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77화
무료소설 광룡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16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77화
77화
혁천기가 떨리는 눈으로 이무환를 쳐다보았다.
마룡부주의 아들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살아온지 이십팔 년. 언제 이런 경우를 당해봤던가.
두들겨 맞은 곳은 움직일 때마다 뼈를 갉아대는 것 같았다.
놈은 전문가처럼 표 나지 않는 곳만 골라 때려서 뼛속 깊숙이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몸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정신적인 고통이 더 문제다.
흐르다 시커멓게 굳은 핏덩이.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점과 뼛조각들이 썩어서 여기저기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숨을 쉬기도 힘든 상황.
하루가 지났는데도 아무도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는다.
하늘을 찌를 것 같던 오만도 뇌옥에 들어온 지 한 시진 만에 나락으로 추락해 버렸다.
대체 왜 나를 그냥 여기에 놔두는 걸까?
정말 고문을 당하도록 놔둘 생각인가?
더구나 조금 전에는 신룡부의 장로조차 잡혀 들어왔다. 그것도 두 사람이나.
그들은 자신의 방보다 더 더럽고 처참한 흔적이 남겨진 방에 수감되었다.
맙소사! 이놈은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다.
제정신이라면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때 미친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로 하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야. 일각 후부터는 형옥당주가 고문 전문가를 데려올 테니까. 뭐, 죽이지는 않을 거야. 마룡부주에게 살려서 보내겠다고 약속했거든. 대신 고통이 조금 있겠지. 당신이 참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 나는…….”
혁천기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무환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남은 시간은 일각이야. 잘 생각해 봐. 사실 여기에 당신 혼자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 당신이 여기서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누가 했는지 모를 걸? 어차피 다른 사람도 입을 열 테니까.”
유혹이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
뚜벅, 뚜벅. 걸음 소리가 멀어진다.
그리고 잠시 후.
저쪽 끝 방에서 미친놈과 추호상의 대화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미친놈의 목소리가,
“신곽이 어떻게 죽었는지…….”
잠시 후에는 추호상의 목소리가.
“사람을 그렇게 처참하게 죽이다니, 악마 같은 놈!”
신곽은 자신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팔다리의 뼈를 다 부러뜨리고, 힘줄을 뽑았다고 했다.
추호상도, 손척도 그렇게 할 거라는 듯 말하고 있었다.
자신도 그리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살이 떨렸다. 머릿속이 멍해져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일각 후.
광룡이 아닌 다른 자가 들어왔다. 차가운 얼굴. 온몸에서 한기가 흘러나오는 자였다.
그의 허리에는 작은 칼부터 톱, 망치, 기다란 바늘 등 온갖 물건이 꽂혀 있었다.
혁천기가 벌벌 떨며 고개를 들자, 엽상이 한여름에 눈발이 풀풀 날릴 것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시작해 볼까?”
“자, 잠깐만!”
엽상이 뇌옥에서 나온 것은 한 시진 후였다.
그는 혁천기가 주절거린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마지막으로 한 사람에 대한 것을 보고했다.
“놈에 대한 것을 알아냈습니다, 총대주.”
엽상의 대답에 이무환이 고개를 틀었다.
“어떤 놈?”
알아볼 놈은 둘이다. 엽상이 재빨리 말을 수정했다.
“전마각에 있던 그놈 말입니다.”
“어떤 놈인데?”
“이름은 신도연풍. 마룡부주의 외조카라고 합니다.”
이무환이 빤히 엽상을 바라보더니 던지듯 물었다.
“그것뿐이야?”
“나이는 서른하나. 미혼이고, 마룡부에 들어온 것은 팔 년 전이라고 합니다.”
“또?”
딱 한두 마디로 묻는 이무환이다. 그런데도 엽상의 이마에 삐질 땀이 솟았다.
“나머지는 놈조차 잘 모른다고…….”
이무환이 엽상의 말을 정리했다.
“이름은 신도연풍. 마룡부주의 외조카. 서른한 살. 미혼. 팔 년 전 구룡성에 입성. 맞아?”
