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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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10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07화
107화
결코 구룡성의 무사들은 아니었다. 다섯 모두 절정의 경지를 넘나드는 고수들. 개중 한 사람은 초절정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너무 어정쩡한 시각에 온 것 같군.”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아침에 연락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음, 그럴까?”
“일단은 이곳 상황을 먼저 알아보도록 하지요. 어르신께서 오시면 물어보실지 모르니 말입니다.”
“그것도 괜찮겠군.”
이무환은 그들의 말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빈 술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그때 문득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마를 찌푸린 이무환은 슬며시 고개를 돌려 우측을 바라보았다.
다섯 사람 중 허리에 낭아추의 사슬을 감고 있는 삼십대 초중반의 장한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이 얇은데다 눈이 치켜 올라가서 인상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 자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물었다.
“이봐, 뭐 좀 물어도 되겠나?”
‘그냥 다른 사람에게 물으면 안 되겠어?’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오랜만의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뭘……?”
“구룡성에 들어온 지 오래되었는가?”
나이가 어려 보여서인지 처음부터 반말이다.
이무환이 꾹 참고 대답했다.
“석 달 정도.”
“그럼 구룡성의 상황에 대해 잘 알겠군.”
“그럭저럭.”
이무환의 혀 짧은 대답에 장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자식이…….’
이무환의 눈도 가늘어졌다.
‘왜, 기분 나쁘냐? 그럼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
하지만 장한은 대화의 상대를 바꾸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생긴 거와 달리 제법 인내심이 있는 자였다.
“우리에게 구룡성의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나? 그럼 술값은 우리가 내지.”
이무환이 퉁명하게 말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과는 대화하고 싶지 않소.”
“우리는 호남에서 왔네. 사람을 만나러 왔는데, 조금 일찍 온 김에 이곳 상황을 알고 싶은 것이네.”
“호남? 호남이 다 당신들 집이오?”
장한의 가늘어진 눈에서 한광이 흘러나왔다. 속으로는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무환의 질문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름은 뭐요? 사문은? 왜 구룡성에 온 거요?”
장한은 차마 노기를 터뜨리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였다. 당장 때려죽일 것처럼 이무환을 노려보면서.
이무환은 장한이 대답을 못하고 노려보기만 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술잔을 들었다.
“거, 이상한 사람들이네. 떳떳하면 왜 대답을 못해?”
“이이…….”
주먹을 움켜쥔 장한이 반쯤 일어섰다.
그때 중년인이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막았다.
“입심이 대단한 젊은이군. 좋아, 다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대답하지. 우리는 장사(長沙)에서 왔네.”
‘장.사!’
이무환은 목이 턱 막혔다.
그래도 억지로 술을 삼켰다.
목구멍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입을 열면 불길이 뿜어질 것 같았다.
‘끄으으…….’
숨을 크게 들이켜 간신히 불길을 가라앉힌 이무환은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후아, 이제 좀 살겠군.”
귀찮게 하는데다 술 먹고 체할 뻔한 이유를 제공한 자다. 말이 곱게 나오면 이무환이 아니었다.
“그 먼 곳에서 뭐 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온 거요?”
중년인이 재미있다는 눈빛을 한 채 순순히 답했다.
“그야 볼일이 있어서 왔지. 그런데… 이제 자네가 대답을 해 줄 때가 아닌가?”
이무환은 잠시 생각도 할 겸 안주를 집어 우적우적 씹어 먹고는 느릿하니 입을 열었다.
“이곳은 한마디로… 흙탕물 속과 같소. 아무도 내일의 일을 알 수 없는 상황이오.”
뭔가 심각하게 말하는가 싶더니 술잔을 잡아가며 입을 다무는 이무환이다.
중년인은 한참이 지나도록 이무환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혹시 광룡이라는 사람을 아나?”
이무환이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구룡성에서 그 미친놈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소?”
“그가 정말 미쳤나?”
“그럼 미쳤으니까 미쳤다고 하지, 안 미친놈보고 미쳤다고 하겠소?”
