 쫓아갈 테니, 나중에 정평에서 만나자.”
쌍귀가 다시 수하들의 주검을 파묻고 떠난 지 일각가량이 지났을 때다.
한 사람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철립 아래로 거친 흑염이 세 치가량 자라 있는 갈의인이었다. 등에는 일반 검보다 한 자가량 긴 장검이 메어져 있었는데, 큰 키에 잘 어울려 보였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단숨에 서웅기의 시신을 찾아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대단하군. 서웅기를 이렇게 쉽게 죽이다니.”
그는 조창과 다른 결론을 내렸다.
“그들 중에 대단한 고수가 끼어 있군.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조차 정면 대결로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자야. 어쩌면 나머지 둘도 살아남지 못했겠는 걸?”
다시 서웅기의 시신을 땅에 묻고 일어선 그의 눈에 희미한 흥분이 떠올랐다.
“부주의 명으로 놈들을 감시한 지 한 달 만인가? 오랜만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어. 후후후후…….”
따분한 일상이었다.
절대 손을 쓰지 말라는 말에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그 바람에 황산검문의 제자들이 죽어가고, 절양검 공은효가 사제와 함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도 바라만 봐야 했다.
그런데 기고만장하던 놈들이 뒤통수를 맞았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만나면 나 공손척에게 오랜만에 즐거움을 준 대가로 술 한잔 따라주지.”
3
황사의 객잔에 표행 탈취 사건을 조사하는 임시 본부가 만들어져 있었다.
일행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다른 일을 처리하느라 남아 있던 표사 두 명과 세 명의 황산 제자뿐이었다.
그들은 냉기를 풀풀 날리며 들이닥친 황산검문의 제자들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맞이했다.
그러다 황산검문의 제자 둘이 메고 오는, 나무에 묶인 공은효를 알아보고 나서야 얼이 반쯤 빠져 버렸다.
“설마… 공 사형?”
“허억! 어떻게 공 사숙이?”
말을 걸 정신도 없었다. 이유를 물어보기에는 들어온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나 얼어붙어 있었다.
“조용한 곳으로 안내해라. 공 사형에 대한 것은 입조심하고.”
전상휘가 입을 열고나서야 그들은 급히 일행을 객잔의 뒤채로 안내했다.
이무환은 뒤로 처져서 황산검문의 제자들을 따라갔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한량 같은 걸음걸이였다.
남궁산산은 그런 이무환의 옆에 바짝 붙어서 여전히 흥겨운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엽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그리고 네 명의 광룡대원은 쉬지도 않고 관천일연심법을 중얼거렸다.
때로는 갈지자로 걷고, 때로는 앞뒤로 걸으며 중얼거리는 게 영락없이 제정신이 아닌 자들로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남의 눈치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네 사람이었다. 그들의 귀는 오직 이무환만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사람들이 많은데, 그만 하지 그래?”
이무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네 사람은 중얼거리던 것을 일제히 멈추고 평상시처럼 행동했다.
눈을 반쯤 감고 생각에 잠겼던 엽상이 소외감을 느낄 정도로 완벽히 통일된 행동이었다.
‘나도 익혀볼까?’
그는 구룡성의 뛰어난 심법 중 하나인 무승심법을 익혔기에 관천일연심법이 필요 없었다.
오히려 잘못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왠지 하나처럼 움직이는 네 사람이 부럽기만 했다.
본격적인 행동은 일단 공은효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사이 표행이 털린 곳에 대해 조사를 하기로 했다.
이무환은 공은효의 전신을 묶은 칡넝쿨을 풀어주고 팔다리를 묶은 것만 놔두었다.
그리고 광룡대원들과 함께 황산검문의 제자들을 따라 표물이 털린 곳을 찾아갔다.
죽은 자의 혼을 불러 당시의 상황을 들을 수 있는 재주가 없는 이상, 그들이 그곳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단순했다.
흔적.
그나마도 그곳에 남은 흔적을 알아보고, 그 흔적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사람 없었다.
이무환, 남궁산산, 전상휘, 언문승, 유소경.
그중 대장은 남궁산산이었다.
