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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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4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81화
81화
뇌고자. 괴로워하고 번뇌에 싸인 자. 제갈신걸을 말함이다.
세상 다 산 것처럼 고뇌에 싸인 그의 표정을 보고 이무환이 표정 좀 풀라고 했다. 꼬맹이가 겁먹는다면서.
하지만 소용없었다. 심지어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이무환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흥! 어디 고민 한번 안 해본 사람 있나?’
일각이나 지났을까, 비무 수련 중이었는지, 제갈신걸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으로 들어왔다.
이무환은 그에게 와룡부로 가서 제갈무진을 만나 자신의 말을 전하게 했다.
“가서 그 양반에게 특조대와의 관계에 대해 소리 한번 질러달라고 하쇼.”
“너무 빠른 것 아니오?”
“빠르긴 빠른데, 가만히 있다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생겼으니 별수 없수. 그냥 목소리만 높이면 되니까, 그쪽도 큰 부담은 없을 거유.”
제갈신걸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말이 부담 없다는 것이지, 그리되면 와룡부는 광룡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무환의 요구를 거부할 만한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나?’
4
석양이 마지막 발악을 하며 구름을 붉게 태울 무렵.
이금환이 광룡대로 찾아왔다.
그는 이무환을 만나자마자 고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쩌자고 나를 그렇게 들먹인 것이오?”
이무환이 차를 마시다 말고 이금환을 흘겨봤다.
“몰래 움직이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사람들까지 잃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니오. 결국은 일을 제대로 하려면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사실이 그랬다.
천룡부의 사람들이 이충선과 이충현의 사람들로 양분된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사정이 달랐다. 중간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반 가까이나 되었던 것이다. 특히 원로들은 더욱더 그러했다.
그러나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그들도 대세에 따라 두 사람에게로 움직일 수밖에.
이금환도 모르지 않았다. 그도 그들이 필요했다. 다만 숙부들과 피를 튀기며 싸우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있었을 뿐.
그런데 이무환이 한바탕 휘젓고 간 이후로 상황이 달라졌다. 특조대가, 수룡단이 그를 천룡의 후계자로 인정한 이상 이충선과 이충현도 그를 마음대로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이제는 그가 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대주가 떠난 이후로 세 명의 당주가 나를 찾아왔소. 대답을 달라더구려.”
“뭐라고 했수?”
“순천의 길을 따르면 언젠가는 빛을 볼 수 있을 거라고만 했소.”
이무환이 찻잔을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고 퉁퉁거렸다.
“참나, 뭘 그리 어렵게 말하쇼? 그냥, 조금만 기다려라, 곧 확 뒤집히는 날이 올 거다, 그렇게 말하면 되지.”
이금환이 조용히 웃었다.
그는 이무환의 성격이 부러웠다.
하지만 자신은 이무환이 아니었다. 자신은 자신의 방법대로 일을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좌우간 대주로 인해 사람들이 움직였으니, 이제는 내 방법대로 조금씩 변화시킬 것이오. 그러니 지켜봐 주시구려.”
“킁! 지켜보는 게 뭐 어렵겠어?”
이금환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남궁산산이 비어 있는 찻잔에 차를 채우자 이무환은 단숨에 들이켜고는 이금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간이 없으니 너무 오래 보고 있지만은 않을 거요. 내가 진짜로 미치기 전에 뭔가를 보여주쇼. 아니면 내가 직접 엎어버릴 테니까.”
“알겠소.”
이금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선 그가 머뭇거리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맙네, 아우.”
목소리가 떨려 나였다.
힘들게 뱉어낸 말이어서 그런지 다시 걸음을 옮기는 이금환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이무환도 괜히 가슴이 시큰거렸다.
짜증이 날 정도.
힐끔 이금환의 등을 바라본 이무환이 콧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킁킁! 아우는……. 지미…….”
5
다음 날.
와룡부에서 화산폭발과 같은 선언이 터졌다.
―와룡부는 구룡무제 시해에 절대 관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천명키 위해 특조대의 조사를 적극 지지하며, 특조대의 향후 조사에 모든 힘을 아끼지 않겠다.
천룡부의 일로 웅성거리던 구룡성이 다시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감으로 가라앉았다.
