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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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08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16화
116화
순간, 남궁산산의 표정이 급변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 수십 년 함께 살던 남편에게 버림받은 부인의 표정이 저럴까 싶을 정도다.
‘흥! 어떠냐? 약 오르지?’
은근히 짜릿한 쾌감이 밀려든다. 손끝에서 발끝, 머리끝까지.
이게 얼마 만일까?
이무환은 오랜만에 이겼다는 생각이 들자, 반쯤 남은 차를 마저 마시고 한마디 더 했다.
“너하고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함께 있어서는 안 될…….”
“내가 그렇게 싫어요?”
울먹이는 목소리. 뚝뚝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
‘그러게 나를 왜 그렇게 약 올려?’
속으로는 실실 웃음이 나왔지만, 이무환은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뭐, 아주 싫은 것은 아닌데…….”
“그런데 왜 나를 쫓아내려는 거예요?”
뭐? 쫓아내? 누가? 내가?
“쫓아내는 게 아니라,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는 거야, 인마.”
“싫으면 싫어서 쫓아낸다고 해요. 자꾸 말 돌리지 말고요.”
“인마, 그게 아니라니까?”
그때다. 방문이 통보도 없이 열리더니 무설강이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말인가? 누굴 쫓아낸다는 건가?”
“별일 아닙니다, 형님.”
이무환이 손사래를 치며 정말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다.
남궁산산도 이무환과 비슷한 말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흑! 별일 아니에요, 무 대협. 흐흑!”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서글프게 흐느끼면서.
당연히! 바위처럼 무딘 성격의 무설강 눈에도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무환은 갑자기 남궁산산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어대자 황당한 표정으로 남궁산산의 어깨를 흔들었다.
“어? 너 왜 우냐? 인마, 눈물 안 그쳐? 형님이 이상하게 보시잖아?”
“아우!”
“…….”
“제수씨가 뭔 잘못을 했다고 그러는 건가?”
‘제, 제, 제수씨?’
“그러는 게 아니네! 남자가 책임질 일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지!”
‘책임질 일? 누가요?’
이무환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혀, 형님. 그게 아니라……!”
하지만 그가 더 입을 열 틈도 없이, 우당당탕!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왜 그렇게 화가 나신 겁니까, 무 대협?”
“총대주, 무슨 일 났습니까?”
“어? 남궁 소저, 왜 그렇게 우시는 겁니까?”
남궁산산이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들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오빠가 떠나라고 해서……. 흑흑!”
남궁산산이 우는 모습을 보고는 제갈신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오면서 들으니 책임질 일을 저지르고도 나 몰라라 한 것 같은데, 거기다 남궁 소저를 내쫓을 생각이었단 말입니까?”
여자에 대해서 유난히 민감한 제갈신걸이다.
왜 그런지는 누구보다 이무환이 잘 알았다. 아마 몇 마디 더 한다면, 검을 뽑고 너 죽고 나 죽자며 달려들 사람이 제갈신걸인 것이다.
“참나! 누가 책임질 일을 저질렀다는 거요?”
“그 일은 총대주도 알고, 저도 알고, 광룡대 사람들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말한다.
“그럼, 그럼요. 다 알죠.”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자기편은 한 사람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구룡성이고 지랄이고, 다 때려치우고 떠나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떠나면 자신만 우스운 꼴이 될 뿐. 남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며 떠날 수는 없다.
이씨의 자존심이 있지!
“아, 젠장! 책임질 일 저질렀으면 책임진다구! 누가 안 진다고 했어?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갑자기 방이 조용해졌다.
무설강도, 제갈신걸도, 엽상, 영호승, 막위, 단우경, 혁수린도 서로를 둘러보며 어깨만 으쓱거렸다.
남궁산산마저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자, 이무환의 씩씩거리는 숨소리만이 들렸다.
제일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속삭이듯이 입을 연 엽상이었다.
“저질렀으면 진다고 하시는데요?”
“뭐, 책임진다면 더 뭐라고 할 수도 없잖아?”
“그 정도 책임은 져야 남자지요.”
