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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룡기 121화

무료소설 광룡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719회 작성일

소설 읽기 : 광룡기 121화

 

121화

 

 

 

 

 

 

 

 

‘이, 이런, 제기랄!’

 

여우가 그리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지금쯤 다 옮겨졌다고 봐야 했다. 

 

필요하다면 구룡성이라도 통째로 들어서 자신의 방 안에 구겨 넣을 사람이 바로 남궁산산인 것이다.

 

마음이 다급해진 이무환은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고 걸음을 옮겼다.

 

“가보겠습니다.”

 

바로 그때 소천득이 한마디 했다.

 

“다음에 다시 한번 했으면 좋겠군.”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을 다시 일으키려면 그만한 대상이 있어야 할 테니까.

 

“그러지요.”

 

 

 

호연청의 집무실을 나온 이무환은 정신없이 달렸다.

 

방까지의 거리가 백 리도 더 되는 듯했다.

 

‘아이고, 꼬맹아! 제발 참아라!’

 

광룡대로 통하는 좁은 회랑에 십여 명이 오갔지만, 이무환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달렸다.

 

휙휙!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듯, 물살이 바위를 돌아가듯 이무환의 신형이 환영처럼 수룡단원들을 비켜 지나간다.

 

“뭐, 뭐야? 뭐가 지나간 거지?”

 

“사람 같았는데?”

 

수룡단원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이무환의 신형이 회랑에서 사라진 뒤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광룡대에 도착한 이무환은 자신의 방 앞에 서 얼쩡거리고 있는 영호승을 보고 버럭 소리쳤다.

 

“비켜!”

 

악귀 광룡의 목소리가 귀청을 울린다.

 

영호승은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뒤로 황급히 물러섰다.

 

방문 앞에 멈춰 선 이무환은 문고리를 잡고 힘을 주었다.

 

‘제발, 제발, 제발……!’

 

자신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담사황과 일장을 나눌 때보다 훨씬 더한 긴장이 밀려왔다.

 

다른 사람들은 웃을지 몰라도, 자신에겐 당연했다.

 

자신의 창창한 앞날이 걸린 일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문고리만 잡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이무환은 이를 악물고 방문을 잡아당겼다.

 

덜컹!

 

순간, 거칠게 방문을 연 이무환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오오! 맙소사!

 

연초록 군(裙:치마), 눈처럼 하얀 고(袴:바지), 분홍색 말흉(抹胸:가슴을 감싸는 속곳).

 

여기저기 여자의 옷이 널려 있는데, 그 사이에서 속옷만 입은 남궁산산이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단주님이 이제부터 함께 지내래요, 오빠.”

 

“꼬, 꼬, 꼬맹이……. 너…….”

 

“아이, 보따리에다 옷을 몇 개 넣어왔는데 다 구겨졌지 뭐예요. 그래서 좀 펴지라고 널어놨어요. 괜찮죠?”

 

남궁세가를 떠난 이래 가장 환한 표정이다.

 

이무환은 차마 그 얼굴에 대고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소리쳤다가 또 울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모두 몰려와서 자신을 죄인 취급할 테니까.

 

쾅!

 

문을 닫은 이무환은 성큼성큼 남궁산산을 향해 걸어갔다.

 

단 세 걸음 만에 남궁산산 앞에 도착한 이무환은 눈을 부라리며 남궁산산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정말 이럴래?”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내야만 했다.

 

쫓아내던가, 아니면 자신이 외성으로 나가던가!

 

그때였다.

 

“오빠! 나 너무 좋아!”

 

갑자기 남궁산산이 빽! 소리를 지르더니, 움찔한 이무환을 덮쳤다.

 

‘이크! 이게 또!’

 

이무환은 또다시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몸을 뺐다. 그런데 미처 한 걸음을 물러나기도 전이었다.

 

눈앞에 두 개의 뽀얀 박이 보였다.

 

‘허억!’

 

동시에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이무환의 몸이 굳어버리고, 일순간 이무환의 얼굴이 남궁산산의 가슴에 덥썩 묻혔다.

 

속옷만 입은 남궁산산이다. 부드러운 살결이 전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느껴진다.