이무환은 그 말을 전해 듣자마자 특조대의 간부들을 소집했다.
일각 만에 모든 간부들이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무설강과 제갈신걸, 세 명의 대주, 구룡수호단의 수장들과 영호승을 비롯한 네 명의 호위대까지. 남궁산산이야 당연히 이무환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이무환은 그들이 모이자 짧게 물었다.
“눈발, 범인에 대해 알아낸 거 있어?”
“일단 범인과 비슷한 체형이나 특징을 지닌 사람을 탐문해서 용의자를 세 명으로 압축했는데, 조사해 본 결과 그중 두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한 사람은 창룡부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이 누구지?”
“도룡부의 독혼마도 오금과 신룡부의 환마라는 자입니다.”
“두 사람 중에 시신의 약지와 같은 손가락을 지닌 자는 없나?”
“그게… 손가락 특징에 대한 것이 적혀 있지 않아서…….”
아쉬웠다. 그것만 확인할 수 있다면 머리 쓸 필요도 없이 범인을 단정 지을 수 있을 텐데.
“적혀 있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 두 사람의 지위는?”
“오금은 도룡부주 구자천을 비밀리에 호위하는 사대호위 중 한 사람이고, 환마는 신룡부 원로원의 원주인 천세도인(天世道人)의 그림자로 알려진 자입니다.”
“천세도인이라…….”
신룡부의 천세도인은 부주인 주백천의 사숙으로 알려진 칠순의 노인이었다. 듣기로는 주백천조차 그를 존경해서 극진히 대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있는 듯 없는 듯 외부에 자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아서 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있는 줄도 거의 모르고 있었다.
신비에 싸인 노도인. 아무런 욕심도 없이 신선이 되기 위해 정진하는 늙은 도인.
이무환도 천세도인에 대해 그렇게만 알았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마음에 걸렸다.
구룡무제 이건천이 남긴 글에 적힌 말 때문인지도 몰랐다.
[십여 년 전, 스스로를 천존(天尊)이라 칭하는 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에게 구룡성의 장래를 위해, 중원의 평화를 위해, 자신과 손을 잡고 구룡의 힘을 하나로 결집하자고 했다. 매우 유혹적인 제안이었지만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구룡성의 거대한 힘이 하나로 뭉치면 다른 세력 역시 더욱더 강하게 뭉칠 것이고, 오히려 피의 겁난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는 바로 물러갔지만, 언젠가 네 앞에 나타날 것이다. 만일 그자가 네 앞에 나타나거든, 절대 맞붙지 말고 일단 피하거라.]
도교의 최고신, 원시천존에서 따온 천존이라는 이름을 쓴다는 자체가 망상에 사로잡힌 자일 가능성이 컸다.
천세도인과 천존.
이무환은 그 이름에서 왠지 묘한 감흥이 일었다.
“조사해 봤나?”
“저, 그게…….”
엽상이 얼버무렸다.
신룡부주조차 존경하는 사람을 조사하는 일이다. 엽상이 아무리 간덩이가 커졌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설령 그들을 어찌어찌 만난다 해도, 특조대에 이를 갈고 있는 신룡부가 아닌가. 더구나 면책권이 있는 신룡부주가 순순히 대답해 줄 리는 만무한 일이다.
“할 수 없지. 그건 내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어.”
엽상은 소리 나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무환이 간부들을 돌아다보았다.
“들어서 잘 알겠지만, 수룡단이 저들과 타협을 하는 바람에 이전처럼 어깨에 힘주고 쳐들어가서 뒤집어놓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무설강이 대뜸 물었다.
“설마 조사를 중단하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이무환이 씨익 웃었다.
“도둑놈들이 설치는 꼴을 보고만 있으면 배알이 꼴려서라도 그럴 수는 없죠.”
“그럼 어찌할 생각인가?”
“조용히, 암중으로 일을 처리할 작정입니다. 당해도 놈들이 먼저 동네방네 떠들어대지는 못할 테니까요. 뭐, 그래 봐야 며칠만 조용히 움직이면 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쉰다고 생각하쇼.”
일단 일반 대원들은 정보를 수집하는 일에만 전념케 했다.
