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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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00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20화
120화
그런데 이무환이 입가의 미소를 지우고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엉뚱한 욕심이 들거든 과감히 포기하십시오. 광룡이 장사에 나타나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고저없이 나직하게 흘러나온 몇 마디가 날 선 송곳이 되어 담사황의 심장을 콕콕 찔렀다.
‘귀신같은 놈!’
담사황은 땡감 속의 벌레를 씹은 기분이었지만, 겉으로는 분노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자네, 지금 감히 나를 의심하는 건가? 나, 담사황! 그렇게 비겁한 사람 아니네!”
그럼에도 이무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뒤가 구린 사람이 목소리를 높인다고 하던데, 설마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뭐야? 대화를 하자고 해놓고 사람을 놀리겠다는 건가?”
“흠, 확실히 아닌 것 같군요. 좋습니다, 그럼 서로 믿고 일을 해보도록 하지요! 하, 하, 하!”
2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고진도 만나고 폭령잠마영단을 반쯤은 확보했다. 거기다 껄끄러운 상대가 될 수도 있는 담사황마저 광룡의 우리 안으로 끌어들였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 되어간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이무환은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과 정반대의 환한 표정을 지은 채 광룡대로 들어섰다.
‘오늘 같은 날만 계속되면 금방 모든 걸 마무리 짓고 비룡도로 돌아갈 수 있겠는데 말이야.’
광룡대의 분위기도 유달리 활기가 넘쳐 보였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오가는데 모두가 밝은 표정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들어가서 쉬시지요.”
이무환은 뒤따라 들어온 일행들을 향해 그 어느 때보다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행들은 ‘광룡이 저런 투로 말을 하다니, 비가 오려나?’ 그런 표정으로 하늘을 한번 바라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안쪽에서 유군명이 급히 불렀다.
“총대주님!”
이무환이 바라보는 사이, 유군명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돌아오시는 대로 집무실에 들르라는 단주님의 명입니다.”
“무슨 일이지? 누가 또 일을 벌였나?”
“속하도 잘 모릅니다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가보면 알 일이다.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있어봐야 쉬는 시간만 줄어들 터. 이무환은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호연청의 집무실로 향했다.
회랑을 빠져나와 수룡단의 전각으로 다가가던 이무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음?’
저만치 앞서서 수룡단원의 안내를 받으며 전각으로 들어가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희끗한 머리, 중년 이상의 나이. 큰 키와 넓은 어깨에서 강함이 느껴진다.
그는 대부분의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했지만, 이무환의 눈에는 그의 기운이 확연히 느껴졌다.
헌원숭, 담사황에 비해 뒤지지 않는 절대의 기운.
‘절수가 온 건가?’
안으로 들어가자 호연청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의 옆모습이 보였다. 가늘고 긴 눈, 살짝 구부러진 코, 일자로 다물린 입술. 상당히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역시 절수였군.’
개천은 둥근 얼굴에 홍안을 지녔다고 했다. 반면에 앞에 있는 자는 강호인물편에 적힌 절수, 절명마수 소천득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어서 오게. 이리 와서 소 대협께 인사하게나.”
호연청이 이무환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손짓을 했다.
이무환은 절수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두 사람 앞으로 다가갔다.
절수와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자리에 선 이무환이 먼저 포권을 취했다. 그러면서 상대가 자신의 본명을 알고 있든 말든, 성은 빼고 이름만 말했다.
“무환이라 합니다.”
소천득이 슬쩍 고개를 들더니 앉은 채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천득이라 하네.”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
이무환은 그의 태도를 무시했다. 별 것도 아닌 일 때문에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야 천중십마의 위상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자신은 가끔 소천득보다 더한 인사도 했는데 뭐. 당연히 남의 기분은 생각해 주지도 않았고.
호연청은 그런 이무환의 태도가 의외인 듯 이무환을 힐끔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험, 인사를 나누었으면 자리에 앉게.”
이무환은 호연청을 슬쩍 째려보며 자리에 앉았다.
‘내가 쪼잔하게 그런 일로 불만을 가질 것 같습니까?’
그래도 속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천중십마가 뭐 별거라고. 인상도 별로고만.’
이무환은 속으로 투덜대며 호연청에게 물었다. 와중에도 소천득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금 무진장 바쁜데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설마 이분하고 인사를 시키기 위해 부르신 건 아니겠지요?”
“자네가 궁금해 하지 않았나? 그래서 부른 것이네.”
“개천신권 어른은 안 오셨습니까?”
마치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은 개천이었지 절수가 아니라는 것 같은 말투.
소천득의 냉막한 표정에 살짝 금이 갔다. 반면에 호연청의 눈가에는 주름이 두어 줄 그어졌다.
‘그럼 그렇지, 저 천방지축이 그냥 지나칠 리가 있나?’
광룡이 먼저 절수의 자존심을 긁었다. 과연 절수가 어떻게 나올까? 그걸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조금 늦어지는 것 같네. 그래도 며칠 안에는 오지 않겠나?”
“흠, 그분이 오시면 좀 편해질까 했더니…….”
광룡이 연이어 공격한다. 쩍, 소천득의 표정에서 금 가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호연청이 목소리를 조금 올려서 불나기 전에 진화를 시도했다.
“여기 소 대협께서 오셨으니 너무 걱정 말게.”
이무환은 그제야 소천득을 바라보았다. 약간 못미더운 표정을 지은 채.
소천득의 눈에서 한기가 일렁거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저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놈이 있다니! 그것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놈이!
하지만 이무환은 끄떡도 하지 않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긴 헌원 대협도 계시니 두 분이 도와주신다면 좀 낫겠지요.”
여전히 소천득을 무시하는 말투.
소천득도 더는 참지 않았다.
