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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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98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09화
109화
혈추는 마혈과 아혈이 제압당한 채 특실에 갇혀 있었다.
그가 정신이 든 것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신이 든 이후에도 자신이 처한 상황이 실감나지 않았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래, 나는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꿈이 아니라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없어.’
옥문 밖 석벽에는 수십 종류의 고문 도구가 대롱대롱 걸려 있다.
크고 작은 망치, 송곳, 다섯 치에서 한 자까지 길이가 천차만별인 장침, 집게, 살점을 발라내는 날 선 소도, 크기가 제각각인 톱…….
톱의 손잡이에는 피가 엉겨 붙어 있고, 톱날에는 살점으로 보이는 것이 덕지덕지 매달려 있다.
어디 그뿐인가?
뇌옥 안의 석벽에는 핏덩이가 발라져 있고, 한쪽에선 썩은 내가 나는 검붉은 핏물이 고여 있다. 그리고 석벽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썩은 살점과 자잘한 뼛조각.
여긴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다.
지옥. 그렇다. 여긴 지옥이었다.
혈추는 꿈이 깨기만을 기다리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발자국 소리가 옥 앞에서 멈추는가 싶더니 옥문이 열렸다.
번쩍 고개를 든 그는 들어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네, 네놈은……?”
빌어먹게도 자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잘 잤어?”
미친놈!
혈추가 이를 악물고 이무환을 노려보았다.
이무환이 검지를 튕겨 아혈을 풀어주었다.
“사실 당신이 나를 죽이려고만 하지 않았으면 내가 왜 당신을 이곳에 잡아놨겠어?”
이를 뿌드득 간 혈추가 잇새로 소리쳤다.
“네놈은 누구냐?”
씩 웃으며 다가간 이무환이 혈추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빡!
혈추의 동공이 한껏 커졌다. 다리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부러진 것보다 고통이 더 심했다.
그런데 이무환은 그곳을 한 번 더 찼다.
퍽!
“크억!”
이무환은 그런 혈추에게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질문은 내가 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서서히 혈추의 얼굴에 공포가 떠올랐다.
이건 꿈이 아니다. 자신은 잡혔고, 곧 고문을 받게 될 것이다. 살점이 뜯기고, 뼈가 잘게 부서지고, 피를 쏟아내며 죽어갈 것이다.
씩 웃으며 찬 곳을 또 찬 저 악귀의 손에!
그 생각을 하자 혈추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 질문이 떨어졌다.
“당신, 만겁궁에서 왔지?”
부들부들 떨던 혈추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만겁존자 담사황이 직접 오기로 했나? 언제 오지?”
“무, 무슨 말을……?”
말을 더듬으며 부인하는 혈추를 보고 이무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런, 저런.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가 보군. 눈발!”
엽상이 옥 밖으로 나가더니, 석벽에 걸린 물건 중 톱을 떼어냈다.
팅!
엽상이 톱을 튕기자 톱날에 묻었던 살점이 우수수 떨어졌다.
“일단 부은 다리를 먼저 잘라내겠습니다.”
냉기 풀풀 날리는 싸늘한 목소리.
혈추의 왕방울만 하게 커진 눈이 톱날에 고정되었다.
“뭐, 뭘 알고 싶어서…….”
이무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가 좀 전에 물었잖아? 만겁존자가 직접 오기로 했냐고 말이야.”
혈추가 코앞까지 다가온 엽상을 보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다 알려질 일, 조금 일찍 말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 그렇소!”
“호오, 그래?”
혈추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이무환이 조용조용히 물었다.
“당신과 함께 온 중년인은 누구지?”
“그, 그분은…….”
혈추가 멈칫거리자 팅! 엽상이 톱을 튕겼다. 동시에 혈추가 빠르게 대답했다.
“존자의 친위단 부단주이신 귀월사(鬼越士) 도 어르신이오.”
한 번 입이 열린 이상 그다음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어차피 한 번 입을 연 자는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어 있는 법. 그다음부터는 묻기만 하면 되었다.
“담사황은 언제 오지?”
“내일 아침에…….”
“몇 명이나 오기로 했지?”
