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80화
무료소설 광룡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18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80화
80화
“천룡부의 일은 자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네. 그는 나이가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어서 우리가 나설 수밖에…….”
턱도 없는 소리였다.
이무환이 턱을 치켜들고 이충현의 말을 끊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나이 스물아홉이 어리다니요? 좌우간 제가 직접적으로 중요한 사항을 보고드릴 분은 천룡부에 대공자밖에 없다는 점을 명심해 주시고, 혹시 그분을 보시거든 특조대로 와달라고 전해주십시오. 설마 그분의 신상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상이 있다면 한바탕 난리라도 피울 것 같은 표정이다.
이충선이 입술을 씹으며 대답했다.
“잠시 거처에서 쉬고 있을 뿐이네. 걱정 말게, 누가 감히 천룡부에서 큰조카를 해칠 수 있겠나?”
“그래야 할 겁니다. 아니면 제가 왜 광룡이라고 불리는지 확실히 아시게 될 테니까요.”
이무환은 그 말이 끝남과 동시, 이충선과 이충현이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흥! 생각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다 때려잡고 싶지만, 형하고 조부님 얼굴을 봐서 조금 더 놔두겠어. 하지만 더 지랄 떨면… 조부님의 부탁이고 뭐고 확 뒤집어 버릴 것이야!’
턱, 턱, 발소리 크게 내며 천룡전을 나오자 천룡전 앞에 모인 백여 명의 무사가 보였다.
왠지 이전과 다른 분위기였다.
이무환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짧게 소리쳤다.
“특조대, 철수!”
4
광룡대로 돌아가자 호연청의 호출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무환은 호연청을 만나기 전, 느긋이 석 잔의 차를 마시며 남궁산산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불렀을까?”
“아마 제동을 걸려고 부른 걸 거예요.”
“흠, 하긴 내가 너무 설치고 다녔지?”
“지금까지는 호연청도 확실하게 챙긴 것이 있으니 가만 놔두었지만, 압력이 거세지니 둘을 저울질했을 거예요.”
“결국 내가 팽을 당하는 건가?”
“피이, 팽 당할 오빠예요?”
“네가 볼 때는 호연청과 한바탕하는 게 낫겠냐, 아니면 잠시 조용히 있는 게 낫겠냐?”
“꼭 그 두 방법만 있는 건 아니죠.”
“남은 시간은 이십 일 정도밖에 안 돼. 그 안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들의 결집을 막아야 해. 그냥 확 쳐들어가서 다 휘저어 버릴까?”
“오빠가 무슨 무신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까짓 거, 하다 안 되면 도망 나오면 되지 뭐.”
“그럼 구룡성의 공적으로 평생 쫓겨 다녀야 할걸요?”
“제기랄, 머리 굴리는 것보다 그게 더 나은데…….”
이무환이 석 잔째 차를 마시고 탁, 소리가 나도록 잔을 내려놓자 남궁산산이 넌지시 말했다.
“일단 적을 키워주면 어떻겠어요?”
“적의 적은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이용하잔 말이지?”
“그렇죠. 비록 당분간이지만.”
“방법 있어?”
“와룡부를 써먹어요. 그들이 특조대의 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호연청 쪽은 망설이게 될 거예요. 와룡부만 합류한다면 한번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흠, 아예 비월산장에 있는 고수들까지 다 데려오라고 할까?”
“그러면 와룡부주가 대환영할걸요?”
“다른 놈들도 지부의 무사를 빼돌리려 하지 않을까?”
“그건 쉽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관망하던 십이지부까지 얽혀서 전면전이 될 텐데, 죽 써서 개 주는 꼴이 될 게 뻔하거든요.”
곰곰이 생각하던 이무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우간 갔다 올 테니까, 너는 그 좋은 머리 팍팍 굴려서 좋은 방법이나 찾아 놔라.”
“알았어요, 오빠. 그럼 섬에 갈 때 함께 가는 거죠?”
이무환이 홱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잔머리는 굴리지 말고, 임마.”
호연청의 집무실에는 처음 보는 네 사람이 호연청과 함께 앉아 있었다.
