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89화
무료소설 광룡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6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89화
89화
2
다음 날 아침.
이무환은 단우경을 만나 얇은 책 한 권을 툭 던져 주었다.
공허한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단우경의 눈이 책을 향했다.
책은 잘해야 열 장 남짓했다. 묵향이 아직 사라지지도 않은 걸 보니 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팔 나으면 익혀.”
“…….”
“쌍칼, 아니, 이제 단칼이군. 단칼은 원래 칼 하나가 적당해. 키도 크고 팔도 기니까 굳이 두 개가 필요 없어.”
단우경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간단히 묻지. 칼 두 개를 쓰는 사람 중 강호에서 고수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 누구지?”
없다.
단우경이 눈을 들었다.
“좌수도를 쓰는 사람 중 강호에서 고수로 이름을 날린 사람도 없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이무환이 조용히 웃었다.
“그럼 쌍도를 쓰나, 좌수도를 쓰나 마찬가지군.”
그건 그랬다.
단우경이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할 수… 있을까?’
그때 이무환이 말했다.
“지금까지 양손을 썼으니까, 처음부터 시작하는 사람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야. 그 정도면 됐지 뭐.”
단우경의 얼굴에 은은히 화색이 돌았다.
좌절하기에는 일렀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목표점을 조금 낮춘다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해보겠습니다, 총대주.”
단우경이 각오를 다진 말을 잇새로 씹어뱉었다.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이무환이 돌아서며 말했다.
“혹시 모를까 해서 말하는데… 좌수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 없지는 않아. 옛날에 좌수단혼이라는 사람이 있었거든. 당시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도의 고수였다고 하더군.”
그랬나?
처음 들어보는 별호다. 하지만 이무환은 자신을 위로한답시고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말할 사람이 아니다.
아마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다면, ‘너 내일 죽을 거야. 죽기 전까지 재미있게 놀다 가.’ 그런 말도 웃으면서 할 사람이니까.
어쨌든 이무환의 말이 사실이라면 목표를 낮출 필요는 없을 듯했다.
‘좋아, 까짓 거, 땀을 두 배 흘려보지 뭐!’
그럼 절정고수는 되지 못해도 일류 수준은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단우경이 한 번 더 이를 악물 때다. 방문을 열고 나가던 이무환이 장난처럼 말했다.
“그거… 단혼십절도(斷魂十切刀)라고, 그 사람 도법이야. 좌수도라 익히지를 않아서 생각해 내느라 밤새 고생했어. 열심히 해봐, 단칼.”
탕.
방문이 닫혔다.
단우경의 멍한 눈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일류에 겨우 턱을 걸친 사부의 도법이 아닌, 한때 천하에서 세 손가락에 들었다는 자의 도법이 적힌 책자가 자신의 손 안에 있었다.
손이 떨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것만 익히면 사부의 복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 같던 사부를 죽인 놈의 목을 자신이 직접 칠 수 있지 않을까?
‘사부! 조금만 기다려요. 놈을 곧 보내줄 테니까!’
가슴속에서 흐르던 눈물이 위로 솟구쳤다.
갑자기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뚝 떨어졌다.
‘지미, 그러잖아도 아파 죽겠는데, 이 양반이 사나이를 왜 울리는 거야?’
3
“꼬맹아!”
이무환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남궁산산을 불렀다.
덜컹!
남궁산산이 문을 세차게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오빠,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은, 물어볼 게 있어서지.”
쪼르르, 곁으로 다가온 남궁산산이 이무환의 곁에 바짝 다가앉았다.
“뭔데요?”
이무환이 살짝 의자를 잡아당겨서 딱 붙은 엉덩이를 떼어냈다.
“어허, 조금 떨어져. 남들이 오해하면 어쩌려구…….”
“피이, 여자가 아닌 꼬맹이라면서요? 그런데 뭔 걱정이에요?”
“나야 그렇지. 하지만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도 있잖아. 당연히 떨어져 앉아야지.”
“귀 파달라고 할 때는 제 다리도 베고 있었잖아요.”
“그거하고 이거하고 같냐?”
“어? 오빠 뺨에 뭐 묻었다.”
이무환이 가소롭다는 듯 씩 웃었다.
“이제 안 속아, 임마.”
“진짜라니까요?”
“쓸데없는 말 하지 마라니까? 내가 또 속을 줄 아냐?”
“참나, 진짜란 말이에요!”
“안 속는다니까…….”
남궁산산이 씩씩거렸다.
“사람 불러서 물어봐요? 정말 그렇게 해요? 창피하게 오빠 뺨에 검정 묻은 거 다 보여줘요?”
그러면서 손가락을 뻗어 이무환의 뺨에 대고 정확한 위치를 가리켰다.
