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0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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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62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00화
100화
“성아, 나오너라.”
안쪽 벽의 휘장이 젖혀지더니 열네댓 살쯤 되어 보이는 앳된 소년이 불안한 표정으로 나왔다.
백문호가 이무환과 소년에게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으시오, 대주. 너도 앉아라.”
두 사람이 앉자 백문호가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숙부의 하나밖에 없는 손자입니다. 숙부께선 두 아들을 무인들의 손에 잃으시고, 딸에게서 손자 하나를 겨우 보셨지요.”
“백이 노인에겐 손자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던데……?”
자료에 의하면 그랬다. 하지만 거기에는 사정이 있었다.
“험한 강호에서 두 아들을 잃고, 결국 딸과 사위마저 잃은 분입니다. 그분께선 손자가 드러나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지요. 아마 이 아이가 손자인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일 겁니다.”
이해할 만도 했다. 더구나 상인들의 세상도 강호만큼이나 험하다 하지 않던가.
그때 백문호가 소년에게 말했다.
“이분에게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도록 해라.”
소년이 겁먹은 얼굴로 이무환을 쳐다보았다.
이무환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나 나쁜 사람 아니야. 그러니 무슨 말이든 해봐라.”
소년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차를 가져오다가 할아버지가 공 아저씨에게 한 말을 들었어요. 할아버지는 공 아저씨에게 약초를 최대한 조심해서 운반하라고 하셨어요. 잘못되면 다 죽는다고…….”
이무환의 표정이 굳어졌다. 소년이 말한 약초가 뭔지 짐작한 것이다.
이무환은 재촉하지 않고 소년의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머뭇거린 소년이 말을 이었다.
“청산에 갈 때까지는 세 분이 함께 움직이고, 백간산으로 갈 때는 공 아저씨만 따로 가게 하셨어요. 다른 사람은 절대 몰라야 한다면서.”
소년이 말을 멈추자 이무환이 물었다.
“그게 다야?”
소년이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장원이 보이는 곳에 작은 사당이 어쩌고 하시면서, 그곳에 약초를 놓고 오시라고 하셨어요.”
소년은 다 털어놓자 입이 마르는지 앞에 있는 차를 홀짝거렸다.
이무환이 소년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네가 그걸 잊지 않은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내가 곧 알게 해주마.”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소년을 끌어안고 대소를 터뜨리고 싶을 정도였다.
‘우하하하! 운은 결코 네놈들 편이 아니었어! 역시 하늘은 마음이 고운 사람을 돕는다니까!’
자시가 다되어가는 시각.
은밀하게 소집령이 떨어졌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사람들이 하나둘 눈을 비비며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렇게 일각가량이 되자, 부상이 심한 상관수를 제외한 주요 간부들이 모두 모였다.
무설강이 의아한 듯 물었다.
“신걸이 안 보이는군.”
이무환이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내가 심부름 좀 시켰수.”
그때였다. 덜컹, 문이 열리더니 헌원숭이 제갈신걸과 함께 들어왔다.
이무환이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나도 광룡대의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
분명 마룡부에서 그렇게 말했다.
이무환이 씩 웃었다.
“광룡대의 대원은 제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데, 그러실 수 있겠습니까?”
광오한 말이다.
명부신사 헌원숭에게 자신의 명을 따르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헌원숭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웃으면서!
하지만 입을 연 사람이 광룡이기에 사람들은 그러려니 했다. 원래가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니까.
‘확실히 문제가 있긴 있어.’
사람들이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데 헌원숭이 터벅터벅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않는 건데, 왔으니 어쩌겠나? 절에 왔으니 절밥을 먹는 수밖에.”
아침만 같았어도 이렇게까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문대로 미친놈이군!
그러고는 호연청에게 가서 따지고 말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혁성화와의 격전을 본 이후로는 생각이 달라졌다. 호승심 때문인지, 이무환 자체에 대한 궁금함 때문인지는 아직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좀 더 이무환을 알고 싶을 뿐이었다.
과연 자신보다 강한지. 앞으로 얼마나 더 강해질 것 같은지. 그래야 둘 중 하나를 결정할 수가 있을 테니까.
문득 의문이 하나 생겼다.
‘칼을 차고 있던데, 그때는 왜 쓰지 않은 거지?’
