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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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47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15화
115화
“무슨 방법요?”
이무환은 탁자에 깔아놓았던 하얀 천을 쓱 잡아 뺐다.
“이걸로 얼굴을 가리는 거야. 연지도 좀 칠하고 말이지.”
“피이, 그 정도로 상대를 겁줄 수 있겠어요?”
“원막걸은 귀신보다 나를 더 무서워한다고.”
그 말은 그럴듯했다. 아마 상대가 광룡이란 걸 알면 입에 거품을 물지도 몰랐다.
귀신보다 더 무서울 테니까.
남궁산산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분을 내려놓고 연지를 집어 들었다.
“그럼 입술에 연지라도 칠해요. 혹시 천이 떨어지면 얼굴을 알아볼지 모르잖아요.”
미쳤냐? 그걸 칠하게?
“걱정 마! 절대 떨어지지 않게 묶으면 되니까.”
할 수 없다는 듯 남궁산산은 이무환의 입술에 연지 칠하는 것도 포기했다.
“알았어요. 그럼 이리 돌아봐요. 제가 묶어드릴게요. 그리고 천에다 피가 묻은 것처럼 연지를 칠해요. 그건 괜찮죠?”
이무환은 차마 그것까지 말리지는 못하고 옆으로 돌아앉았다.
“그 정도야 뭐…….”
그러자 남궁산산이 이무환의 손에 들린 천을 받아 들고는 천 끝을 돌돌 말아 뒤로 묶었다.
천은 제법 커서 앞을 가리고 뒤까지 완전히 덮을 정도였다.
남궁산산은 풀고 싶어도 쉽게 풀지 못할 만큼 서너 번이나 끝을 잡아맸다.
그러고는 연지를 손으로 찍어서 앞쪽에 죽죽 선을 그었다.
마치 피가 흘러내린 것처럼.
“어디 봐요. 흠, 여기도 좀 칠하고…… 이쪽도…….”
한참 동안 여기저기 연지를 칠한 남궁산산은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동경을 들어 이무환에게 내밀었다.
이무환은 혹시나 남궁산산이 엉뚱한 짓을 하지 않았는지 동경 속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머리카락이 하얀 천 위에 흐트러져 있다. 그사이로 보이는 핏빛의 붉은 선. 어찌나 실감나게 칠했는지 자신이 봐도 흠칫할 정도다.
만족한 이무환은 동경을 건네주었다.
“봐, 이렇게 해도 무섭게 보이잖아.”
“다녀오세요, 오빠. 방은 제가 잘 지키고 있을게요.”
“그냥 네 방에 가서 자면 안 되겠냐?”
하지만 그가 말하는 사이 남궁산산은 훌훌 겉옷을 벗고 침상으로 뛰어들었다.
“아! 좋다!”
변장까지 다 한 마당이다. 꼬맹이를 들고 나가면, 놀란 사람들이 검을 들고 달려들 게 분명한 일.
‘저 구미호의 머릿속에는 분명히 그것까지 다 계산되었을 걸?’
더구나 시간이 없었다. 원막걸을 만나고 와서 영호승과 엽상 등의 수련을 봐줘야 한다. 다른 날보다 좀 더 화끈하게!
이무환은 침상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남궁산산을 노려보고는 몸을 돌렸다.
‘끄응, 갔다 와서 쫓아내지, 뭐.’
이무환은 창문을 열고 밖을 대충 살펴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갔다 오마. 엉뚱한 짓 하지말고 얌전히 있어.”
“네, 오빠.”
코 먹은 소리로 얌전히 대답한 남궁산산은 창문을 유령처럼 넘어가는 이무환의 뒤통수를 바라보고는 얼굴을 이불에 깊숙이 묻었다.
“끄끄끄끄…….”
뒤쪽은 머리카락으로 하얀 천을 가리지 않았는데, 그곳에는 종으로 몇 글자가 쓰여 있었다. 물론 자신이 쓴 글자였다.
2
원막걸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생긴 모습은 상관없었다.
귀신같은 모습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짓누르는 기운. 웬 놈이냐고 버럭 소리쳤더니 당장 날아오는 손발과 말투.
그놈이 그놈이었다.
입술가에 묻은 피를 쓱 닦은 원막걸은 이무환을 향해 봉서 하나를 내밀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요. 많은 생각을 해봤소만, 아무리 내 목숨이 소중하다 해도 더 이상은 도리가 아닌 것 같소.”
