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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룡기 68화

무료소설 광룡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740회 작성일

소설 읽기 : 광룡기 68화

 

68화

 

 

 

 

 

 

 

 

주는 것이 있어야 받을 수 있는 법. 이무환은 솔직히 말했다.

 

“시작은 내가 했는데, 빌어먹을 단주가 약간 틀었지요.”

 

역시 생각대로다. 거기다 호연청과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선은 그 정도만으로도 안심이었다.

 

“내가 도와줄 일은 없겠소?”

 

유유자적하는 것으로 알려진 사람. 그런 사람이 도와줄 일이 없냐고 묻는다.

 

결코 허투루 지나가듯이 하는 말이 아니다.

 

“이곳을 버리고 나갈 마음은 있습니까?”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나가야겠지요.”

 

뜻이 있다는 말이다. 그 뜻을 펼칠 수 없으니 답답했고, 그런 자신의 능력을 알기에 허무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도와줄 수 있습니까?”

 

“생각보다 더 많이 도와줄 수 있을 것이오.”

 

“큭, 재미있군요.”

 

이무환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자존심이 상한 듯 이금환이 그런 이무환을 노려보았다.

 

“내가 그렇게 형편없어 보이오?”

 

말투도 진중해졌다. 약간의 노기마저 보이는 목소리.

 

그런데도 이무환은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이나 내일 밤쯤 누군가가 찾아올 거라 생각했지요. 이곳은 천룡부, 토룡들만 모여 있는 곳이 아니니까. 그런데 설마 웅크리고 있던 잠룡이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이금환이 복잡한 표정으로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노기는 씻은 듯이 사라진 눈빛이었다.

 

“무슨 뜻이오?”

 

이무환이 정색하고 물었다.

 

“다시 묻지요. 정말 모든 것을 깨끗하게 버릴 마음은 있는 겁니까?”

 

이금환이 굳은 표정을 지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무환이 다시 물었다.

 

“돌아가신 구룡무제께 뜻을 밝힌 적 있습니까?”

 

이금환이 아픈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 않았소.”

 

“하긴, 미리 했으면 저번에 만나 뵈었을 때 어떤 말씀이 있었을 텐데……. 근데 왜 안 한 거요?”

 

잠시 의아해하던 이금환이 잇새로 말했다.

 

“내 자신까지 속이기 위해서.”

 

‘철저하군. 하긴 그렇게 했으니 이충선이나 이충현이 경계를 하지 않았겠지.’

 

이무환이 탁자를 톡톡 치더니 남궁산산에게 말했다.

 

“차가 비었다. 좀 따라라.”

 

멍하니 있던 남궁산산이 얌전하게 일어나더니 곱게 차를 따랐다.

 

“쯔읍, 안 하던 짓을 하면 엉덩이에 뿔난다던데.”

 

남궁산산이 배시시 웃었다.

 

이무환은 벌컥벌컥 소리 내며 차를 물처럼 마시고는 탁! 찻잔을 내려놓았다.

 

“좋습니다. 까짓 거, 한번 해봅시다.”

 

마치 어깨에 얹어진 억만 근 무게의 지게를 내려놓은 듯 이금환이 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승룡원의 동지들이여, 이제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수밖에.’

 

“얼굴 좀 피쇼.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죽을상인 거요?”

 

이무환의 거침없는 말에 이금환이 조용히 웃었다.

 

“그러겠소.”

 

“아, 조부가 돌아가셨는데 웃으면 됩니까? 그냥 찡그러진 얼굴만 펴면 되지.”

 

“그것도 그렇구려.”

 

“총대장은 나요. 나는 대장이 아니면 어떤 일이든 하기 싫거든.”

 

“마음대로…….”

 

“그래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으니까, 혹시 금 형이 이끄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은 금 형이 알아서 하시구려.”

 

이금환의 눈빛이 찰나간 흔들렸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말한다. ‘혹시’라고 가정하고 말하지만 확신하는 듯했다.

 

‘생각보다 무서운 친구군.’

 

“그럼… 그 일은 말씀대로 하겠소.”

 

이금환이 대답하자, 이무환이 두 손을 들었다 의자의 팔걸이를 내려쳤다.

 

“후우, 이제 좀 쉬어야겠으니 가보슈. 어차피 서로 시간을 가지고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니까. 본격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옳은 말이었다. 이 자리에서 뿌리를 뽑으려면 날을 새도 모자랐다.