“여기에 시머컨 것이 묻었다니까요?”
“하, 이 자식이…….”
이무환은 절대 속지 않는다고 다짐하며 슬며시 손을 올려 뺨을 닦아냈다.
그런데… 손에 검은 먹이 조금 묻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어? 어제 글을 쓰다 묻은 건가? 이상하네, 세수했는데…….”
남궁산산이 거보라는 듯 가까이 다가갔다.
“이리 와 봐요. 내가 닦아줄 테니까.”
이무환이 뺨을 내밀었다.
남궁산산이 소매로 이무환의 뺨을 쓱쓱 닦아냈다.
그러더니 넓은 소매로 이무환의 눈을 가리고는 쪽! 소리가 나도록 뺨에 입을 맞췄다.
“이게!”
이무환이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뒤로 빼는데도, 남궁산산은 생글생글 웃으며 소매로 계속 뺨을 닦으며 말했다.
“아이, 잘 안 닦아져서 침을 좀 발랐을 뿐이에요, 오빠.”
“침? 드럽게…….”
“이제 다 닦아진 것 같아요. 근데 뭘 물어보시려고 부른 거예요?”
눈을 흘겨 남궁산산을 쳐다본 이무환이 찜찜한 표정으로 물었다.
“킁, 곧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너, 집으로 가지 않을래?”
남궁산산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지는가 싶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썹을 가늘게 떨었다.
“싫어요,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
“잘못하면 다칠지 몰라, 임마.”
“어차피 이곳을 떠나도 마찬가지예요. 적들이 저를 가만 놔둘 줄 알아요? 아마 오빠도 없으니 잘되었다고 쫓아올걸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슨 심각한 관계라도 되는 줄 알고 남궁산산을 노릴 가능성이 컸다.
“그럼 어떻게 할래? 내가 항상 보호해 줄 수도 없는데.”
“걱정 말아요. 저도 아주 약하지는 않고, 항상 진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 방에는 깃발 하나만 꽂으면 오빠라도 쉽게 드나들 수 없게끔 만들어놔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방으로 피하면 되요.”
나름대로 완벽한 보호 장치를 해놓은 듯했다.
하긴 여우같은 꼬맹이가 누군가? 천하의 빙심소혜가 아닌가?
그래도 찜찜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괜찮겠어?”
소매로 나오지도 않은 눈물을 콕콕 찍은 남궁산산이 헤벌쭉 웃었다.
“예, 좌우간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오빠. 오빠가 저를 그렇게 생각해 줄 줄은 몰랐어요. 섬으로 돌아가면 제가 잘…….”
“시끄러, 인마! 이게 또 엉뚱한 쪽으로 머리 쓰네. 누가 너 걱정해서 그런 줄 알아? 너 다치면 남궁 노인네가 지랄할 거 아니냐? 나는 그게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인마.”
아무리 그래도 남궁산산의 눈치가 이무환보다 더 높은 경지였다.
생글거리며 웃은 남궁산산이 살짝 말을 돌렸다.
“그런데 그거 물어보려고 불렀어요? 저 걱정돼서?”
“자식이, 그게 아니라니까……. 좌우간 그건 그렇고, 그거 말고 한 가지 더 물어볼 것이 있어.”
남궁산산이 다시 바짝 다가앉으면서 손을 밑으로 내리더니, 먹을 묻혔던 손가락을 바지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에헤헤, 감쪽같이 속았지롱.’
그러고는 환한 얼굴로 물었다.
“뭔데요?”
이무환이 슬그머니 엉덩이를 틀며 말했다.
“너, 이것저것 아는 게 많잖아. 그래서 물어보는 건데, 역용술에 대해서도 알아?”
“역용술요?”
“어. 복면을 쓰면 되는데, 그럼 의심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기왕이면 엉뚱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거든.”
남궁산산이 환하게 웃었다.
“그거라면 걱정 말아요. 제가 경극 배우의 변장술을 취미로 익힌 적이 있거든요. 확실하게, 사람들이 절대 몰라보게 모습을 바꿔 드릴게요. 처음에는 조금 거북스럽고, 살이 조여서 약간 통증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져요.”
“정말… 이냐?”
“글쎄, 믿으라니까요.”
믿고 싶었다. 상대가 남궁산산만 아니라면.
하지만 당장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말로만 전해지는 천변만화공을 익히지 않은 이상은.
“조, 좋아. 그럼 이따가 저녁에 세 사람의 모습을 바꿔줘.”
“알았어요, 오빠.”
그날 해질 무렵.
엽상이 혈의인들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왔다.