봉서는 두툼했다. 적어도 열 장 이상의 종이가 들어 있는 듯했다.
이무환은 봉서를 열고 안에 든 내용물을 꺼내들었다. 역시나 십여 장의 종이가 차곡차곡 접혀 있었다.
펄럭, 펄럭.
이무환은 빠르게 종이를 젖히면서 안에 든 내용을 대충 훑어보았다.
대충 봐도 금룡부에 대해서 제법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는 듯했다.
종이를 다시 접은 이무환이 불쑥 물었다.
“만겁궁의 사람들은 잘 지내고 있소?”
움찔한 원막걸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었소?”
“그 정도는 내 눈을 벗어날 수 없소. 속이려 하는 놈들이 멍청한 놈들이지.”
마치 세상일은 모두 내 손안에 있다는 투다.
원막걸은 새삼 눈앞에 있는 귀신같은 자가 두려워졌다.
요구를 거부했다고 당장 죽이려 하지는 않을까?
‘그래도 더는 안 돼!’
그때 이무환이 봉서를 품에 넣고 말했다.
“좋소, 당신이 정 그런 마음을 먹었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보죠.”
“뭐, 뭐요?”
“잠풍련과 손을 잡은 놈이 누구요? 궁주가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았을 테고……. 그자에 대한 것은 여기에 적혀 있지 않던데.”
원막걸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연히 궁주가 그들과 손을 잡았을 거라 생각할 줄 알았다. 한데 콕 집어서 묻지를 않는가.
“그게…….”
“헛소리할 생각은 아예 접고 말하쇼. 대충 예상은 하고 있으니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세 사람 중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면 내일 해를 보지 못할 거요. 누구요?”
차라리 한 사람의 이름을 내놓으면 어떻게라도 얼버무릴 텐데, 그렇게 말하니 거짓말하기가 더 힘들게 되었다.
원막걸은 거짓말을 포기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둘째 공자시오.”
둘째라면 금철종. 예상하고 있던 자들 중 하나다.
이무환은 어깨를 으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흠, 좋소. 믿어주죠. 그럼 오늘은 이만 가겠소. 나중에 또 봅시다.”
“더는 할 수 없다고 했지 않소?”
“그거야 당신 생각이고……. 그렇다고 너무 겁먹지는 마쇼. 혹시 아오? 좋은 일로 만날지.”
이무환은 원막걸을 부드러운 말투로 다독였다. 그래 봐야 원막걸의 귀에는 그 말이 그 말로 들렸지만.
‘좋은 일은 개뿔이나! 너 같은 놈이 어련히 좋은 일로 나를 찾아오겠다!’
바로 그때였다. 원막걸의 눈이 돌아서는 이무환의 뒤통수에 고정되었다.
“저, 저……. 크, 크큭!”
막 창문으로 신형을 날리려던 이무환이 천천히 돌아섰다.
‘이 양반이 겁에 질려서 미쳐 버렸나?’
“뭐 잘못 먹었수? 어디 아픈 거요? 이거 몇 개요?”
이무환이 손가락 세 개를 들어 흔들자, 얼굴이 벌게진 원막걸은 안간힘을 다해 웃음을 참고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내 신세가 하도 답답해서…….”
“거참, 잠을 푹 자고 나면 좀 나아질 거요. 그럼.”
별 실없는 사람 다 봤다는 눈으로 원막걸의 위아래를 훑어본 이무환은 유령처럼 몸을 날려서 창문을 빠져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크크크, 크하하하!”
눈물이 나오도록 웃어대던 원막걸은 고개를 번쩍 쳐들고 탄식하듯이 소리쳤다.
“내 저런 어벙하고 덜 떨어진 미친놈한테 이런 꼴을 당하다니! 원막걸아! 네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이냐!”
바로 그때였다.
요즘 누군가를 지칭하는 유명한 말이 떠올랐다.
미친놈 같아서 무서운 놈. 어벙한 것 같은데 살벌한 놈. 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행동으로 구룡성을 뒤집어놓은 두려운 놈.
“이, 이런! 설마 저, 저놈이……!”
이제야 확연히 알 것 같았다. 그놈이 그놈이었다.
광룡!
원막걸의 어깨가 축 처졌다.