“맞습니다, 총대주!”
엽상이 이무환의 기억력을 칭찬하듯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이무환이 찻잔을 쥐며 물었다.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이 뭐지?”
“에……. 일단 이름을 알았다는 것이…….”
“얼굴 그린 것 있어?”
“그리지 못했습니다. 혁천기의 손이 워낙 떨려서…….”
“몸의 특징 같은 것은?”
“그것도…….”
“무공에 대해선?”
“아직…….”
힐끗, 엽상의 눈이 이무환의 손을 향했다.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준 이무환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러니까, 그것만으로 길거리에 나온 신도연풍인가 뭔가 하는 자를 알아봐야 한단 말이지?”
찻잔이 탁자에서 반 치가량 떨어진 순간, 갑자기 엽상이 눈을 크게 떴다.
“아! 깜박 잊은 게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확인하고 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엽상이 홱 몸을 돌리더니 빠르게 방을 벗어났다.
이무환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남궁산산에게 물었다.
“갑자기 왜 저래?”
남궁산산이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빠가 잔을 던질 줄 알았나 보죠.”
“미쳤어? 두 냥이나 주고 산 잔을 내가 왜 던져? 네가 잔을 덥혀야 차 맛이 제대로 난다고 해서 쥐고 있었을 뿐인데. 어디 차나 한 잔 따라봐.”
엽상은 일각이 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무환은 차를 두 잔 더 마실 때까지 엽상이 나타나지 않자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했다.
‘왜 안 오지?’
엽상을 찾으러 사람을 보내야 하나, 좀 더 기다려야 하나, 이무환이 고민하고 있을 때 한 통의 서찰이 전해졌다.
‘금’이라는 이름으로 보내진 서찰이었다.
어쩌면 천하에서 오직 자신만이 그 이름을 알지도 몰랐다. 자신이 그렇게 불렀던 이름이니까.
내용은 단순했다.
[오늘 밤, 내 방에서 만났으면 합니다.]
왠지 묘한 생각을 들게 하는 내용이었다.
남궁산산이 고개를 쭉 빼고 보더니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머, 어떤 여자예요? 밤에 왜 자기 방에서 만나자고 한데요?”
결코 여인이 보낸 서찰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무환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나도 잘은 몰라. 그래도 오라니까 가봐야지. 흐흐흐.”
남궁산산이 입을 삐죽였다.
‘피이, 내가 모를 줄 알고?’
3
구름이 달을 삼켜 버린 밤.
이무환은 영호승에게만 나갔다 온다는 말을 남기고, 묵린도를 벗 삼아 광룡대를 벗어났다.
대기는 바람 한 점 없이 습기가 눅눅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만 같았다.
반 각 후.
이끼 낀 지붕 위에 앉은 이무환은 무심히 가라앉은 눈으로 저 너머 천룡전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묘했다. 그러잖아도 한적하게 느껴지던 천룡부였는데, 오늘따라 더욱더 고요했다.
곳곳에 켜진 화톳불이 활활 타오르는데도, 분위기는 이끼에 내려앉은 이슬만큼이나 축축하게만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이경이 넘어가는 시각.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아니면 날씨 때문인지 분위기가 바뀔 줄 모르고 여전히 축축했다.
이무환은 슬며시 몸을 일으켜 이금환의 거처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거처는 의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후원에 있었다.
어둠이 그의 그림자를 가려준 덕에 접근하는 것은 어려움이 없었다.
더구나 후원은 천룡전 쪽과 달리 화톳불도 없었다. 이금환의 거처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만이 주위를 은은히 밝히고 있을 뿐.
한 마리 야조처럼 이금환의 거처 앞에 내려선 이무환은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태연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자, 황촉불 하나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있던 세 사람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가운데 있는 사람은 이금환, 나머지 두 사람은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이무환이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당장 검을 뽑을 것 같은 태세로 이무환을 노려보았다.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놀란 듯했다.
이금환이 재빨리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진정하게. 같은 편이니까.”