“호연 단주, 대체 왜 나를 청했는지 모르겠구려. 설마 저 애송이의 뒤치다꺼리나 하라고 부른 것은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있겠소이까? 소 대협이 어떤 분이신데 제가 그런 생각을 하겠소?”
“그럼 확실하게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구려. 만일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냥 구룡성을 떠나겠소.”
그때 이무환이 끼어들어 아예 쇠갈퀴로 소천득의 가슴을 박박 긁었다.
“함께 일하기 싫으면 안 하면 그만이지, 애송이가 뭡니까? 제가 뭐 말 잘못한 거 있습니까? 거참, 나이깨나 드신 분이…….”
소천득의 전신에서 냉기가 흘러나왔다.
“훗! 애송이라는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니다, 이 말인가?”
“왜요? 시험이라도 해보고 싶습니까?”
“못할 것도 없지.”
일이 생각보다 커지자 호연청이 급히 나섰다.
“이 대주! 심한 말은 자제하게!”
이무환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단주께서 참으라니 참겠습니다. 하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확실한 선을 그어놓았으면 싶군요. 혹시라도 중요한 때에 행동이 어긋나면 큰일 아니겠습니까?”
“뭘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글쎄요. 뭐, 소 대협께서 원하시는 방식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소천득이 두 눈에서 한광을 뿜어내며 냉소를 지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생각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이무환도 씨익 웃었다.
“제가 좀 화끈하거든요. 어떻습니까? 시간 끌 것 없이 지금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천중십마 중 한 사람인 자신에게 대결을 신청하는 것치고는 너무 당당하다. 아니, 당당하다 못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다.
천하의 누가 저렇듯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소천득은 의외라는 생각 한편으로 뭔가가 께름칙했다.
명부신사 헌원숭이 저 애송이와 함께 움직이는 이유가 뭘까?
호연청은 왜 저 애송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걸까?
두 사람은 결코 저런 애송이에게 끌려 다닐 사람이 아니거늘.
하지만 소천득은 곧 머릿속에서 복잡한 생각을 지웠다. 머리를 굴리는 것보다는 손으로 해결하는 것이 훨씬 더 속편한 방법이었다.
“정말 화끈하군. 단주, 잠깐 장소 좀 빌릴 수 있겠소?”
두 사람이 의견 일치를 본 이상 호연청도 더 말리지 않았다.
어쩌면 잘된 일일지 몰랐다. 소천득이 이기면 광룡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고, 광룡이 이기면 소천득의 개인행동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로선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뒤쪽에 조용한 곳이 있소이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할 터이니 그곳을 이용하시구려.”
일각 후.
뒷문으로 나간 세 사람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소천득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고, 이무환은 어디 놀러 갔다 온 듯 태평한 얼굴이었다.
호연청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은 채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가 이긴 거지?’
마주 선 두 사람의 대결은 대결이라는 말을 하기 어색할 정도로 단순했다.
‘시작하지!’라는 말과 함께 손을 뻗은 두 사람은 한동안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가끔 손만 뻗었다.
대결은 그렇게 일각 가까이 이어가다가, 누가 승자인지 패자인지 판가름도 나지 않은 채 끝이 났다.
더 이상한 것은, 소천득과 이무환, 누구도 승패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대결을 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그나마 소득이라면, 보고로만 들었던 이무환의 무위를 직접 보았다는 것. 이무환이 자신의 예상보다 강하다는 걸 알았다는 것 정도였다.
‘어쩌면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한편, 이무환은 탁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소천득이 힐끗 눈만 돌려 자신을 바라본다.
뭔가 찜찜한 눈빛.
‘훗! 그런 눈빛을 지으면 어쩔 건데요?’
은근한 쾌감이 밀려왔다. 소천득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수공을 겨루며 딱 상대의 힘만큼만 썼다.
상대가 상대인만큼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차하면 당하는 수가 있으니까.
그럼에도 호연청이 보고 있는 만큼 그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물론 지고 싶지도 않아서 밀리는 것도 조심했다.
이길 수도 없고, 질 수도 없고. 그런 상황에서 대결이 일각 가까이 이어지자 소천득이 먼저 손을 거두었다. 혼란에 빠진 표정으로.
아마 지금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겠지.
절수를 고민에 빠지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이무환은 호연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때 호연청의 말이 귀청을 벼락처럼 두드리고, 그 좋던 기분이 나락으로 추락했다.
“그렇게 하게. 아참, 듣자하니 자네가 함께 있는 소저를 책임지기로 했다더군. 참 잘되었네. 그러잖아도 방이 모자라는데, 앞으로 자네와 그 소저가 한방을 쓰면 다른 사람이 좀 편해지겠군.”
이무환은 반쯤 돌아서다 말고 고개만 돌려서 멍하니 호연청을 쳐다보았다.
호연청의 얼굴이 노랗게 보였다.
저 양반이 뭘 잘못 먹었나?
절대 벌어져서는 안 될 상황을 저리 즐겁게 말하다니!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하하, 무슨 말은. 축하한다는 말…….”
“단.주.님!”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가?”
“지금 저를 말려 죽이려고 작정하셨습니까?”
“허어, 내가 그럴 리가 있는가? 당금 구룡성에서 누가 광룡을 말려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있지! 여우같은 꼬맹이와 너구리같은 단주, 당신!’
속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른 이무환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서, 설마, 벌써 결정을 내리신 건 아니겠지요?”
“뭐…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네만…….”
이무환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이군요.”
“그런데 말이야. 아까 그 소저가 자네 방으로 짐을 옮긴다는 말이 있던데, 다 옮겼는지 모르겠군.”
돌아서려던 이무환의 몸이 급살이라도 맞은 듯 그대로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