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8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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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65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85화
85화
“당가비사의 주인께서 이곳에 계시다니, 이십여 년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돌아가셨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의외의 일이네요.”
당호민의 주름진 눈꺼풀 사이로 한광이 번뜩였다.
“아이야, 너는 누군데 나를 아는 것이냐?”
쭈글쭈글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차가운 목소리. 석실 안에 한풍이 불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으스스한 한기가 남궁산산을 향해 밀려가자 이무환이 손을 저었다.
“아아, 우리 꼬맹이 너무 겁주지 마쇼. 그러면 나도 화낼지 모르니까.”
단 한 번의 손짓. 순간적으로 대기가 출렁이더니 살을 에던 한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당호민이 눈을 홉떴다. 한광이 번뜩이던 그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손짓 한 번으로 자신의 기세를 무용지물로 만들다니.
‘노부의 생각보다 더 강한 놈이구나.’
그는 공력을 더 끌어올려서 두 손에 집중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의 정체가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때 남궁산산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당호민에게 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소녀가 당 어르신을 뵈어요.”
아무리 정체를 숨겨야 한다지만 어찌 절을 하는 어린 소녀를 공격할 수 있겠는가.
당호민은 차마 공격을 못하고 이마를 찌푸렸다.
그런데 몸을 일으킨 남궁산산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남궁가의 산산이에요. 조부님께서 항상 애석해하며 말씀하시던 분을 갑자기 뵙는 바람에 소녀가 실수를 했어요.”
당호민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끌어올렸던 공력을 단전으로 되돌린 그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남궁가의 산산? 그럼 네가 남궁 형의 손녀인 빙심소혜 남궁산산이란 말이냐?”
“예, 할아버지.”
“허, 허허허, 이런 일이……. 한데 어떻게 여기에 온 것이냐?”
“오빠와 함께 여행을 하는 중이었는데, 현재는 구룡성에 머물고 있어요.”
“구룡성에?”
당호민이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의외였다. 남궁세가의 딸이 구룡성에 있다니. 그가 아닌 누구라도 의아하게 생각할 만했다.
“오빠가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했으니, 일이 끝나면 떠날 거예요.”
“그래? 허, 하여간 의외로구나. 남궁가의 아이를 이곳에서 만나다니.”
“저분이 그때 그 손자분인가요?”
“맞다. 그때는 강보에 싸여 있었는데…….”
이십삼 년 전.
가주였던 큰형이 의문의 죽임을 당하자, 당가 가주의 자리를 놓고 둘째인 당호진과 셋째인 당호영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만초당(萬草堂)을 맡고 있던 당호민은 중립을 지키며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이 터졌다. 하나 있는 아들이 그 싸움에 몰래 끼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아들의 죽음에 분노한 그는 복수를 위해서 형제간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석 달간에 걸친 형제간의 권력 싸움은 결국 둘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 바람에 그도 만초당의 당주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당시 암암리에 흐른 피가 당가타를 붉게 적셨다.
더구나 가주가 된 둘째는 가장 큰 위협이 되었던 그를 제거하기 위해 전대 가주의 죽음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씌웠다.
결국 그는 형제들에게 쫓겨 정든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두 살배기 손자를 안고서.
그 후 구룡성이 있는 무창에 자리를 잡은 것은, 이곳만큼은 당가라 하더라도 절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벌써 이십삼 년이나 흘렀군.’
참으로 유수와 같이 흘러간 시간이었다. 언제나 다시 당가로 돌아갈 수 있을지…….
당호민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침묵의 시간이 길어졌다. 당악과 남궁산산도 숙연한 표정이 되어서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결국 침묵을 깬 사람은 이무환이었다.
“여기는 차도 없수?”
“예?”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지. 나는 철관음이 좋은데.”
“아, 예.”
당악이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남궁산산이 덧붙여 말했다.
“아마 주전자째 내와야 할 거예요. 오빠는 최소한 다섯 잔은 마셔야 하거든요.”
이무환이 철관음을 세 잔이나 마시고서 입을 열었다.
“음, 우리 것보다 더 좋은 것 같은데? 꼬맹아, 좀 얻어갈까?”
당호민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흘흘흘, 원하면 주지. 얼마든…….”
“잠깐만요.”
남궁산산이 재빨리 당호민의 말을 끊었다.
