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79화
무료소설 광룡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97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79화
79화
흑의청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석 자 앞. 붉고 영롱한 구슬에 이제는 푸른 기마저 돌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터질 것 같고 숨이 막혔다.
또 다른 충격은,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밖에 있는 사람은 문도 열어보지 않고, 어린 소녀는 턱까지 괸 채 구경만 하고 있었다.
절대의 믿음이 깃든 눈빛.
‘이 정도였던가?’
소문은 들었다. 마룡부의 장로 장옥조를 패대기쳐 기절시켰다는 소문, 신룡부에서 장로 둘을 혼자서 잡아갔다는 소문을.
그래도 잘하면 평수는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단 한 수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상대는 여전히 똑같은 상태인데도.
그는 그 일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몸이 잘게 떨렸다.
‘내가 꿈꾸는 길에 이미 도달한 건가?’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자신의 몸이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때 이무환이 홍옥지를 거두어들이고 검지로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쇼.”
그가 말없이 다가와 앉자 이무환이 맞은편에 엉덩이를 걸쳤다.
“왜 왔소?”
흑의청년의 눈이 이무환을 향했다.
“특조대에 들었으면 해서 왔소.”
“실력이야 그 정도면 충분하고……. 부친이 보냈소?”
흑의청년의 잔잔하던 눈빛이 출렁거렸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걸로 한 가지만큼은 확실해졌으니까.
이자는 아버지가 절대 풀 수 없을 거라 확신했던 것을 풀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비밀이 이제는 비밀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하게도 자신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원해서 왔소.”
“그 양반도 알고 있소?”
흑의청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무환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전하라는 말이 있을 것 같은데…….”
흑의청년, 제갈신걸이 희미한 경악이 담긴 눈으로 이무환을 직시했다.
“그전에… 아버님이 잘 생각했다는 생각이 드오.”
“뭘 말이오?”
“어제 밤이 새도록 고민하셨소. 그리고 새벽이 밝을 즈음이 되어서야 날 불렀소.”
“그것 참. 뭐 생각할 거 있다고. 떡이 상했으면 버리면 될 것을.”
“버리시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오. 십 년이 넘도록 만들어온 것이었으니까 말이오.”
“흠… 하긴, 그렇게 쉽게 포기할 정도면 이미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겠지. 그래, 무슨 말을 전하라 했소?”
“와룡부는 특조대주를 전격적으로 돕겠다 하셨소.”
돕겠다는 대상이 수룡단이 아니라 특조대주다.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이무환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
전격적으로 돕는 것 이상의 또 뭐가 있을까?
그런데 묻는다. 당연히 다른 것이 또 있을 거라는 듯.
제갈신걸은 놀라다 못해 허탈한 심정으로 순순히 대답했다.
“특조대가 해체되어도 와룡부는 대주와 뜻을 같이할 것이오.”
“그건 조금 마음에 드는군요.”
“자세한 것은 만나서 이야기했으면 하시었소.”
“그래야겠죠.”
이무환의 의자의 등받이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꼬맹아, 차 좀 내와라.”
“예, 오빠!”
남궁산산이 나비처럼 사뿐사뿐 걸어서 차를 가지러 갔다.
차가 나오자 이무환이 말했다.
“뒤쪽에 있는 것은 기억 속에서 지우겠다고 말씀해 주쇼.”
제갈신걸이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그대로 전하겠소.”
“그대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요. 혹시라도 알고 싶거든 포기하쇼. 알아서 좋을 것 없으니까.”
목이 타는지 무심코 찻잔을 잡아가던 제갈신걸이 멈칫했다.
“한 가지만…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소?”
이무환이 제갈신걸을 빤히 쳐다보았다.
제갈신걸은 이무환이 거절하기 전에 다급히 물었다.
“혹시… 거기에 한 여인에 대해 적힌 내용이 없었소?”
이무환이 찻잔을 잡아 단숨에 마셨다.
‘흠, 세상 다 산 것 같은 표정이 그 여자 때문이었나?’
나름 제갈신걸의 표정을 분석하며 빈 잔을 내려놓자 남궁산산이 재빨리 잔을 채웠다.
“맹세를 하쇼. 지금의 일에 절대 영향을 미치지 않겠다고.”
“하겠소. 내 모든 것을 걸고.”
