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6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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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이무환이 특조대와 함께 방을 나가자 이충선이 탁자 위의 찻잔을 움켜쥐었다.
“대체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 저놈에게 범인이 자결했다는 것을 알려준 거야!”
손에 쥐어진 찻잔이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뭔가 일이 어그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혹시 충현이가?’
그럴지도 몰랐다. 놈은 자신과 배다른 형제. 언제든 천룡의 자리를 노릴 만한 놈이니까.
‘흥! 만일 네가 그런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면 실수하는 거다, 이놈. 나도 너에 대해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까.’
어쨌든 흘러가는 일이 순탄치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충선은 이를 갈았다.
‘제기랄, 너무 빨리 일이 터졌어!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보다 완벽한 준비를 했을 텐데…….’
이충선이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골머리를 썩고 있는 사이, 이무환은 의당으로 갔다.
의당의 무사들이 멋모르고 가로막았지만, 이번에도 이무환의 명을 받은 북리웅과 백장청과 상관수가 거침없이 뚫고 들어갔다.
‘역시 잘 데려왔어. 광룡대만 있었으면 내가 직접 손을 썼어야 했을 텐데 말이야.’
그렇게 세 사람을 사냥개처럼 앞세우고 들어간 지하는 제법 넓었다.
지하에는 이십여 구의 시신이 있었는데, 목이 잡혀 끌려온 의원은 그중 구석에 있는 관으로 곧장 다가갔다.
“이게 천룡전에서 나온 시신입니다.”
덜컹!
이무환이 관 뚜껑을 발끝으로 제쳤다.
관 속 범인의 시신은 반쯤 녹아 있었다.
지독한 독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냄새만으로도 머리가 멍할 정도였다. 다행이라면 냄새만으로는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본 적 없어?”
이무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얼굴도 코밑으로는 살점이 없어서 아는 사람도 몰라볼 판이었다. 묻는 게 우스울 지경이었다.
이무환은 남궁산산의 비녀로 범인의 옷자락을 들쳤다.
내장 부위가 완전히 녹아서 껍질과 뼈만 남은 상태였다. 그나마 팔다리가 상처없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게 다행이었다.
“어때?”
이무환이 남궁산산에게 물었다.
남궁산산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생각보다 상태가 훨씬 좋아요.”
독에 반쯤 녹아버린 시신을 보고 웃는 소녀.
뒤에 서 있던 모두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웃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어린 소녀에게 질 순 없잖아?
그때 남궁산산이 종리난경을 바라보았다.
“언니, 비수 있어요?”
“왜? 저기 비녀로 하지 그래?”
엽상이 뭘 아는 듯 중얼거렸다.
“이 시신은 입을 벌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남궁산산이 태연히 말했다.
“배를 갈라서 내장을 좀 보려고요.”
일제히 웃음이 사라졌다.
이제는 모두가 남궁산산을 무서운 소녀로 생각했다.
이무환만 빼고.
“코 안 가려도 괜찮겠어?”
“이 정도야 뭐…….”
일각 후.
이무환과 남궁산산이 관을 닫고 뒤로 물러났다.
범인의 시신에서 두 가지를 알아냈다.
하나는 범인이 자결할 때 사용한 독이 전에 용항에서 만난 흑의인들이 자결할 때 사용한 독과 같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범인의 체형이었다.
특히, 살이 문드러진 왼손의 약지는 매우 중요했다.
어쨌든 두 가지 다 거꾸로 추적해 들어가기에 적지 않은 단서가 될 듯했다.
3
이무환은 임시로 천룡부 내의 건물 구석에 방을 몇 개 얻었다.
말로는 조사를 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꼭 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눈발, 종리 대주와 함께 문서고를 뒤져서 범인의 신체와 유사한 흔적이 있는 자에 대해서 모두 조사해 봐.”
종리난경과 함께 하라는 말에 엽상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예, 알겠습니다. 밤을 새서라도 최대한 빨리 알아내겠습니다.”
“다른 조사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도 살펴보고.”
“걱정 마십시오, 총대주!”