“도룡부에선 한 번에 열여덟 명 전후의 사람이 나온 적이 없다고 합니다. 해서 금룡부에 대한 보고서를 살펴봤는데, 그 시간에 이십 명 정도의 사람이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금룡부를 나섰다고 합니다.”
“복장은?”
“보고를 올린 자의 말에 의하면, 옷은 혈의가 아니었지만 무위는 일류고수 수준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옷이야 언제든 바꿔 입으면 된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돌아왔어?”
“나간 자들은 다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에 대한 신상 정보는?”
“조금 전까지 제가 직접 금룡부의 무사들에 대한 것을 조사해 봤습니다. 일류고수 수준의 고수 이십 명이면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유령 같은 존재라는 말이었다.
물론 당금 구룡성의 각 부에는 그런 자들이 암암리에 수십 명씩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이 한꺼번에 이십 명에 이르도록 움직인 적은 거의 없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딱 맞아떨어졌다.
이무환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역시 금룡부란 말이지?”
그때 엽상이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당시 그들을 본 대원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금화산의 가족들이 사는 금정전 쪽에서 나온 것 같다고 합니다.”
이무환의 입가에 가느다란 냉소가 맺혔다.
“그거 아주 좋은 정보군.”
그 말인즉, 금룡부주가 직접 관여되어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하다못해 그의 가족이든지.
문득 이무환은 금룡부주가 연공하고 있다는 무공에 대한 의구심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무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대체 장로와 호법에 둘러싸인 채 익혀야 할 무공이 뭐란 말인가. 정당한 무공을 익히는데 그렇게까지 조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해가 가지 않다 보니 가능성이 한 곳으로 귀결되었다.
‘혹시 그가 익히는 무공이 잠풍련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두 가지를 엮어서 튼튼한 밧줄을 하나 만들 수 있었다. 금룡부를 통째로 들어 올려서 단숨에 엎어버릴 밧줄을.
이무환은 차가운 웃음을 지은 채 남궁산산을 바라보았다.
“준비됐어?”
남궁산산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됐어요. 저녁 먹고 방으로 오세요. 아프지 않게 해드릴 테니 너무 걱정 말아요, 오빠.”
엽상이 눈을 가늘게 뜨고 힐끔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뭔가가 거꾸로 된 거 같은데……. 그건 남자가 하는 말 아닌가?’
4
달도 별도 구름에 가려진 해시 무렵.
세 남자는 광룡대의 높은 지붕 위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묘한 표정을 지은 그들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얼마, 철탑처럼 단단한 몸집에 쭈글쭈글한 주름살이 얼굴 가득한 남자가 나직이 물었다.
“언제 갈 건가?”
귀신처럼 창백한 얼굴에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남자가 대답했다.
“자시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검은 얼굴에 비 맞은 것처럼 후줄근한 옷차림의 남자가 중얼거렸다.
“제길, 아직 한 시진도 더 남았는데, 그때까지 지붕에 있어야 한단 말이오? 그냥 내려가면 안 되겠소, 대주?”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는 여전히 구름만 가득했다.
“별수 없잖수. 내려갔다가는 사람들이 다 놀래서 덤벼들지 모르는데.”
주름살남자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방에만 처박혀 있으면 되지 않을까?”
“형님도 참, 보나마나 꼬맹이가 수시로 들락거릴 텐데. 그 녀석이 웃는 꼴을 어떻게 봅니까?”
“하긴… 지금도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군.”
“그냥 조금만 기다립시다.”
그때 후줄근한 옷차림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말이오, 조금 일러도 지금 가면 안 되겠소?”
“난들 왜 그러고 싶지 않겠수?”
그도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시간이었다.
“나는 말이오, 들켜서 이리저리 도망치는 건 더 싫소.”
후줄근한 옷차림의 남자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쩌다……. 후우…….”
변장은 완벽했다. 너무 완벽해서 탈일 정도로.
무설강은 길거리 약장수와 함께 다니는 늙은 차력사 같았고, 제갈신걸은 숯구덩이에서 나오다 비 맞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무환은 저승사자를 따라다니는 졸개 귀신처럼 변했다.
한 사람, 한 사람, 따로따로 떼어놓고 변장을 시킬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그만 남궁산산이 하자는 대로 따른 것이 실수였다.
변장 후, 세 사람은 이무환의 방에서 만나자마자 서로를 쳐다보며 낄낄거리고 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웃음이 잦아들었다.
셋 모두 자신의 얼굴이 상대처럼 변했다는 깨달은 것이다.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그들은 행여나 누가 볼까 봐 도망치듯이 지붕 위로 올라왔다.
그것이 벌써 반 시진 전이었다.
“비라도 안 와야 하는데…….”
이무환의 중얼거림에 무설강과 제갈신걸이 흠칫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게.”
“나야 뭐, 비가 오나, 안 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