간절한 제갈신걸의 표정에 이무환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조금도 장난기가 없는 목소리로.
“있었소. 그러나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당신 아버지만의 잘못이 아니오.”
“그녀가… 주, 죽었소?”
제갈신걸은 차마 열리지 않는 입을 억지로 떼어내서 물었다.
달라붙은 입술이 찢어져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이무환은 그런 제갈신걸을 직시한 채 고개를 저었다.
“죽지는 않았소. 그냥 떠났을 뿐이지. 당신 아버지조차 모르는 곳으로.”
제갈신걸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일시에 단전이 텅 빈 사람의 모습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가 다시 원래로 돌아가는 데는 반 각 정도가 걸렸다.
이무환이 철관음 세 잔을 더 비우고 잔을 내려놓자, 제갈신걸이 음울한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이 일이 끝나면 떠날 것이오. 그전까지 대주에게 나를 맡기겠소.”
“그러던가…….”
와룡부가 품 안에 들어왔다.
어제는 호박이 넝쿨째. 오늘은 떼고기가 그물째!
겉으로야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이무환은 배가 터질 듯이 불렀다.
“꼬맹아, 여기 차 한 잔 더.”
“뭔 차를 붕어처럼 마셔요? 벌써 다섯 잔짼데 그래도 줘요, 붕어오빠?”
“어.”
2
무설강이 네 명의 수하를 데리고 광룡대를 찾아온 것은 그날 미시 무렵이었다.
이무환은 무설강이 오자마자, 마치 사면이라도 단행하듯 형옥에 갇혀 있던 자들 중 대부분을 풀어주었다.
조사는 거의 마친 상태. 심하게 고문한 자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간부들 아닌가? 고문하다 죽든, 병신이 되어서 돌아가든 반발이 심할 터. 특조대에 대한 압박이 거세지면 좋을 게 없었다.
오히려 별다른 고문도 없이 돌려보내면 적들은 수룡단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한 동안 머리를 쥐어짜지 않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특조대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풀려나자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다.
―순순히 불고 풀려났을 것이다.
―뭔 소리! 특조대가 겁을 집어먹고 풀어준 거다.
―아니다. 광룡이 너무 설치니까 수룡단주 호연청이 제동을 걸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광룡이 너무 설쳤다는 소문에 손을 들어줬다.
의욕은 좋았지만 특조대도 별수 없었을 거라는, 위로의 말까지 돌았다.
이무환은 남들이야 어떻게 떠들든 상관하지 않고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광룡대의 힘을 키우는 일에 주력하면서.
그 일은 굳이 그가 직접 나설 것도 없었다.
무설강과 제갈신걸은 구룡수호단의 수장들에 비해서도 한수 위였다.
영호승 등은 틈만 나면 그들을 졸라댔다.
“때로는 격차가 많이 나는 사람보다 격차가 덜한 사람과의 비무가 효과적일 때가 있어. 그러니까 저 사람들을 졸라대.”
그렇게 이무환이 넌지시 던진 충고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그들도 이무환에게 매일 두들겨 맞는 것보다 무설강이나 제갈신걸 등과 비무하는 게 훨씬 편하고 재미있었다.
물론 상대들의 마음은 달랐지만.
영호승 등은 거머리처럼 달라붙는데다, 가끔 생각지도 못했던 변화무쌍한 공격을 날렸다. 그 공격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실력 차가 큰 무설강과 제갈신걸조차 식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닷새째가 되자 무설강이 넌지시 물었다.
“우리와 총대주를 비교하면 어떤가?”
영호승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두 분이 합공해서 이십 초 견디면 열 냥 내지요.”
합공이라 했으니 이무환이 지는 쪽이 아닐 것이다.
그날 이후 무설강과 제갈무진은 그런 질문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
그렇게 열흘이 흐르고 구룡성이 조용해질 즈음. 때가 되었다는 듯 이무환이 특조대를 집합시켰다.
그러고는 나들이라도 가듯이 소리쳤다.
“날씨도 좋은데, 천룡부에나 갑시다!”
비라도 올 것처럼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었다.
솔직히 날씨는 별로였지만, 누구도 그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광룡에게 날씨가 무슨 상관이랴. 비 오면 용이 승천하기에 좋으니까 좋은 날씨라고 한 것이겠지.
그렇게 편하게 생각했다.