“그렇게 좋아?”
“예?”
“손은 하루에 세 번씩만 뻗어.”
“…예.”
종리난경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남궁산산은 수줍게 웃으며 이무환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멀뚱한 표정으로 이무환만 바라보았다.
이무환이 남궁산산의 머리를 검지로 밀었다.
“왜 그래, 꼬맹아. 벌써 졸려?”
그날 밤 해시 무렵, 한 사람이 천룡부에 임시로 마련된 특조대의 거처를 찾아왔다.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었는데, 헌칠한 키에 조금은 음울한 표정이었다.
“나는 이금환이라 하오. 대주를 만나고 싶소.”
경비를 서던 영호승은 이금환을 밖에 세워두고 이무환의 방을 두드렸다.
“총대주, 이금환이라는 분이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셔.”
즉시 떨어진 명령에 영호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기다리던 사람이 오기라도 한 것 같은 말투가 아닌가. 게다가 이어지는 명령 또한 예상 밖이었다.
<멋쟁이, 꼬챙이까지 불러서 아무도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해.>
이무환은 전음으로 영호승에게 명을 내리고는, 바짝 붙어 앉아 있는 남궁산산에게서 떨어졌다.
곧 이금환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금환. 이건천의 장남이었던, 내전의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이충문의 큰아들이었다.
상당한 무공을 지녔는데도, 모든 지위를 고사한 채 유유자적 생활하는 자.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군. 사돈에 팔촌까지 다 죽고 혼자인 것처럼 보이는 우울한 표정만 빼면.’
“이금환이오.”
이금환이 먼저 인사를 했다.
조금은 의외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천룡의 후계자가 아닌가. 그런데 목에 힘을 주지도 않고, 말투도 거만하지 않았다.
이무환도 일어서서 한 걸음 나서며 포권을 취했다.
“무환이라 합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답답해서 왔소. 한 가지 물어볼 것도 있고.”
그때 탁, 소리가 뒤에서 났다. 남궁산산이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려친 소리였다.
“일단 앉으세요. 지붕 걱정 마시구요.”
누가 지붕 무너질까 봐 서 있냐? 바로 너 때문이지!
이무환이 고개를 돌려서 남궁산산을 노려보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금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앉으시지요. 저 아이의 닦달이 시작되면 이야기할 틈도 없으니까.”
두 사람이 어정쩡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자, 남궁산산이 재빨리 찻잔을 준비하고 차를 따랐다.
“내가 좋은 시간을 뺏은 모양이구려. 연인과 함께 계시는데.”
“쿨룩!”
이무환은 기침을 하며 급히 손을 흔들었다.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
“제가 이런 꼬맹이하고 어떻게…….”
말도 안 된다는 듯 이무환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까지 저었다.
그러자 이금환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도 제 아내를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요. 혼인할 때 아내 나이가 열여섯 살이었으니까 말이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그게 아니더구려.”
“그게 아니라…….”
남궁산산이 방긋 웃으며 이금환을 바라보았다.
“오빠는요, 제가 항상 어린 줄 알아요. 키도 커지고, 가슴도 이렇게 커졌는데.”
이금환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 그러는 거… 같구려.”
“킁, 그러는 거 같기는. 아직 꼬맹이가 분명하지.”
콧바람을 날리며 고개를 돌리는 이무환이다.
이금환은 정신이 없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기분은 어느 때보다 편안해졌다.
언뜻 그의 입가로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우울함이 전혀 없는 맑은 웃음이었다.
그걸 본 이무환이 한마디 했다.
“그렇게 웃으니 좋구만, 왜 그렇게 울상을 짓고 다니는 거요?”
이금환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좀 답답하고,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져서 말이오.”
“답답하다? 허무하다? 그럼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네 뭐.”
이금환이 고개를 들었다.
이무환이 말했다.
“버리고 나가쇼.”
충격을 받은 듯 이금환이 이무환을 빤히 쳐다보았다.