“그럼 그렇지, 우리 총대주가 그렇게 냉정한 사람일 리는 없다니까요.”
아예 당연히 책임질 일 저질렀다는 투다.
이무환은 씩씩거리며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마치 말을 맞춘 듯 똑같은 반응이다. 그러고 보니 한두 번이 아니다.
‘뭐지? 뭔가 팍! 스치는 게 있는데… 그게 뭐지?’
슬쩍 남궁산산을 흘겨보았다.
이상하다. 소매로 눈물을 닦는데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다.
‘저, 저게……!’
그때였다. 미처 뭔가를 더 알아볼 새도 없이 무설강을 필두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방을 나갔다.
“험, 나가세. 결국 둘이 해결해야 할 문제니까 말이야.”
“하긴 남녀 관계는 당사자 해결이 최고죠.”
이무환은 그들이 다 나가기를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막위가 나가자 문을 쾅! 닫은 그는 남궁산산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남궁산산을 내려다본 이무환이 이를 갈 것처럼 턱에 힘을 주고 입을 열었다.
“너 정말…….”
순간, 남궁산산이 벌떡 일어서더니, 흠칫한 이무환의 품속으로 폴짝 뛰어들었다.
기껏해야 두 자의 거리.
그래도 피하려면 피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유난히 강렬한 향이 콧속으로 확 밀려드는 순간, 이무환은 피할 생각조차 잊어버렸다.
뒤늦게 남궁산산을 떼어내기 위해 몸을 붙잡았지만, 남궁산산은 이무환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뭉클!
손안에 꽉 차는 부드러운 감촉. 가슴은 짓누르는 두 개의 솜뭉치. 귓가를 간질이는 촉촉한 느낌.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아득한 머릿속에서 연분홍꽃이 환하게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너… 꼬맹이, 저리…….”
“쉿, 오빠, 조금만 이대로 있어줘요, 예?”
‘안 된다고 말해야 해. 나한텐 옥이가 있잖아?’
하지만 입마저 그의 의지를 배반해 버렸다.
“…어. 그럼 조금만…….”
바로 그때였다.
천만다행(?)으로 엽상의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저, 총대주. 방금 고진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빌어먹을 눈발. 쪼끔 더 있다 와도 되는데…….’
3
고진은 비룡루로 다가가며 슬쩍 좌우를 둘러보았다.
어제 누군가가 자신을 객방까지 쫓아왔다.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누군가가 뒤를 밟는다는 것을 느끼고 도망가기에 바빴으니까.
적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강도였을까?
어쩌면 그도 저도 아닐 수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룡성에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다는 것.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행동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고진은 자신을 주시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신하고 나서야 비룡루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었다. 어제 자신의 뒤를 쫓던 자가 비룡루에서부터 추적을 시작했다는 걸.
탁자 두 곳에 앉아 있는 손님은 모두 다섯. 셋은 무사고, 둘은 일반 양민이었다.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니 들어온 지 제법 시간이 지난 듯했다. 그렇다면 자신을 쫓는 자들은 아니라는 말.
고진은 그들을 지나쳐 뒷문과 가까운 곳의 탁자로 가서 앉았다. 그곳이라면 언제든 뒷문으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곧 주방에 있던 감이랑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나왔다.
그는 고진 앞에 엽차잔을 툭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어쩌면 자네가 내 마지막 손님이 될지도 모르겠군. 그래, 뭘 먹고 싶나?”
“저… 요리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제 먹은 요리가 워낙 맛있어서 왔습니다. 그걸 먹고 싶습니다.”
그는 연단의 전문가인만큼 미각이 유달리 예민했다. 비록 지난 몇 달간 독초향을 맡은 것으로 인해 많이 무뎌졌다고 해도 선천적인 미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봤을 때, 어제 먹은 비룡루의 요리는 너무나 대단했다. 다른 곳에서 저녁과 아침을 먹었지만, 그곳의 요리와 비룡루의 요리를 비교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비룡루의 요리에 대한 모욕이었다.
물론 재료 탓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비룡루의 요리가 뛰어난 이유는 재료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비룡루의 요리가 대단한 것은 오직 숙수의 손맛 때문이란 것을.