이무환이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 형이 뭘 잘못 알았나 봅니다. 저는 저 두 사람과 같은 편이 아닙니다.”
이금환이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 미처 다른 사람이 올 거라는 말을 남기지는 못했소. 그 점은 미안하오.”
“그게 아니라, 내 편은 현재 금 형뿐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저 두 분과는 적도 아닙니다만.”
두 사람이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나중에는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앉으시오. 내 소개시켜 줄 테니까.”
이무환은 탁자 앞으로 다가가 의자를 빼내 앉았다.
그제야 두 사람도 의자에 앉았다.
“여기 이 사람은 창룡부의 여건호, 이쪽은 철룡부의 철위종이라는 형제외다. 나와 생사를 같이하기로 한 사람들이오.”
여건호는 창룡부주 여후량의 삼남이녀 중 둘째 아들이었고, 철위종은 철룡부주 철군평의 넷째 아들이었다.
두 사람이 창룡과 철룡의 자식들임을 알고 이무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무환이라 하오.”
이무환이 성을 뺀 이름을 밝힌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이 묘하게 이지러졌다.
여건호가 물었다.
“혹시… 특조대주 광룡?”
“좋을 대로 부르시오. 원래 내가 속한 대의 이름이 광룡대니까.”
두 사람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역시 광룡에 대한 소문을 귀가 따갑게 들었다. 심지어 그가 완전히 미친놈이라는 말까지 들은 터였다.
마룡부에 이어 신룡부까지 뒤집어 버렸다는 말에, 역시 미친놈이라는 말을 조금 전까지 나누지 않았던가.
이야기하던 중 이금환이 괴이한 표정을 짓는 게 조금 이상했지만, 설마하니 오늘 만날 중요한 인물이 광룡이었을 줄이야!
잠시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이금환이 입을 열었다.
“인사도 나누었으니 이제 이야기를 해보세.”
그때 이무환이 물었다.
“금 형, 그전에 한 가지만 물읍시다.”
“뭡니까?”
“이 사람들, 정말 생사를 같이할 사람들입니까?”
“물론이오. 어차피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같이 살던가, 아니면 같이 죽던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인데 다른 길이 어디 있겠소.”
여건호와 철위종이 분노한 표정으로 이무환을 노려보았다.
상대가 광룡만 아니라면 당장 달려들었을 텐데,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표정이었다.
이무환이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인상 쓴다는 듯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나는 내가 믿는 사람들이 아니면 속에 있는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해하쇼.”
두 사람 다 눈빛이 맑고, 분노하고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아직 철이 없던가, 아니면 같이 죽지는 못해도 그럭저럭 한 팔은 내놓을 것처럼 보인다.
하긴 수룡단이 지금까지 이들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한 걸 봐도, 이금환의 말이 그냥 멋으로 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이무환은 그들에게서 신경을 끄고 이금환에게 물었다.
“천룡전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던데, 무엇 때문인지 아시는 게 있습니까?”
이금환이 침중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두 욕심 많은 숙부가 서로 천룡의 주인이 되고 싶은 모양이오.”
오늘 오후, 구룡회합에 다녀온 이충선과 이충현이 더 참지 못하고 부딪쳤다. 그 바람에 분위기가 가라앉고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한데 아무래도 조용히 넘어갈 것 같지가 않소.”
이금환의 설명에 이무환이 냉랭히 코웃음 쳤다.
“흥! 이무기도 못 되는 자들이 천룡의 자리를 욕심내다니.”
이충선과 이충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당장은 이충광과 이금환 때문에 표면에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 만일 이충광이 죽기라도 한다면 곧바로 야욕을 드러낼 터였다.
이무환은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대고 이금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원로들께선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뭐라고 언질을 주신 거라도 있습니까?”
“이상할 정도로 입을 다물고 계셔서 무슨 생각이신지 도통 모르겠소.”
‘지금으로선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이무환은 그 이유를 알았지만, 말해주지는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대신 은근한 어조로 나직이 물었다.
“다 엎어버리고 싶어요? 제가 가서 한바탕 휘저어 버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