혁성화 같은 고수를 상대하면서 빼지 않은 걸 보면, 도보다는 적수공권에 더 자신이 있어서일지도 몰랐다.
도는 만일을 위해 대비한 무기,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멋으로 가지고 다니는 것이든지.
헌원숭은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이무환이 차를 비우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늦은 시각에 이렇게 모이라 한 이유는, 신도연풍에게 흘러간 약초가 어디로 갔는지, 의심이 가는 곳을 찾았기 때문이오.”
그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가지각색으로 변했다.
이미 알고 있는 남궁산산은 태연하게 이무환의 빈 찻잔에 차를 따르고, 엽상과 영호승과 막위와 혁수린은 눈을 부릅떴다.
폭령잠마단에 대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이무환만 바라보았다.
이제 때가 되었다 생각한 이무환은 그들에게도 간단하게 마단에 대한 사실을 말해주었다.
“놈들은 수집한 약초로 사람의 잠력을 촉발시키는 약을 만들고 있소. 쉽게 말해, 일류고수가 먹으면 절정고수처럼 공력을 끌어내 싸울 수가 있는 거요. 비록 지속 시간이 한두 시진에 불과하고 그 후로 탈진하게 되지만.”
북리웅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절정고수가 복용하면 어떻게 되는 거요?”
“안 먹여봐서 나도 잘 모르오. 그냥 대충 생각해 보쇼.”
대충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드는 이야기였다.
오죽하면 헌원숭조차 굳은 얼굴로 물을 정도였다.
“양이 얼마나 되나?”
“예상되는 양은 백 개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시험을 하고 어쩌고 하다 보면, 오십 개 정도의 완성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지요.”
“으음, 무서운 일이군.”
절정의 고수 오십 인이 미쳐서 두세 배의 힘을 발휘하면, 그들이 탈진하기 전에 적어도 구룡성의 무사 삼 할 이상이 쓰러질 것이다.
실로 가공할 일이 아닌가 말이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이무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여기 있는 사람들만 갈 생각이오. 놈들이 알면 안 되니까.”
엽상이 우려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놈들이 아무래도 우리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을 텐데…….”
“당연히 눈이 빠지게 바라보고 있겠지.”
“하면……?”
이무환이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일단 와룡부로 갈 건데, 우리가 왜 와룡부에 가는지, 놈들은 그것만으로도 궁금해서 밤잠을 설칠 거야.”
6
쿠르릉!
와룡부 북쪽에 있는, 수로와 연결된 물길을 막고 있던 쇠창살이 묵직한 저음을 흘리며 올라갔다.
두 척의 작은 소선이 그 사이로 미끄러져 수로로 나아갔다.
배는 선체가 일반 배보다 낮았다. 그 탓에 수로의 둔덕에 가려져서 밖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앞이 뾰족해서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사공을 제외하고 여섯 명씩. 모두 열두 명의 손님을 태운 배는 소리 없이 수로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그렇게 얼마를 나아가자 갑자기 앞이 탁 트이고 거대한 장강이 두 척의 소선을 끌어들였다.
가야할 길은 뱃길로 백 리. 도도히 흐르는 검은 장강을 두 척의 소선이 날듯이 미끄러졌다.
백간산은 장강에서 십여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백 리를 달린 소선이 육지에서 십여 장 떨어진 곳에 다다르자, 열두 개의 그림자가 소선에서 솟구쳤다.
달도 없는 컴컴한 밤인데도 그들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오십여 호가 모여 있는 작은 어촌을 지나고, 우거진 숲을 피해 서쪽으로 빙 돌아간 지 반 시진, 선두를 달려가던 인영이 손을 들어 올렸다.
저 멀리 불빛이 몇 개 보였다.
근처의 마을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적당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데다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것이 장원인 듯했다.
그곳이 성아라는 소년이 말한 곳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일단은 그것부터 확인을 해봐야 했다.
어딘가 장원으로 가는 길이 있을 터. 일행은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장원으로 가는 길을 먼저 찾았다.
일각도 되지 않아서 먹구렁이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길이 나오자, 일행은 길을 따라 올라갔다.
그렇게 두 곳의 작은 마을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갔을 때다. 건너편 산등성이 사이로 불빛이 다시 보였다.