이무환이 원망하는 눈으로 남궁산산을 바라보았다.
그가 보든 말든 남궁산산이 말했다.
“그냥 조그마한 주머니 하나 정도면 되요. 전에 얻어다 놓은 것이 이만한 자루로 하나 있거든요.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했다고 글쎄, 자루를 통째로 들고 왔지 뭐예요.”
남궁산산이 팔을 크게 벌린다.
얼핏 말뜻을 깨달은 당호민이 눈을 크게 떴다. 사람들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무환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무환은 그게 뭐 어떠냐는 듯 투덜거렸다.
“그것도 두고두고 먹으면 금방 없어질 텐데…….”
영호승 등이 몰래 한숨을 내쉬는 사이 당호민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험, 좌우간 내 자네가 필요한 만큼은 주겠네. 그건 그렇고, 물을 게 있다 했던가?”
“아참! 깜박했네. 저 혹시, 작년 말쯤 구룡성 쪽에서 흘러나온 특이한 약초에 대해 아는 게 있습니까?”
“특이한 약초? 구룡성이라고?”
당호민이 되물었다.
남궁산산이 보충설명을 했다.
“마차 두 대 분량인데, 정확한 쓰임은 알지 못해요. 다만 양이 많다 보니 혹시 뒤로 흘러나온 것이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당호민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자 밀납처럼 창백한 표정의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작년 말, 원단이 되기 칠 일 전에 들어온 약초가 한 가지 있습니다, 주인 어르신.”
“그래? 그게 뭐지?”
“원령초입니다.”
당호민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게 구룡성에서 나왔단 말이냐?”
“직접 말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음…….”
당호민이 침음성을 흘리자 이무환이 물었다.
“그 약초는 어디에 쓰는 겁니까?”
미간을 찌푸린 당호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운을 북돋는 데 쓰는 약초 중 최상급이라 할 수 있네. 나오는 양이 많지 않아서 가격이 상당히 비싸지.”
“일반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까?”
“잘 쓰면 영약 못지않은 것이지. 하지만… 악용하면 얼마든지 엉뚱하게 쓰일 수도 있다네. 더구나 대량이라면…….”
당호민이 잠시 말을 멈추고는 생각을 정리했다.
이무환이 후르륵 차를 비우자 그가 말을 이었다.
“원령초의 성분 중 사람의 인성조차 바꿀 정도로 지독한 성분이 있네. 그 성분을 빼내 다른 약에 섞으면 성격이 급해지고 기운이 폭주하게 되네. 쉽게 말해서, 두 배 세 배의 힘을 내는 폭급한 사람이 되는 거지.”
“만일 무공을 익힌 사람이 그러한 약을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마 한두 시진은 두세 배의 힘을 발휘할 거네. 그러다 갑자기 탈진해서 쓰러지겠지만.”
“원령초의 양이 많다는 것과 그러한 일이 벌어질 확률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조금 전 당호민은 대량이라는 말에서 말끝을 흐렸다. 그럴 가능성이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당호민이 말했다.
“그 성분은 극히 미미하네. 하지만 마차 두 대의 분량이라면, 적어도 술병 하나의 성분은 얻을 수 있을 거야.”
“그 정도면 몇 명에게 먹일 약을 제조할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백 명 이상에게 먹일 약을 만들 수 있을 거네.”
백 명 이상의 고수가 두세 배의 힘을 한두 시진 발휘한다?
그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그 정도면 전쟁에서 한순간에 상황이 뒤집히고도 남았다.
만일 잠풍련이 그러한 단약을 만들었다면, 결정적인 싸움이 벌어질 경우 치명적이었다.
이무환의 표정이 굳어지자 당호민이 말을 이었다.
“단약의 이름은 폭령잠마단(爆靈潛魔丹)이라고 하는데, 그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강호를 다 뒤져도 몇 되지 않을 것이네. 더구나 복용한 사람을 폐인으로 만드는 것이어서, 강호에서도 연단이 금지된 지 오래된 것이지. 지금은 연단법도 사라진 것이거늘, 대체 누가 그걸 연단한단 말인가? 허어…….”
“아, 젠장! 그 미친놈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무환이 짜증을 내며 소리치자 당호민이 물었다.
“누군가? 누가 그 약초를 구입한 건가?”
“잠풍련이라고 들어봤습니까?”