완전히 새신 신고 똥 밟은 기분이었다.
정말 광룡이라면 빠져나가기는 다 틀린 일이다.
“크흐흑!”
그 시각.
이무환은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갔다.
‘또 허벅지 내놓고 자고 있을 거야. 가슴도 보일지 몰라. 어쩌면… 저번보다 더 많이 보일지도…….’
다행히(?) 남궁산산은 보이지 않았다.
제 방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자식, 뭐라고 했다고 갔나 보네. 뭐, 잘 갔지. 잘……. 자식, 간다고 말이나 하고 가지. 쩝.’
왠지 시원한 것 같으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봄꽃처럼 꿈틀거리며 피어났다.
‘헛! 내가 무슨 생각을!’
화들짝 놀란 이무환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얼굴을 가린 하얀 천의 매듭을 풀었다.
“끙, 끙, 되게 세게도 묶어놨네.”
확 잡아당기면 그냥 끊어질 것이다. 하지만 고집이 있지, 이 정도 매듭도 풀지 못해서 천을 잡아 찢을 수는 없었다.
반 각.
어렵게 매듭을 푼 이무환은 하얀 천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휴우, 겨우 풀었네. 왜 이렇게 몇 번이나 묶어…….”
바로 그 순간. 이무환의 눈이 탁자에 꽂혔다.
글자가 보였다. 모두 다섯 글자.
我 珊珊 所有―나는 산산이 것.
이무환의 입에서 심장에 화살이라도 꽂힌 것처럼 처절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어어억. 이 꼬맹이가……!”
그런데 미처 거친 숨을 가라앉히기도 전이었다. 자신의 신음 소리를 들었는지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총대주,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은? 미칠 일이지!
“다치셨습니까?”
심장에 화살을 맞았지!
“괜찮은가, 아우!”
괜찮기는! 돌겠는데!
사람들이 몰려오며 금방이라도 문을 열 것 같다.
이무환은 후다닥 탁자 위를 손으로 쓸어내 다섯 글자가 써진 하얀 천을 움켜쥐고 급히 밖을 향해 소리쳤다.
“별, 별거 아니오!”
좌측을 바라보았다. 창문이 보였다.
‘아냐, 밖에다 버리면 누가 주워서 볼 수도 있어.’
우측을 바라보았다. 침상이 보였다.
‘침상 속에다 숨기면 꼬맹이가 찾아낼 거야.’
이무환은 움켜쥔 천을 최대한 작게 뭉쳤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싹싹 비벼서 천을 잘게 부수었다.
‘흥! 이렇게 없애면 아무도 모르겠지.’
그때 반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잘게 부수어진 천이 흩날렸다.
그런데 재수가 없으려면 코 풀다 눈알이 빠진다더니, 부수어진 천 조각이 대황초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이무환이 뭔가 이상한 냄새를 맡았을 때는, 이미 십여 개의 천 조각이 불붙은 채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중이었다.
화르륵!
“헛! 이, 이런!”
연이은 이상한 소리에 방문이 덜컹 열렸다.
“총대주! 대체 무슨 일인데……!”
불붙은 천 조각이 둥실 떠서 날아다니고, 그걸 정신없이 쫓아다니는 이무환이다.
그 광경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엽상이 대경해서 소리쳤다.
“부, 불이야!!!”
후루룩!
이무환은 입술을 삐죽 내밀어 차를 빨아들이면서도 남궁산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까맣게 모른다는 표정이다.
‘여우도 저런 여우는 없을 거야.’
일명 ‘광룡의 방 화재 사건’으로 광룡대가 뒤집어진 지 네 시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태연하게 웃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오빠, 어제 돌아왔을 때 내가 없어서 심심했죠?”
속까지 긁는다. 남들은 자신더러 남의 속을 잘 긁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눈앞의 여우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시원했어.”
“피이, 내가 다 알아요. 보나마나 침상을 쳐다보면서 이불 속에 예쁜 산산이가 있었으면, 했을 걸요?”
솔직히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았다. 뭐, 약간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웃기는 소리. 네가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참 이상하다.
꼬맹이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화를 불같이 내면서 윽박지르고 당장 합비로 쫓아낼 생각이었는데… 막상 꼬맹이를 보니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조차 잊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넘어갈 수도 없는 일.
이무환은 찻잔을 내려놓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나직이,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너, 합비로 돌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