천 가지 무공을 알아볼 수 있다는 그녀가 아닌가?
천방지축 악귀 이무환도 감히 그녀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쪽팔리기는 싫었으니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중간은 가는 법이지.’
그녀는 눈이 열두 개 달린 신녀 같았다.
스윽, 스쳐보는 것 같은데도 무공의 명칭이 줄줄 흘러나왔다.
“저건, 패검문의 귀영패검인 것 같지만, 황산검문의 검흔이에요. 그리고 저것은… 흠… 이상하네요. 무당의 검이 왜 여기에서 펼쳐진 거죠?”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무당파가 이 일에 개입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남궁산산의 말이 끝나기 전에는 누구도 확신을 하지 않았다.
“언뜻 보면 구궁검인데, 조금 변질된 검식이에요. 좀 더 살기가 짙고, 날카로워졌어요. 아마 과거 무당에서 무공을 익힌 자의 흔적 같아요.”
남궁산산은 갈지자로 천천히 이십여 장의 현장을 오갔다.
그 옆을 이무환이 바짝 붙어 따라가고, 전상휘와 엽상, 광룡대원들과 황산검문의 제자들이 줄을 지어 굼벵이처럼 뒤를 따라갔다.
이무환조차 그녀의 앞을 가지는 못했다.
“오빠, 그렇게 밟아버리면 알아보지 못하잖아요.”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물론 변명이야 그럴싸하게 했지만.
“저기에 내가 아는 흔적이 보여서.”
사실이었다. 다만 설명을 할 수 없어서, 아니, 하면 안 되어서 그렇지. 아직은 알려줄 때가 아니니까.
‘잠풍이 구룡성에 둥지를 튼 것은 확실한 것 같군. 그런데 이들과 항주의 그 괴인과는 무슨 관계지?’
문득 또 다른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이무환은 자신의 품에 있는 동패가 잠풍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던 것이다.
‘나중에 나철위에게 물어보면 알겠지. 그가 조사하고 있을 테니까.’
그 후로도 남궁산산은 꼼꼼하게 한 시진 가까이 더 현장을 조사했다. 그 덕에 현장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전에 조사를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는 피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럴 것이라는.
하지만 남궁산산은 달랐다. 그녀는 조목조목 예를 들어가며 흔적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심어주었다.
조사에서 나온 중요한 무공의 흔적은 모두 네 가지. 그중 세 가지는 표국에서 본 시신의 상흔과 일치했다.
문제는 다른 하나였다.
두 줄로 소나무를 할퀴고 지나간 흔적을 보더니, 남궁산산이 심각한 표정으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 소나무는 올해가 가기 전에 죽을지 몰라요.”
뜬금없는 말에 사람들이 남궁산산을 바라보았다.
기껏해야 껍질을 뚫고 안쪽이 약간 긁힌 정도였다. 소나무는 생명력이 어떤 나무보다 질긴데 그 정도로 죽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때였다. 소나무를 가만히 쳐다보던 이무환이 갑자기 손을 들어서 내려쳤다.
쩍!
그러고는 뭔가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정말 올해를 넘기기 힘들겠어.”
남궁산산이 쓰게 웃었다.
“그렇죠? 역시 오빠는 말해주지 않아도 금방 알아보는군요.”
“음하하하! 내가 누구냐?”
답답한지 영호승이 물었다.
“대주, 왜 저 소나무가 죽는단 말입니까? 저 정도는 금방 송진이 채워져서 끄떡없을 텐데요.”
이무환이 소나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맥이 끊겼어. 그것도 갈기갈기 찢겨서.”
“예?”
“그러니 물도 흡수가 안 될 것이고, 양분도 흡수가 안 될 것이야. 그럼 서서히 말라죽을 수밖에.”
모두가 감탄한 눈으로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그 눈길이 남궁산산에게 옮겨졌다.
단지 흔적만으로 소나무 내부의 상황을 알다니. 신의 눈이 아니고서야 어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그들을 대변하듯 이무환이 물었다.
“그런데 꼬맹아,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남궁산산의 표정이 다시 심각해졌다.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한 사람의 이름을 꺼낸 것은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