백의, 청의, 갈의, 황의. 옷 색깔이 각각인데다가, 나이도 사십대 중년부터 육십대 노인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어차피 자신에 대해선 알려질 대로 알려진 상황, 이무환은 느긋이 걸음을 옮겨서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 앉게.”
호연청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무환이 의자를 드르륵 빼더니, 털썩 자리에 앉았다.
방정맞은 태도에 네 사람의 얼굴이 각각으로 변했다.
불쾌감, 분노, 실소, 무표정.
‘참 가지각색이군.’
성격도 다 다를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지닌 기운으로 봐서 적어도 각 부의 장로 급 인물들이었다. 그것도 최상위 급의 장로들.
문제는 이무환이 이들의 초상을 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장례 때도 못 봤고.
이유는 둘 중 하나다. 외부의 인물, 아니면 고의로 숨겼다는 것.
이무환이 무심한 눈빛으로 호연청을 바라보았다.
호연청이 평소와 다르게 신중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제 자네도 알아야 할 것 같아 이분들을 모셨네.”
그 말에 이무환이 네 사람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머리, 눈, 코, 입, 목, 어깨, 다시 목, 턱, 입…….
어찌나 꼼꼼히 살펴보는지, 네 사람이 불쾌감을 넘어서 짜증을 내며 슬며시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호연청이 어색함을 무마하려 헛기침을 했다.
“험, 혹시 알지 모르겠네만, 수룡단의 힘은 수룡단 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무환이 화답했다.
“저도 알죠. 밖에도 있잖습니까?”
“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네.”
기다렸던 말이었다.
이무환의 눈 깊은 곳에서 은은한 청광이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마침내 시작인가?’
그때 호연청이 말을 이었다.
“수룡단은 임무가 임무인 만큼, 각 부에 몇 사람씩의 비밀 대원들이 있네. 이분들이 그들을 이끄시지. 지위는 비록 부단주지만, 단주인 나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분들이라네.”
이해한다는 듯 이무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였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말을 잇는 호연청의 표정이 보다 편안해졌다.
“저분은 창룡부에 계시는 염화릉 염 노사시네. 그리고 저분은 철룡부에 계시는 우진학 우 형이시고, 저 사람은 검룡부의 곡유 장로, 저 사람은 적룡단의 갈이황 장로네. 음지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아마 자네는 얼굴을 알지 못할 게야.”
호연청은 네 사람의 이름을 늘어놓고,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작금의 사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건 자네도 잘 알 것이네. 우리 역시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생각했지. 해서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네.”
이무환이 불쑥 물었다.
“목적이 뭡니까?”
호연청이 눈을 빛내며 이무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하는 것이네. 구룡성을 외부의 세력에 넘겨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다음에는 구룡성을 집어삼키자는 거요?’
이무환은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다시 물었다.
“잠풍련은 강합니다. 게다가 사룡부의 부주들이 그들에게 협력하고 있습니다. 수룡단에 그들과 대항할 만한 힘이 있습니까?”
호연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들보다 강하다 할 수는 없네. 하지만 반대파의 힘을 결집하면 쉽게 밀리지도 않을 것이야.”
“저에게 바라는 것이 있을 것 같은데요?”
이무환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염화릉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잠시만 자네의 일을 중단하고 우리를 도와주었으면 하네.”
“중단? 특조대의 일을 말입니까?”
“그대가 너무 강하게 나가니 저들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면서 수룡단을 압박하고 있어. 이대로 가다가는 손을 쓰기도 전에 강제로 밀어붙일지 모르는 상황이야.”
“그럼 그만큼 적들의 정체가 쉽게 드러나니 상대하기가 쉬울 것 아닙니까?”
“그들이 너무 강하다는 게 문제네.”
“그럼 제가 조사를 중단하면, 여러분께서 그들을 막을 수 있습니까? 어느 세월에 그럴 만한 힘을 모을 수 있단 말입니까?”
염화릉이 붉어진 얼굴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이무환을 꼬나보았다.
‘건방진 놈!’