“잠풍련? 처음 듣는 이름이군.”
이무환은 코끝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을 하더니, 어느 순간 불쑥 입을 열었다.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당호민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당가에서도 쫓겨난 사람이네. 그 후로 다시는 강호의 일에 참견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지.”
이무환은 고개를 쑥 내밀고 나직이, 그러면서도 한마디 한마디에 천근의 힘을 실어 말했다.
“잠풍련은 과거 절대사천좌가 지닌 전설의 무공을 바탕으로 일어난 세력 중 하나입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쓴웃음을 짓던 당호민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무환은 못 본 척하며 한 번 더 충격을 줬다.
“혈지겁난을 일으켰던 자들 중 하나가 그 무공을 얻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굳어진 당호민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뭐, 뭐라?!”
“놈들이 구룡성을 삼키려고 합니다. 그걸 좀 막아보려는데, 좀 도와주쇼.”
“그, 그게 정말인가?!”
“그럼 제가 할일이 없어서, 여기까지 찾아와 노인장하고 농담 따먹기 하는 줄 아십니까?”
이무환이 막말에 가까운 말투로 빽! 소리를 내질렀다.
당악과 창백한 얼굴의 중년인이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무환은 그들과 말다툼하고 싶지도 않았고,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구룡성의 특조대라고 들어봤습니까? 광룡이라는 이름은 들어봤습니까?”
당호민도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 미친놈에 대해선 나도 들어봤네. 그놈이 하도 설쳐서 구룡성이 난리도 아니라고 하더군. 허, 미친놈 하나 때문에 천하의 구룡성이 흔들리다니.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한번 보고 싶군. 그런데 왜 그 이름을 아냐고 물어본 건가? 그자를 잘 아나?”
이무환이 당호민을 흘겨보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투덜거렸다.
“제길, 괜히 물어봤네. 내 성격이 좀 개성 있긴 하지만, 대놓고 미친놈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닌데 말이야. 자, 보고 싶으면 실컷 보슈.”
이무환의 막말에 막 발작하려던 당악이 일으키던 그대로 몸이 굳었다.
‘그, 그럼 이자가…… 구룡을 농락했다는 천외광룡(天外狂龍)?’
용강통의 술꾼들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제대로 미친놈.
‘어, 어쩐지 진짜 미친놈처럼 보이더라니…….’
중년인도 안색이 더욱 하얘져서, 살짝 건들면 얼굴에서 하얀 분이 날릴 것 같았다.
반면 당호민은 눈을 두어 번 깜박인 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미친놈이라고 욕하면 어느 누군들 좋아할까.
“그, 그럼… 자네가……?”
“그렇수. 내가 바로 그 광룡이라고 불리는 미.친.놈.입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무환은 그사이 두 잔의 철관음을 더 비우고, 남궁산산은 열심히 잔을 채웠다.
목이 타는지, 아니면 웃음을 참으려고 그러는 건지, 영호승 등도 덩달아 두 잔의 차를 비웠다.
한참이 지나서 이무환이 당악을 향해 말했다.
“차가 떨어졌는데…….”
“예? 아, 예…….
어정쩡하니 일어선 당악이 나가더니 커다란, 전보다 세 배는 더 큰 찻주전자에 차를 담아 왔다.
그걸 보고 이무환이 흐뭇하게 웃었다.
‘당가 인심이 괜찮군.’
그때였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종소리를 듣고 흠칫한 당호민이 굳은 표정으로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그 종소리는 비상시 울리게 되어 있는 신호였다. 지난 한 달간 종소리가 울린 것은 단 두 번에 불과했다. 그 만큼 중대한 일이 벌어졌다는 뜻.
“네가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도록 해라.”
“예, 어르신.”
중년인이 나가고 얼마나 지났을까. 남궁산산이 커다란 찻주전자를 들어서 차를 따르고 있는데 그가 돌아왔다.
“수상한 자들이 용강통을 뒤지고 있습니다, 주인 어르신.”
그 말에 당호민이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혹시 자네들과 관련 있는 자들이 아닌가?”
이무환이 일단 차를 먼저 마시고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뒤를 쫓아온 놈들이 있었는데, 용강통으로 오면서 따돌렸더니 찾고 있는 것 같군요.”
그러고는 당호민을 직시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도와주실 겁니까, 아니면 모른 척하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