 

하지만 밤에는 쥐도 많고 밤새도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들의 눈과 귀가 이곳을 향하고 있을지 몰랐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금환이 말없이 포권을 취하고 돌아섰다.

 

방문을 일 장가량 남겨놓았을 때다. 이금환이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모로 꼬고 말했다.

 

“좀 전에 금 형이라고 하셨는데, 내 성은 이씨요, 무 대주. 금씨가 아니라.”

 

이무환이 이금환의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가 다시 걸음을 옮기자 불쑥 말했다.

 

“내 성도 원래는 이씨요. 무씨가 아니라.”

 

이금환이 움찔하더니 걸음을 다시 멈췄다.

 

이무환이 손을 저었다. 빨리 나가라는 듯.

 

“다음에 이야기하자니까요? 오늘은 그냥 가슈.”

 

이금환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성이 이씨라면…… 이.무.환?’

 

그렇게 네 걸음. 방문을 잡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무환은 이금환이 나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꼬맹아, 이금환의 잔을 치우고 새 잔을 하나 갖다 놔라.”

 

남궁산산이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잔을 바꾸어놓았다.

 

그렇게 열을 셀 정도가 지났을 때다. 이무환이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내려오시죠.”

 

곧이어 천장의 한쪽이 소리 없이 들리더니 무설강이 내려왔다.

 

전에 봤을 때보다 더 굳은 얼굴이었다. 철사자가 아니라 석사자처럼 보였다.

 

게다가 옷도 거친 마의를 입고 있었다.

 

“앉으시죠.”

 

이무환의 턱짓에 무설강이 탁자로 다가왔다.

 

그는 탁자 위의 잔을 보고는 눈을 들었다.

 

“다른 손님이 있는가?”

 

“왔는데, 오기 바로 전에 갔습니다. 그 잔은 무 형 잔입니다.”

 

무설강의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돌가루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나?”

 

이무환은 대답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무 형이 그분과 마지막 대화를 했습니까?”

 

“어떻게 알았지?”

 

“그분께서 바로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걸 알았죠. 그렇다면 누군가가 달려왔을 것이 아닙니까? 제일 가까이 있던 사람이 말이죠.”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다.

 

무설강은 처음으로 표정을 지었다. 그저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 쓴웃음에 불과했지만.

 

“그분이 자네를 찾아가라 하더군.”

 

“혹시, 뭘 준다던가 하지는 않던가요?”

 

무설강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어떻게 그걸……?”

 

“그분은 제가 공짜를 무지 좋아한다는 걸 잘 아시거든요.”

 

“으음…….”

 

“일단 말부터 들어보죠. 뭐라고 하시던가요? 혹시 저를 도와주라던가, 아니면 적의 힘이 너무 강하니 복수하지 말고 이곳을 떠나라던가 하지 않으시던가요?”

 

무설강이 조금은 허탈한 표정으로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자네…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군. 어떻게 알았나?”

 

“참나, 곧 저 세상으로 가실 분이 남길 말이 그것 말고 뭐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 양반은 적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을 거 아닙니까? 설마 저나 무 형에게 날계란으로 바위를 깨라고 하겠습니까?”

 

하긴 그랬다. 그래도 조금은 억울했다. 자신을 향한 눈길을 피하기 위해 밤이슬을 맞고 몰래 숨어든 노고가 다 공염불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나마 아직 한 가지 말이 남아 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한 가지 더 있네. 그분께서 그러시더군.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말이야.”

 

무엇을? 누구를?

 

이무환은 조용히 찻잔을 들여다봤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세히는 몰라도 조금은 눈치 챘을 것이다. 노인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보인다고 하니까.

 

힘들게 살아왔다고 해서 가족들을 미워하지는 말라는 말일까?

 

“하여간 웃기는 노인네야. 뭘 안다고 그런 말을 남긴 거야?”

 

자신의 사부를 비웃는 말에 무설강이 발끈했다.

 

“자네, 정말……!”

 

그러다 축축이 젖은 이무환의 눈을 보고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사부와 무슨 관계일까?

 

그때 문득 사부의 말투가 떠오른다.

 

 

 

“무환이… 조카처럼…….”

 

 

 

단순히 아무에게나 하는 말투가 아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나 할 법한 말투다. 게다가 자신에게도 숨긴 것을 무환이라는 청년에게 주라지 않았는가.