“좁은 데 있으니 답답할 거고, 할 게 없으니 허무한 것 아뇨? 나가면 넓은 세상이 있고, 세상에는 제법 할 일이 많으니 그 병이 고쳐질지 모르는 일. 방법이 그거밖에 더 있수?”
“구룡성을 버리고 나가라?”
“구룡성이 대수요? 천하가 밖에 있는데.”
이금환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렇지, 세상 천하가 밖에 있었지.”
“근데, 그걸 물어보려고 왔수?”
털털한 말투다. 누구도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자신은 천룡부의 제일 후계자.
누가 감히 자신에게 건달패처럼 말한단 말인가?
그런데 편했다. 너무 편해서 자신도 그렇게 말해보고 싶을 정도였다.
“항상 상대한테 그렇게 말하슈?”
이금환의 뜬금없는 말투에 이무환이 피식 웃었다.
“어울리지 않으니 그냥 편하게 말하쇼.”
“흠, 좀 그렇지요?”
이금환도 조용히 웃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조용히 웃는 걸 보고 남궁산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어떤 생각을 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그랬어. 단순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어.’
그때 홱 고개를 돌린 이무환이 남궁산산을 노려보았다.
‘제길, 이 영악한 여시가 눈치 챈 것 같군.’
“너, 엉뚱한 소리하면 진짜 집으로 보낸다.”
남궁산산이 배시시 웃었다.
“오빠, 저분 말씀 들어봐야잖아요.”
역시 눈치를 챈 것 같다.
보다 더 확실한 것은 모를 테지만, 그걸 알아내는 것도 금방일 것이다. 꼬맹이는 백 년 묵은 여우도 깔아뭉갤 구미호니까.
‘끄응.’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낸 이무환이 이금환에게 물었다.
“말씀해 보시죠. 뭘 물어보려고 왔습니까?”
그제야 정색한 이금환이 물었다.
“독살이었소?”
“맞습니다.”
“외부요, 내부요?”
“조사 중입니다만, 외부의 침입으로 생각됩니다.”
이금환이 눈을 감더니 천천히 떴다.
“범인에 대해 밝혀진 게 있소?”
“조금은. 다만 주범이 정확히 누군지, 그것은 더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이금환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조대를 이끄는 사람이 이제 겨우 스물이 갓 넘어 보이는 젊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 노복에게서 이충선과 이충현이 젊은 특조대주에게 한 방 맞았다는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꿨다.
그래도 특조대가 두 숙부의 방어망을 뚫고 적절한 조사를 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단 하루 만에 범인에 대한 것까지 파악하고 있을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이금환은 이무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자에게 내 모든 것을 걸어도 될까?’
젊다. 너무 젊어 자신을 내보이기가 망설여질 정도다.
반면에 무환이라는 특조대주가 자신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특조대를 맡았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룡단의 여우 호연청과 어떤 사이일까?
그가 밀어주지 않았다면 어찌 저 나이에 특조대주를 맡을 수 있었을까?
만일 그와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면, 눈앞의 특조대주가 그만큼 뛰어난 사람이라는 말이다.
후자일 가능성이 더 컸다.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상황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라면 구룡수호단의 수장들이 순순히 따를 리 만무한 일.
게다가 천룡부의 후계자인 자신에게 밖으로 나가라는 말을 서슴없이 던지는 자가 아닌가.
이금환은 그런 이무환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 보는데도 꼭 언젠가 봤던 사람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가만, 수룡단의 잠풍련에 대한 역공도 이자가 계획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아니, 그런 것 같다.
지금까지 들었던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최근의 예상치 못한 수룡단의 움직임 주위에 항상 이자가 있었다. 그것도 대주들을 부리면서.
승부를 낼 기회는 결코 여러 번 오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 눈앞에 단 한 번뿐인 기회가 있는지도 모른다.
이금환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는 것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없었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장례가 시작되면 눈들이 천룡부로 집중될 것이고, 장례가 끝남과 동시 상황이 미친 듯이 돌아갈 테니까.
이금환의 악 다물린 입이 열렸다.
“잠풍련에 대한 것, 무 대주가 시작한 일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