3
천룡부의 무사들 중 이무환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대뜸 천룡전으로 다가가는데도 누구 하나 막지 못했다.
천룡전 안으로 들어가자 이충선이 짜증을 내며 이무환을 노려보았다.
“왜 또 왔는가?”
이무환이 간단히 답했다.
“이곳에 잠풍련의 간자들이 숨어들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해서 조사차 온 거지요.”
“잠풍련? 놈들이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놈들은 신룡부와 마룡부 쪽에 있지 않던가?”
“그래서 조사차 나왔다지 않습니까?”
이무환은 삐딱하게 대답하고는 세 사람의 이름을 읊었다.
“장안수, 소금봉, 유곽. 이 세 사람이 최근 천룡전에 들어왔다 하더군요.”
움찔한 이충선이 눈을 좁혔다.
한쪽에서 느긋이 상황을 바라만 보고 있던 이충현도 마지막에 유곽의 이름이 나오자 흠칫 얼굴이 굳어졌다.
이충선이 최대한 흔들림을 가라앉히고 태연히 말했다.
“얼마 전 사람을 보충하느라 몇 사람을 뽑은 적이 있는데, 그들이군. 하지만 그들은 자네 말처럼 잠풍련의 간자가 아니네.”
이무환이 천룡전 내에 들어서 있는 삼십여 명의 천룡부 무사를 둘러보며 나직이 말했다.
“이미 증거가 다 있습니다. 잠풍련의 간자를 잡아들이는 것은 천룡부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 협조를 해주시지요.”
이충선의 눈자위가 가늘게 떨렸다.
정말 증거가 있다면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천룡부의 무사들이 가만있지 않을 터, 그들을 보호하려다가는 자신들도 끝장이 날 테니까.
“정말 증거가 있단 말인가?”
“잘 아시겠지만, 신룡부와 마룡부에서 몇 사람을 잡아다 심문을 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게다가 여기 이렇게…….”
이무환이 품에서 한 장의 서신을 꺼내 들고 말을 이었다.
“그들에 대한 행적이 낱낱이 적힌 것이 있는데…….”
그때였다.
천룡전의 뒤쪽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딜 가느냐?”
“놈을 잡아!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라!”
챙! 콰광!
싸우는 소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 사이 이충선과 이충현의 표정이 서너 번은 변했다.
하는 수 없다 생각했는지 이충선이 벌떡 일어섰다.
“증거가 확실한 일이라면 당연히 협조하겠네. 모두 나가서 잠풍련의 간자를 잡아라!”
대전에 서 있던 무사 삼십여 명이 일제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무환은 조용히 뒷짐 진 채 기다렸다.
반 각이 지날 즈음, 특조대가 세 사람을 끌고 들어왔다.
선두에 선 무설강을 본 이충선이 눈을 부릅떴다.
“무설강! 너……!”
이무환이 그의 말을 끊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얼마 전부터 그도 특조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충선과 이충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무설강이 특조대원이 되었다면, 자신들이 그를 배척한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무환은 당황한 두 사람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냉랭히 말했다.
“조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누구도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구룡무제께서 돌아가신 천룡부에서 수상한 자가 발견된 만큼, 만일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누구라도 압송할 것입니다.”
이충현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지, 지금 우리를 협박하는 건가?”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아! 그리고, 대공자께선 어디 계십니까? 그분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이충선이 흠칫하며 물었다.
“누… 구? 금환이 말인가?”
“당연히 천룡부의 일은 그분과 상의하는 게 원칙 아니겠습니까? 구룡무제께서 돌아가셨으니, 그분이 천룡의 적통 후계자이실 텐데요?”
유난히 큰 목소리. 천룡전이 은은히 울렸다.
어느새 천룡전 안팎으로 백수십 명의 무사가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이무환의 말에 웅성거리며 천룡전을 주시했다.
이충선과 이충현이 살기 띤 눈으로 이무환을 노려보자, 이무환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설마 천룡의 적통이 대공자라는 것을 두 분이 모르셨을 리는 없으셨을 테고…….”
이무환이 말을 끌며 눈을 돌려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충신을 바라보았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이충신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주의 말이 옳네. 천룡의 후계자는 큰조카인 금환이지.”
이충현이 다급히 나서서 이충신을 다그쳤다.
“아우!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는 줄 아나?”
그러고는 살기어린 눈으로 이무환을 돌아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