“친위단과 본 궁의 고수 이십 명쯤…….”
질문은 일각가량 지속되었다.
혈추는 넋이 반쯤 빠진 표정으로 주절주절 대답했다.
“흠, 좋아. 일단 여기까지만 하자고. 나머지는 나중에 생각나면 물어보지.”
그러고는 이무환이 손을 털며 일어나자 악을 쓰듯이 물었다.
“대, 대체 당신은 누구요?!”
이무환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 어제 실컷 이야기했잖아? 미친놈에 대해서 말이야. 내가 바로 그 미친놈이야.”
그제야 이무환의 정체를 안 혈추가 덜덜 몸을 떨었다.
“처, 천외광룡?”
‘저것이……!’
방으로 돌아온 이무환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침상 위에서 남궁산산이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음, 음……. 그래도 이쁘긴 이쁘군.’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보나마나 붕 떠서 자신을 더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
아마 나중에는 머리까지 풀고 이불 속에 들어가 있을지 모르는데, 남들 눈에 띌 경우 더 이상 변명할 여지도 없게 될 것이었다.
“꼬맹아, 머리 빨리 묶어라.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냐?”
“예쁘다고 하겠죠, 뭐. 오빠는 안 예뻐요?”
“예쁘긴. 꼭 귀신 같고만.”
“피이…….”
입을 삐죽이면서도 머리만 매만지는 남궁산산이다. 어떠냐는 듯 몸까지 요리조리 틀고 가슴을 내밀면서.
‘저걸 어떻게 끌어내지?’
예쁘긴 하지만 곧 사람들이 올 터. 그전에 끌어내야만 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일도 하고, 남궁산산의 잘 돌아가는 머리도 빌리고, 찰거머리도 떼어내고.
“꼬맹아!”
“예, 오빠!”
“놀러 가자!”
“어디로요?”
“철룡부! 왜? 싫어?”
“아뇨, 저는 오빠가 가는 데라면 어디든 좋아요!”
‘휴우…….’
2
이무환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달려오라는 말을 해놓고 남궁산산과 함께 철룡부에 놀러 간다고 했다. 물론 그가 정말 놀러 가는 것이라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오히려 광룡대원들은 더욱 긴장한 채 비상시 움직일 준비를 해놓고 대기했다.
이무환도 그들의 과민 반응을 제지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한다는데 말릴 이유가 뭐 있으랴.
“수고들 하라고!”
가볍게 손을 흔들고 광룡대를 나선 이무환은 많은 사람을 대동하지 않았다. 엽상과 무설강과 제갈신걸, 그리고 유철상만 데리고 나왔다.
영호승 등은 지금이 중요한 시기였기에 그냥 남도록 했다.
그렇게 광룡대를 나섰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헌원숭이 따라가겠다고 쫓아왔다. 제자들은 놔두고 혼자서.
이무환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보나마나 철룡부의 상황을 알고 싶은 호연청의 입김이 작용했겠지.
잠시 후 이무환이 일행과 함께 수룡단을 문턱을 넘자, 십여 명이 정신없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마 조금 있으면 더 많은 사람이 이무환의 발자취를 쫓아 움직일 것이 뻔했다.
하지만 이무환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놀러 가는 길이니까.
천룡부의 담장을 지나서 남쪽으로 얼마나 내려갔을까. 철룡부의 정문 앞에 도착한 이무환은 고개를 들고 현판을 올려다봤다.
“흠, 철룡부에 철혈의 승부사가 있다고 하던데…….”
중얼거리던 이무환이 갑자기 헌원숭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헌원숭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뭘 말인가?”
“철혈의 승부사가 이리저리 오가는 모습에 가슴이 아프지 않습니까?”
대답하기가 애매한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하자니 무적철검 철군평을 비하하는 것 같고, 아니라고 하자니 흐르는 상황이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그 안에 또 어떤 말 못할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그는 말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글쎄, 그만한 사정이 있지 않겠나?”
헌원숭의 애매한 대답에 이무환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직이 말했다.
“저라면… 죽든 살든 자존심을 지켰을 겁니다.”
“때로는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네.”