그제야 이무환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전면 이십여 장 앞에 소년이 말한 작은 사당이 보인 것이다.
“좋았어. 그 꼬마 말대로군!”
그로부터 반 각.
광룡대원들은 걸음을 늦추고 이천여 평의 그리 크지 않은 장원에서 이십여 장 되는 곳까지 접근한 다음 앞을 주시했다.
순찰을 돌고 있는 경비무사들이 보였다.
모두 다섯. 그들은 걱정할 것이 없었다. 문제는 장원 안에 얼마나 많은 무사들이 더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무환은 즉시 전음으로 명을 내렸다.
<형님이 뇌고자와 엽상을 데리고 뒤로 돌아가 주시구랴.>
무설강이 제갈신걸과 엽상을 데리고 즉시 뒤로 돌아갔다.
<북리 단주는 백 부단주와 유 대주와 함께 우측을 맡고, 엽상은 멋쟁이들을 데리고 좌측으로 가서 대기하도록!>
그들이 사라지자 이무환이 헌원숭에게 말했다.
“저자들 좀 잠재워 주시죠.”
고개를 끄덕인 헌원숭이 궁을 튕겼다.
투두두둥.
거의 들리지도 않을 작은 소음과 함께 다섯 줄기의 기운이 거의 동시에 화살처럼 쏘아졌다.
캄캄한 밤중에 쏘아진 명부신사의 공격에 다섯 명의 무사가 찍소리도 내지 못한 채 무너졌다.
순간 이무환이 앞으로 날아갔다.
한 번의 도약에 담장을 넘은 이무환은 바로 뒤따라온 헌원숭과 함께 장원에서 제일 큰 전각을 향해 날아갔다.
전면의 정원에는 경비무사가 없었다.
대충 봐도 장원의 전각은 다섯 채. 제일 큰 전각에 주요 인물이 있을 듯했다.
두 사람이 전각에 다다랐을 때였다.
안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방문 쪽으로 다가왔다.
‘이크!’
이무환은 능공비를 펼쳐 나아가던 그대로 몸을 위로 튕겨 올렸다.
두 사람이 소리없이 지붕 위에 내려서는데 문이 열리고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수고해 주시오.”
“걱정 마시구려. 어떻게 하든 닷새 안에 완성을 보겠소.”
“그리만 된다면 약속한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허허허. 그리 생각해 주신다니, 정말 고맙소이다.”
이무환은 헌원숭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방을 나온 자들 중 하나는 이곳의 주인, 하나는 신도연풍과 연관된 자인 듯했다.
어차피 밖으로 나가면 쓰러진 경비무사를 발견할 것이 분명한데다, 다행히 장원의 주인이 나왔으니만큼 안을 일일이 뒤질 필요 없이 둘만 잡으면 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마주 본 채 고개를 끄덕이고 깃털처럼 지붕에서 날아내렸다.
그때 또 말소리가 들렸다.
“그놈은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약속한 기일 내에 연단을 해낼 것이외다.”
‘그놈? 연단?’
그 말인즉, 마단을 만드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닌가!
날아내리던 이무환은 황급히 능운비를 펼쳐 다시 몸을 위로 띄웠다.
하지만 헌원숭은 그 말뜻을 미처 깨닫지도 못했고, 이무환처럼 떨어져 내리던 몸을 다시 띄워 올리는 신법을 익히지도 못했다.
그는 그대로 떨어져 내리며 궁을 튕겼다.
투두둥!
“허억!”
“웬 놈이……! 커억!”
지붕 위로 날아올랐던 이무환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성질도 급하시네.’
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무너지고, 한 사람은 방 안으로 튕겨지며 나뒹군다.
장원의 주인으로 보이는 자만이 눈을 부릅뜨고 그 자리에서 떨고 있을 뿐.
문제는 조금 전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무사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강해서 소리없이 제압하지를 못했네.”
헌원숭이 쓴 표정을 지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무환은 즉시 장원의 주인으로 보이는 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이미 헌원숭의 궁에 마혈이 제압당한 상태였다.
“그자는 어디 있지?”
“누, 누구……?”
“마단을 만드는 자.”
경비무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마단을 만드는 자가 도주할지 모른다.
마음이 다급해진 이무환은 장원 주인의 멱살을 확 잡아채며 다그쳤다.
“어디 있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