무설강과 그의 수하들이 한 조, 구룡수호단의 수장들과 열두 명의 수하가 세 개 조, 제갈신걸과 세 명의 대주가 한 조. 그리고 영호승과 단우경과 막위와 혁수린이 이무환과 함께 한 조를 이루었다.
총 여섯 개 조가 육부를 맡기로 한 것이다.
조가 정해지자 이무환이 말했다.
“본격적인 움직임은 이틀 후부터요. 그동안에는 자신들이 맡은 곳에 대해 최대한 숙지해 두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특조대라는 것을 드러내서는 안 되니, 얼굴을 뜯어고쳐서라도 자신의 정체를 숨겨주시도록.”
사람들이 일제히 이무환을 주시했다.
‘저 얼굴을 어떻게 뜯어고쳐야 정말 미친놈처럼 보일까?’
제3장. 광룡, 구룡성을 나서다
1
아무래도 엄마의 행동이 수상하다. 단순히 환 오빠의 아버지 식사를 도와준다고 가는 게 아닌 것 같다.
옥이는 엄마가 돌아오자 작정하고 다그쳐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비룡도 가서 밤을 새고 와?”
하지만 들려온 대답에 옥이는 펄쩍 뛰지 않을 수 없었다.
“나, 환이 아버지하고 살기로 했다.”
“말도 안 돼, 엄마!”
“이년아, 너는 아직 팔팔하잖아. 왜 이 엄마 마음을 몰라주는 거냐?”
아무리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해 봐! 만일 엄마하고 무환 오빠 아버지하고 맺어지면 나는 뭐야? 나하고 오빠하고 진짜 오빠동생해야잖아!”
“하면 어때서? 여태 오빠동생하면서 잘 지냈잖아.”
“싫어! 싫단 말이야!”
“그럼 어쩌란 말이냐, 이미 네 동생이 생겼는데!”
옥이가 벙찐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뭐?”
옥이 엄마의 어깨가 축 처졌다.
“후우, 이제 되돌리고 싶어도 안 돼. 그래서 이해해 달라고 하는 거야, 이년아.”
“흑! 으아아앙! 나 몰라! 미쳤어, 정말!”
콰당!
옥이가 문을 박차고 나가자 옥이 엄마가 황급히 따라 나갔다.
“어딜 가, 이년아!”
어느새 이십여 장을 달려간 옥이의 입에서 울음 섞인 고함이 터져 나왔다.
“죽을 거야! 절벽에서 콱 떨어져 죽어버릴 거야! 흑! 잡지 마!”
“저, 저게……. 옥이야! 돌아와!”
옥이 엄마는 옥이의 뒤에 대고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곧 옥이의 모습이 사라져 버리자 어깨를 으쓱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것은 뻑 하면 죽는다고 난리야.”
조금만 뭐라고 하면 죽어버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 딸이었다. 일 년에 열두 번도 더 그랬다.
아마 어딘가 가서 눈물을 펑펑 쏟고, 바다에 대고 욕을 바락바락 하다가, 조금 있으면 돌아올 것이다. 그게 자신이 아는 딸, 옥이였다.
물론 오늘 같은 상황은 또 몰랐다.
조금은 불안한 마음에 옥이 엄마는 쫓아갈까 말까 몇 번을 망설였다.
그러나 무공을 배운 옥이였다. 쫓아가 봐야 그녀의 걸음으로는 어차피 잡을 수도 없었다.
“에휴, 이번에는 얼마나 갈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이미 익어서 밥이 되어버렸는데 어쩌겠어? 그건 그렇고, 뭐 먹을 거 없나? 자꾸 입이 당기네.”
옥이는 뭐 좀 먹고 난 후 찾아다니기로 했다.
자신이 옥이를 어떻게 키웠던가? 험한 섬에서 혼자 십 년을 살며 키운 딸이다. 바다의 갈매기보다 훨씬 강한 아이.
그렇게 옥이 엄마가 집안을 뒤져 먹을 것을 찾고 있을 즈음, 옥이는 파도가 철썩이는 절벽 꼭대기에서 동쪽을 향해 소리쳤다.
“오빠아아아! 나, 오빠 찾아갈 거야! 조금만 기다려어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