“그런데 미친놈이 어떻게 특조대를 맡았단 말인가?”
“그걸 알면 내가 특조대주를 하지. 미쳤다고 여기서 혼자 술이나 마시고 있겠소?”
“하긴…….”
중년인이 꼭 너처럼 덜떨어진 놈이 뭘 알겠냐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장한을 비롯한 나머지 네 사람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얼래? 이 양반들이……!’
이무환은 은근히 화가 났다. 마음 같아서는 한쪽으로 끌고 가서 모조리 쥐어 팬 후 형옥에 집어넣고 금룡부에 숨어 있는 놈을 끌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건드릴 때가 아니었다.
본진도 아닌 자들이다. 미끼의 역할을 해야 할 자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선 참아야만 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화를 누른 이무환이 술잔을 목구멍에 털어 넣고 지나가듯이 물었다.
“그런데 뭐 하려고 장사에서 여기까지 온 거요? 보아하니 한가락 하시는 분들 같은데, 누가 초청이라도 했소?”
중년인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대답했다.
“초청은 무슨. 그냥 구룡성에서 무사를 뽑는가 하고 와봤네.”
이무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또, 어떤 미친놈이 장사의 세력을 끌어들이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에 거기 가는 사람들인 줄 알았네.”
순간 중년인과 장한들의 몸이 일제히 석상처럼 굳어졌다.
그러든 말든, 이무환은 술잔을 탈탈 털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목구멍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우간 잘 먹었소. 이봐! 점소이! 내 자리 계산은 이분들께 받게나!”
그렇게 이무환이 밖으로 나가자 중년인이 고개를 까닥였다.
“혈추, 가서 처리해.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고.”
낭아추의 사슬을 허리에 감은 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부단주.”
매화루를 나선 이무환은 상아와 비아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동쪽 성벽을 향해 걸어갔다.
몇 사람이 안됐다는 눈으로 이무환을 힐끔거렸다.
이무환은 남들이 어떻게 쳐다보든 신경 쓰지 않고 상아와 비아의 노래를 계속 불렀다.
“우우우……. 옥이의 입술을 샥, 달콤한 향이 풀풀, 눈썹이 파르르 떨리네. 오오우우…….”
그렇게 오십여 장을 지나자 사위가 적막에 쌓인 듯 조용해졌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이무환의 노랫소리만이 적막 속에서 흘러나왔다.
얼마나 걸었을까, 옥이의 입술을 닦는 것으로 노래가 끝났다. 그리고 동쪽 성벽이 보일 즈음, 뒷짐 진 채 걸어가던 이무환이 고개를 모로 꼬고 돌아섰다.
“왜 따라오는 거요? 아직도 물어볼 게 남았소?”
십오륙 장 정도 떨어져서 따라오던 혈추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렇다네. 한 가지 의문이 있는데,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말하는 사이 거리가 십 장 이내로 줄어들었다.
“호오, 그래요? 그럼 저기 조용한 데로 가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혈추야 그러면 더 없이 좋았다.
“그것도 괜찮겠군.”
이무환은 길가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성벽 부근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다가오는 혈추에게 조용히 물었다.
“이제 말해보쇼. 뭐가 그리 궁금한 겁니까?”
혈추가 허리를 손으로 쓸었다. 어느덧 거리는 삼 장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별건 아니네. 자네 주둥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것이 궁금했을 뿐이니까.”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
차르륵, 쉬이익!
어둠을 가르고 낭아추가 쏘아진 살처럼 날아들었다.
“어?”
이무환이 눈을 크게 뜨며 휘청거렸다.
그 바람에 낭아추가 옆으로 빗나갔다.
하지만 곧 혈추가 손을 흔들자 낭아추는 살아 있는 새처럼 원을 그리며 이무환을 휘감았다.
바로 그 순간. 휘청거리던 이무환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손을 뻗어 사슬을 붙잡았다.