 

거기다 전에 비할 바 없이 진한 화향, 얼굴을 짓누르는 황홀한 느낌…….

 

떼어내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명처럼 울리는 꼬맹이의 목소리에 정신이 멍해졌다.

 

“오빠도 좋지! 그지?”

 

‘이, 이러면 안 되는데……. 좋긴… 좋다.’

 

자신도 모르게 남궁산산의 등을 감싸 안는 손이 야속하기만 했다.

 

‘옥이야,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무환의 눈이 게슴츠레하니 반쯤 감겼다.

 

그 바람에 이무환은 남궁산산의 입가에 떠오르는 여우의 웃음을 보지 못했다.

 

‘에헤헤헤!’

 

 

 

제8장. 날아간 꿩의 약속(約束)

 

 

 

 

 

 

 

1

 

 

 

“꼬맹이 너! 앞으로 여기 넘어오면 안 돼! 알았지?”

 

“예, 오빠!”

 

침상이 하나 새로 올 때까지 이무환의 침상을 둘로 나누었다. 이불도 하나 더 가져와 따로따로 쓰기로 했다.

 

다행히(?) 침상이 커서 두 사람이 쓰기에 큰 불편은 없었다.

 

안쪽은 남궁산산이, 바깥쪽은 이무환이. 그리고 가운데에다 천을 길게 매달았다.

 

이무환은 대충 공사가 끝나자 한 소리 내지르고 몸을 돌렸다.

 

‘후우, 미치겠군!’

 

한방에서 지내는 것은 남궁산산의 공세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하지만 완전히 승복할 수는 없었다.

 

정한도의 옥이는 자신만 기다리며 하염없이 육지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옥이를 배신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배신하면 남자가 아니지!’

 

아마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비룡도에 발도 못 들이게 할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이 저 꼬맹이를 받아들인다 해도 옥이의 승낙이 있어야 돼!’

 

문제는 같은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꼬맹이가 꼬리 아홉 달린 여우보다 더 요물이라는 것이다.

 

지금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구룡성에서 머무는 시간을 줄이는 것.

 

‘일을 빨리 끝내야겠어!’

 

이무환은 옆구리에 묵린도를 꽂고 슬쩍 뒤를 돌아다보았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남궁산산이 흥얼거리며 보따리에 든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옷이야 이미 다 봤으니 더 볼 것도 없었고, 수십 개의 깃발과 산대 외에 처음 보는 물건도 제법 있었다.

 

염주처럼 줄에 꿰인 구슬, 한 자 크기의 작은 봉, 작은 글씨가 촘촘히 새겨진 기다란 천 등등…….

 

이무환은 그게 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꾹 참고 걸음을 옮겼다.

 

‘상대의 기운을 빼는 데는 무관심이 최고지. 음하하!’

 

그때 남궁산산이 이무환의 뒤에 대고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다녀오세요, 오빠.”

 

“말썽 피우지 말고 얌전히 있어.”

 

이무환은 냉랭히 한소리 하고 방문을 나섰다.

 

뒤에서 남궁산산이 생글거리며 입을 삐죽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돌아보지는 않았다. 나름 굳게 다진 각오가 풀어질지도 모르니까.

 

‘여우에게 홀리지 않으려면 안 보는 수밖에 없지.’

 

그런데 안에서 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벗고 좀 씻어야지.”

 

‘버, 벗고…….’

 

이무환은 돌아서려는 걸음을 억지로 잡아뗐다.

 

석양이 질 무렵, 이금환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가 말한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각을 기다린다고 했으니 늦으면 그냥 갈지도 몰랐다.

 

 

 

2

 

 

 

이무환은 귀향루에 도착하는 동안 딱 세 번만 뒤돌아보았다. 그래도 목적지에 도착할 동안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했다.

 

‘후우, 하마터면 홀릴 뻔했어. 그 꼬맹이, 분명 나 들으라고 그랬을 거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귀향루의 주렴을 젖히자 점소이가 다가왔다.

 

“나 기다리는 손님 오셨어?”

 

“예, 공자님. 따라오시지요.”