“이거저거 따지다 보면 결국 남의 밥만 되지 않겠습니까? 고개 돌리면 귀, 코 다 베어가는 세상이 강호라는데요.”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어쩌면 피 끓는 젊은이와 강호밥을 수십 년 먹은 노회한 강호인의 차이일지도 몰랐다.
헌원숭은 완전히 수긍을 할 순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서슴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무환의 젊음이 부러웠다.
‘흠, 이런 대화를 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는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군.’
그래서인가, 이무환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얼굴만 보면 순진한 청년인데, 어디에서 그런 괴상한 성질이 튀어나오는지 모르겠군.’
그사이 이무환이 엽상에게 눈짓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 엽상이 문을 두드렸다.
탕! 탕! 탕!
숨을 서너 번 쉬기도 전에 커다란 문이 좌우로 벌어졌다.
끼이익!
경첩 끌리는 소리와 함께 벌어진 문 안쪽에는 십여 명이 서 있었다. 이미 이무환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어찌 오셨소?”
앞에 서서 묻는 중년인의 숨결이 미미하게 거칠어져 있었다. 이무환과 헌원숭의 대화를 들은 것 같았다.
이무환이 그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놀러 왔수.”
중년인, 철룡칠의 중 다섯째 철우평은 이무환의 대답에 눈을 부라렸다.
“장난하러 오셨소?”
이무환도 지지 않고 눈에 힘을 주었다.
“놀러 왔다지 않소?”
눈싸움이라면 한여름 불타는 태양만이 맞수가 될 수 있는 이무환이다.
철우평이 제아무리 철룡칠의 중 하나라 해도 이무환의 눈빛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걸 지금 믿으라고 말하는 거요?”
“그럼 믿으라고 말하지, 믿지 말라고 말하는 건 줄 아쇼?”
거기다 말싸움도 이무환이 두어 수 앞섰다.
철우평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물었다.
“설마 특조대에서 본 부의 상황을 모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오만.”
“아니까 놀러 온 것 아니오?”
조금 묘한 말이다. 철우평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 본 부는 손님이 와서 놀 만한 상황이 아니오.”
“상황이 안 되면, 놀 수 있는 상황으로 만들면 될 일이 아니겠소?”
철우평이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대체 광룡이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광룡의 말에 어떤 뜻이 숨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뭘까?
그때 이무환이 그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 굴려봐야 쇳소리밖에 더 나겠소? 부주님은 어디 계시오? 한번 뵙고 싶은데.”
철우평은 부글부글 끓는 가슴을 억지로 눌렀다. 기분 같아서는 문을 쾅! 닫고 돌아서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의 말에 정말 숨은 뜻이 있다면 이 일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으드득, 이를 갈며 돌아섰다.
“말씀은 드려보겠지만 만나주실지는 나도 모르겠소. 그래도 원한다면 따라오시오.”
“거참, 나이도 웬만큼 드신 분이 그러다 이 부러지면 어쩌려고…….”
철우평은 절대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고 걸음을 옮겼다.
‘빌어먹을 새끼. 걱정 마라! 네놈 뼈를 통째로 씹어도 안 부러지니까.’
그러면서 이무환에게 들으라는 듯 한 번 더 이를 으드득 갈았다.
딱!
입 안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에서도.
“그러게 이 함부로 가는 게 아니라니까.”
그때부터 철우평의 걸음걸음에 바닥의 청석이 깊게 파였다.
무적철검(無敵鐵劍) 철군평.
천궁무조 주백천, 검왕 동방휘와 함께 구룡성 내에서 가장 강한 세 사람 중 하나로 꼽히는 절대고수.
강호활동을 안 해서 그렇지, 우내십존이나 천중십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철혈의 승부사.
이무환이 아는 철군평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한 번 밀렸다고 해서 순순히 남의 밑에 들어갈까?
‘웃기는 소리지. 그 말을 들으면 지나가던 똥개도 하품할 걸?’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고개 숙일 철군평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를 밀었다는 사우가 정말 삼악 중 하나가 세운 곳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부주, 우평이옵니다.”
넓은 대전에 홀로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철군평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특조대의 대주가 부주님을 뵙고자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