그걸 보고 혈추가 살기를 흘리며 비웃었다.
“훗, 어리석은 놈!”
중간이 잡혀 못 쓰게 될 낭아추라면 하등 쓸모가 없는 무기였다. 혈추가 낭아추를 쓰면서 절정고수로 대접받는 것은 그만큼 낭아추를 절묘하게 쓰기 때문이었다.
가볍게 손을 털자 낭아추가 홱 방향을 꺾어 이무환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런데 이무환이 사슬의 중간을 잡은 바람에 그 속도가 더 빨랐다.
혈추는 그걸로 모든 것이 끝났다 생각했다. 이제 뒤통수가 터진 상대가 맥없이 쓰러지는 것만 보면 되었다.
“뒈져도 나를 원망하지 말고 네 입을…….”
하지만 상황은 그가 예측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옆으로 한 발 내딛은 이무환이 손에 잡힌 사슬을 흔들자, 낭아추가 방향을 바꿔서 혈추를 향해 날아갔다.
조금 전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쐐액!
“허억!”
혈추의 표정이 썩은 호박 밟힌 것처럼 일그러졌다.
황급히 허리를 틀어 낭아추를 피한 그는 재빨리 몸을 세워 상대의 공격에 대비했다.
순간이었다.
사슬이 혈추의 몸을 휘감는가 싶더니, 이무환의 발바닥이 혈추의 가슴에 정통으로 꽂혔다.
너무나 빨라서 피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쾅!
내장이 모조리 쏟아질 것 같은 충격에 숨이 턱 막혔다.
동시에 귓전을 울리는 나직한 목소리.
“죽이지는 않을 거야. 나도 물어볼 것이 많거든.”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와중에도 혈추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무환은 그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혈추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러고는 사슬로 혈추의 몸을 대충 묶어서 들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후.
형옥에 도착한 이무환은 특실에 집어넣으라는 당부와 함께 혈추를 적사중에게 넘겼다. 그러고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흠, 오늘은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군.’
한편, 만겁친위단의 부단주 도지양은 혈추가 나간 지 이각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수하들과 함께 근처를 이 잡듯이 뒤졌다.
그러나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혈추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네 사람은 반 시진 만에 다시 객잔으로 돌아와서 객방을 잡고 머리를 맞댔다.
“덜 떨어진 놈 하나 처리하라고 했더니,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도지양은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허공을 쏘아보았다.
검을 멘 자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이곳 지리도 잘 모르는 남 형이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러자 도를 멘 자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길을 잃었다 해도 한 시진이 다되도록 찾아오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상황이 어떻든 찾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때 조용히 있던 덩치 큰 장한이 입을 열었다.
“혹시 그놈에게 거꾸로 당한 것은 아닐까요, 사숙?”
도지양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혈추가 그런 어벙한 놈에게 당했을 거라 생각하느냐, 소양?”
“그게… 재수 없으면 소 뒷걸음에 쥐도 밟히는데…….”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마디로 덩치 큰 장한의 입을 다물게 한 도지양이 수하들을 둘러보았다.
“할 수 없다. 일단 날이 새면 금룡부로 찾아간다. 아무 일도 없다면 그곳으로 찾아오겠지.”
첫날부터 일이 꼬이자 도지양은 왠지 께름칙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그 빌어먹을 놈을 만난 것부터가 재수 없었어.’
4
혈추를 적사중에게 맡겨놓고 돌아온 지 한 시진, 밖에서는 자정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늦은 시각인데도 이무환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의자에 앉아서 차를 홀짝였다.
혈추를 적사중에게 넘길 때의 좋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후루룩!
네 잔째 차가 비운 그는 고뇌에 쌓인 표정으로 다시 찻잔을 채웠다.
싸늘히 식은 차가 찻주전자에서 흘러나왔다.
“후우…….”
찻잔을 바라보던 이무환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뒤이어 이를 지그시 깨문 그의 입이 힘들게 열렸다.
“너 정말 네 방에 가서 안 잘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