 

점소이는 밀실로 이무환을 안내했다.

 

문을 열자 머리를 맞대고 있던 세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이금환과 여건호, 그리고 처음 보는 자가 철위종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평범한 체구에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잠잠한 그의 눈빛에 제법 날카로운 검이 담겨 있었다. 절정의 경지에 오른 지 제법 된 듯 이금환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 무위가 느껴졌다.

 

여건호나 철위종보다 한 수 위의 고수.

 

‘호오, 금환 형의 막강한 적수가 하나 있었군.’

 

이무환은 내색하지 않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서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조금 힘없게 느껴지는 목소리.

 

이금환은 의아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성주 선출일이 며칠 남지 않아서 그대와 상의할 게 있어 만나자고 했소.”

 

딱 엿새가 남았다. 불안하기도 하겠지.

 

이무환은 일단 말을 돌렸다.

 

“철룡부의 공자는 보이지 않고 다른 분이 왔군요.”

 

조용히 앉아 있던 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검룡부의 화운결이라 하오.”

 

검룡부의 화씨. 이무환은 화운결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화무군에게 뛰어난 아들이 있다 들었는데, 바로 이자인가 보군. 동방휘가 다음 대 검룡부는 화씨가 이을지도 모른다면서 자식들을 닦달했다더니, 이자를 보니 그럴 만도 하군.’

 

이무환은 새삼스런 눈으로 화운결을 보며 마주 인사를 했다.

 

“무환이오.”

 

“말씀은 많이 들었소.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그냥 입바른 소리로 하는 말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상대를 존중해 줄 줄 안다는 것.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봐도 이금환의 막강한 적수였다. 폭령잠마영단을 주지 않았다면 밀렸을지 모를 정도의 기재.

 

‘언제 한번 기를 확 꺾어놓아야겠군.’

 

형을 위해서 그 정도쯤은 해줘도 괜찮을 듯했다. 순진한 형은 싫어할 테지만, 자신이 언제 누구 말을 듣고 움직였나?

 

내심 결정을 내린 이무환의 눈이 이금환을 향했다.

 

“자, 이제 말씀해보시죠.”

 

이금환이 굳은 표정으로 이무환을 직시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특조대의 작전에 우리도 참가했으면 하오.”

 

이무환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검지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귀하들도 작전에 참가하겠다?”

 

“그렇소. 더 이상 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만 볼 수 없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오.”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했다. 이금환을 따르는 자들은 분명 모두가 구룡성 핵심 인사들의 자제가 아닌가. 

 

방관자로 존재하기에는 그들의 성격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죽음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소.”

 

이금환의 대답에 여건호와 화운결이 같은 마음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경우, 내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는 않았겠지요?”

 

“물론이오.”

 

“명령을 어기면 그게 누구든 가차없이 처벌할 텐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이금환이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여건호와 화운결의 눈빛도 전보다 더 강렬해졌다.

 

상대는 광룡이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러나 이미 되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마당이다. 거부할 마음이었다면 오지도 말았어야 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이 뭘 무서워하겠소? 대주의 처리에 맡기겠소.”

 

“흠…….”

 

이무환이 관자놀이에서 검지를 떼었다.

 

“모두 몇 명입니까? 그걸 알아야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치 자신의 손에 다 들어온 것처럼 말한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인상을 쓰게 만드는 말투.

 

여건호와 화운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광룡의 평상시 말투라는 것을 아는 이금환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그으며 대답했다.

 

“마흔네 명이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군요.”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거야 굴려보면 알 일이고…….”

 

여건호와 화운결의 가늘어진 눈매가 좁혀졌다. 자신들을 하찮은 일반 무사들처럼 취급하다니.

 

그러든 말든, 이무환은 두 사람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이금환만 바라보았다.

 

“당분간 이 일에 대해선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돌아가신 조상이 갑자기 무덤을 박차고 나와서 물어봐도 대답하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때 화운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는 목숨까지 걸고 귀하를 돕기로 했소. 그런데 귀하는 너무 자신의 생각만 주장하는군.”

 

이무환이 천천히 시선을 돌려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금환을 바라볼 때와 달리 차가운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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