 

그가 물었다.

 

“혹시 자네 성이… 이씨가 아닌가?”

 

이무환이 그걸 이제야 알았냐는 듯 쏘아붙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진짜 무씨인 줄 알았습니까? 그거나 줘보시죠. 뭘 남겼는가 보게.”

 

무설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봉투를 받아 든 이무환은 그 자리에서 봉투를 개봉했다. 무설강이 앞에 있는 것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안에서 나온 것은 석 장의 서신과 작은 책자 하나, 그리고 뭔가 묵직한 것이 들은 주머니가 전부였다.

 

책자는 손때가 묻은 걸 보니 제법 오랜 세월을 적어온 것 같았다. 하지만 서신은 적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아마 자신을 만난 이후에 적은 것처럼 보였다.

 

이무환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 한쪽에 던져 놓고, 먼저 서신을 펼쳤다.

 

한 장, 두 장, 서신을 읽어가던 이무환이 피식피식 웃었다.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크크크크, 빌어먹을. 그랬단 말이지? 정말……. 어휴…….”

 

무설강은 머리가 쪼개질 정도로 궁금했지만, 억지로 서신에 눈을 두지 않았다.

 

‘무환. 이씨니까 이무환. 구룡성에는 그런 이름의 손자를 둔 아들도, 조카도 없다. 그럼 밖에……. 가만… 그럼 혹시 이십여 년 전의……?’

 

무설강의 눈이 커질 때다.

 

서신을 다 읽은 이무환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작은 책자를 잡아 첫 장을 펼쳤다.

 

삼십여 장의 책자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는데, 각 장 중간중간에 날짜가 적혀 있었다.

 

천룡지주, 구룡성의 제왕 구룡무제의 비밀 일지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무환의 표정이 굳어졌다.

 

얼굴은 물론이고 몸도 굳어졌다. 움직이는 것은 오직 손가락과 눈동자뿐이었다.

 

일각, 이각…….

 

생각보다 오랜 시간, 이무환의 눈이 책자에 틀어박혔다.

 

둥!

 

자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시작됨과 동시 마지막 장을 탁, 덮은 이무환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석상처럼 굳어 있는 무설강을 바라본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왜… 그분이 복수를 포기하라 했는지, 너무 미워하지 말라 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겠군요. 설마하니 이토록 복잡하게 얽혀 있을 줄이야…….”

 

무설강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질문을 하면 그때부터 함께 가야 한다.

 

하지만 자신은 사부의 뜻을 따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돌아가신 사부께 죄를 짓더라도!

 

대신 그는 자신의 뜻을 밝혔다. 돌로 된 사자의 탁한 목소리로.

 

“나는 내 길을 갈 것이네. 설령 바위에 부딪쳐 온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계란이 되더라도 말이야.”

 

그게 자신의 뜻인 것이다.

 

무설강의 말에 이무환이 희미하게 웃었다.

 

“제가 살던 섬에는 갈매기들이 시도 때도 없이 똥을 갈겨대는데, 그 묽은 똥이 굳으면 바위보다 더 단단해지지요. 똥을 떼어내려 망치질을 하면 바위가 갈라지고 말 정도니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만일 무 형에게 계란을 주고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바위를 깨라면 깰 수 있겠습니까?”

 

웬 헛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갑자기 계란으로 바위를 깨보란다.

 

그런데 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무설강이 이무환을 노려보았다.

 

“나는… 깰 수 있네.”

 

이무환의 웃음이 짙어졌다.

 

“저도 깰 수 있지요.”

 

무설강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네, 그럼……?”

 

무설강의 입가에 실처럼 가느다란 미소가 그려졌다.

 

처음으로 보는 웃음. 그리 못난 웃음은 아니었다.

 

웃는 그에게 이무환이 말했다.

 

“참! 저번에 가져간 장갑, 잘 썼습니다. 그런데 선물로 받은 사람 기분이 별로인 것 같더군요. 좀 더 새 걸로 줄 걸 그랬나 봅니다.”

 

무설강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왜 사부께서 웃으셨는지.

 

사부의 죽음으로 천참만륙된 자신의 심장에 웃음꽃이 피어나지 않는가 말이다.

 

“자네, 사람 웃기는 재주가 있군.”

 

쇠로 된 사자를 웃겼으니 그런 말을 할만도 했다.

 

그러나 이무환은 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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