어차피 오래 살 수 없는 목숨. 그는 죽으러 가기 전에 어제 맛본 음식을 다시 한번 먹어보고 싶었다.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세상 제일의 진미를.
“부탁합니다.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고진은 절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감이랑은 그런 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열 명의 손님만 받을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고진이 마지막 열 번째 손님이었다.
비룡루 마지막 손님을 그냥 보낼 수는 없는 일. 무엇이든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고진이 말한 요리였다. 재료가 몇 가지 없는 것이다.
“으음, 재료가 있을지 모르겠군. 최대한 찾아서 만들어보지. 조금 맛이 다르더라도 이해하게.”
“고맙습니다.”
돌아서는 감이랑의 표정에 언뜻 웃음이 걸렸다. 하루 종일 어두웠던 얼굴이 서서히 펴지고, 처졌던 어깨에도 힘이 들어갔다.
자신의 요리를 알아주고 저렇게 진실된 표정으로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의 의미가 새롭게 느껴졌다.
이제 훌훌 털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마지막 손님 하나는 제대로 받은 것 같군. 자! 어디 솜씨를 내볼까?’
그런데 그가 주방으로 들어갈 때다. 한 사람이 비룡루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쇼!”
조금은 건방지게 느껴지는 커다란 목소리.
막 주방으로 들어가려던 감이랑은 쓰윽 고개를 돌리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왠지 쌤통이라는 표정이었다.
“장사 끝났네!”
손을 들어 올리며 반갑게 인사하던 이무환의 표정이 썩은 호박이라도 밟은 것처럼 이지러졌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비룡루에서 식사를 하려고 굶고 나왔다.
그런데 뭐라고? 장사가 끝나?
“하, 하! 이제 아침인데 벌써 장사가 끝나다니요? 농담이 심하시군요.”
감이랑은 속이 다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냥 문 닫기도 뭐해서 열 명만 받고 때려 칠 생각이었지. 그런데 자넨 열한 번째야. 나는 고집이 좀 세서 한 번 한다고 하면 반드시 하거든. 그러니 냉큼 돌.아.가.게!”
그러고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주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에, 아무리 그래도…….”
이무환의 몸이 손을 반쯤 뻗은 채 굳었다.
‘아, 씨! 그냥 오늘까지만 장사하라고 할까?’
그때 문득 열 번째 손님, 고진의 눈길이 느껴졌다.
이무환은 손을 내리고는, 괜한 헛기침을 하며 고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험험, 여기 좀 앉아도 되겠습니까?”
고진은 조금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어제 본 자다. 바로 저 앞에 앉아서 주인을 실컷 놀렸던 자. 멀리 떨어져서 듣던 자신도 공연히 화가 날 정도였으니 주인은 아마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솟구쳤을 게 틀림없었다.
주인이 쌤통이라는 표정을 지은 게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이자도 나처럼 비룡루의 요리 때문에 찾아온 것 같군. 하긴 그런 요리를 다른 곳에서 맛본다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
문제는 다른 곳에 자리가 많은데도 자신의 앞자리에 앉았다는 것이다.
고진은 곧 이무환이 왜 자신의 앞자리에 앉았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었다.
“왜 웃는 거요?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문득 재미난 일이 떠올라서…….”
“그 양반 참, 실없긴.”
이무환은 고진을 힐끔거리며 탁자를 구부린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러면서 당한 것을 갚기라도 하려는 양 슬슬 감이랑을 긁었다.
“손님이 왔으면 엽차라도 줘야지. 접대가 영 엉망이군.”
“장사 끝났다니까!”
“어제 일 때문에 기분이 상했나 본데, 나이 먹은 양반이 속이 그렇게 좁아서야 원.”
“그래도 자네 밴댕이 같은 속보다는 크니 걱정 말게!”
“밴댕이를 보기나 했수?”
휙!
뭔가가 날아와 정확히 탁자 위에 떨어졌다.
네 치 정도의 길이. 납작하고 기다란 몸체를 지닌 자그마한 생선.
“밴댕이네! 많이 보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