생각 같아서는 당장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어린놈과, 그것도 미친 용, 광룡과 싸워봐야 남는 게 없다는 걸 그도 잘 알았다. 우선은 참는 수밖에.
그가 입을 닫자 우진학이 나섰다.
“일단 조사를 먼저 중단하게. 그런 다음에 두고 보면 알지 않겠는가?”
그때다. 호연청이 넌지시 한마디 거들었다.
“사실 알게 모르게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 사람들이 있네. 그들이 있기에 잠풍련의 저의를 막을 생각도 하게 된 거지.”
이무환이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눈을 크게 떴다.
“도와주는 사람이라고요? 그게 누군데 그리 자신하는 것이지요?”
“자신들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아서 자네에게 당장 말해줄 수는 없네. 다만… 잠풍련처럼 구룡성에 욕심을 내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내가 장담하지.”
‘이제 털어놓는군. 그런데 뭐? 장담? 장담은 개 머리에 뿔 날 때나 하시지!’
속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호연청에게 세력이 있다는 것, 또 다른 세력과 연계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 아닌가.
문제는 그게 제삼의 세력인지, 아니면 천마교인지 그것이 관건일 뿐.
‘낯짝이 다 드러나는데 오래 걸리진 않겠어.’
이무환은 자신이 원하던 말이 흘러나오자 나름대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에 빠진 척했다.
그러다 호연청이 결론을 내리기 위해 막 입을 열려는데, 슬며시 고개를 들며 먼저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음? 어떻게 말인가?”
“때가 되면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와룡부에서 저희 특조대를 도와주겠다는 언질을 받았습니다.”
호연청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자신들이 손을 대지 못한 곳은 와룡부가 유일했다.
그들이 워낙 철저하게 중립을 지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군사들의 무리, 자칫하면 자신들의 마음이 다 드러날까 봐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흥분을 최대한 가라앉힌 호연청이 터져 나오려는 목소리를 누른 채 물었다.
“와룡부가 우리를 도와준다고?”
호연청은 특조대를 수룡단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어쨌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얼마 전에 제가 와룡부를 방문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말했지요.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정하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라고. 그랬더니 며칠 전 인편으로 말을 전해왔습니다.”
“그거 정말 반가운 소식이군!”
정말 반가운 것 같았다. 호연청은 물론이고 네 사람마저 얼굴이 밝아졌다.
꼭, 반쯤 미친놈도 개똥처럼 쓸데가 하나쯤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들을 향해 이무환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일을 완전히 중단할 수는 없으니 최대한 제 선에서만 움직여 보겠습니다. 그것이 수룡단의 전체 계획에도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이무환은 속삭이듯 나직이 말을 맺고, 다섯 사람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호연청이 맨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머지 네 사람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자존심이 있었다. 내사를 완전히 중단하라는 압박이 기분 좋을 리 없었다.
그런데 와룡부만 합류한다면 적의 압박에 굴복할 이유가 없었다.
“일단은 그렇게 하지. 그러고 보니 수고했다는 말 한번 제대로 못했군. 허허허, 정말 수고했네.”
업어달라면 업어줄 것 같은 호연청을 향해 이무환이 씩 웃었다.
“별말씀을. 공짜로 먹고 자는데 밥값은 해야죠. 그런데… 혹시 철관음 좀 더 얻을 수 없습니까?”
“얼마든지 가져가게나.”
“얼마든지요? 정말 그래도 됩니까?”
“허허허. 자네가 그리도 열심히 뛰는데, 내 무엇을 아끼겠나? 걱정 말고 가져가게.”
“감사합니다, 단주.”
반 시진 후.
이무환이 커다란 자루를 들고 돌아오자 남궁산산이 물었다.
“그게 뭐예요?”
“어, 철관음. 더 달라고 했더니 얼마든지 가려가라고 하잖아. 그래서 창고를 탈탈 털어서 자루째 들고 왔지.”
남궁산산이 입을 쩍 벌리고 자루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단주가 생각보다 인심이 괜찮더라고.”
이무환은 자루를 구석에 툭 던져 놓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
“멋쟁이! 가서 뇌고자(惱苦子) 좀 오라고 해. 할 말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