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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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0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04화
104화
3
웅장한 대전 안에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어찌 된 일입니까?”
등에 기다란 도를 멘 노인이 물었다.
칠채 도관을 쓴 노인이 담담히 대답했다.
“첫째가 하던 일에 약간의 착오가 있었네, 석 아우.”
각이 진 얼굴, 가늘고 길어서 칼날처럼 보이는 날카로운 눈, 턱에 여섯 치가량의 수염을 뾰족하게 기른 석치상은 차마 분노를 터뜨리지 못하고 잇새로 물었다.
“밖에서는 구질구질한 일을 처리하느라 동분서주하는데, 안에서는 실수로 제자들이 죽고 잡혀가다니. 대체 어찌 된 겁니까, 야율 형?”
“아무래도 자네가 도와줘야 할 것 같네.”
“광룡이라는 놈 때문에 구룡성이 발칵 뒤집혔다는데, 대체 어떤 놈입니까?”
“그놈만이 문제가 아니네. 알지 모르겠지만… 호연청이라는 놈도 만만치가 않네.”
석치상의 날카로운 눈매가 꿈틀거렸다.
도관을 쓴 노인이 한마디 덧붙였다.
“놈이 움직이는 수룡단에 헌원숭이 와 있네.”
그 말에 석치상의 표정이 굳어졌다.
“헌원숭이? 정말 그가 구룡성의 일에 끼어들었단 말입니까?”
“문제는… 그놈이 다가 아닌 것 같다는 것이야.”
석치상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도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제자의 죽음에 대한 것은 뒤로 미루었다.
“누가 또 끼어들었습니까?”
“아직 확인을 하지 못했네. 놈들이 워낙 은밀히 움직여서. 헌원숭도 이번 일이 아니었으면 모를 뻔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때다. 조용히 앉아 있던 오십대의 중년인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창룡부와 검룡부가 놈을 지원하고 있소. 게다가 철룡부에는 정체 모를 자들이 대거 들어와 있는 상황이오. 이대로는 구룡성주 선출에서 이긴다는 보장을 하기 힘드오.”
나직이 흘러나오는 목소리지만, 한번 입을 여니 대전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신룡부주, 천궁무조 주백천이었다.
석치상은 주백천의 기도에 새삼 놀람을 금치 못했다.
천중십마 중의 누구에게도 떨어지지 않는 기도였다. 천중십마와 우내십존도 구룡성에서는 힘을 펴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마냥 헛소리만은 아닌 듯했다.
‘사람들이 왜 구룡성을 천하제일성이라 하는지 알 만하군.’
자연 석치상의 목소리도 낮고 정중하게 흘러나왔다.
“하면 부주께선 어떤 방법이라도 있소?”
“오시기 전에 야율 노야와 상의한 것이 있소.”
석치상이 눈살을 찌푸리며 도인과 주백천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주백천이 말했다.
“구룡 중 하나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오. 그 일에 석 대협이 좀 도와주셨으면 하오.”
석치상이 잠시 망설였다. 뒤처리나 하는 사람이 된 기분인 것이다.
하지만 대가만 확실하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대가를 바라고 손을 잡았던 것이니까.
“그 대가는?”
도인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큰 놈이 약속했던 대로, 모든 일이 끝나면 악양 일대의 권리를 자네에게 넘겨주겠네. 물론 일이 끝날 때까지 도와줘야겠지만 말이야.”
4
밤이 깊어 술시가 넘어갈 무렵, 네 사람이 비밀리에 구룡성의 담을 넘었다.
그들은 성을 나서자마자 무창으로 달려갔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은 커다란 자루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반 시진 후, 용강통을 지난 그들은 작은 장원이 보이자 거침없이 담장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웬 놈이냐?”
순간 으스스한 목소리와 함께 십여 명이 네 사람을 둘러쌌다.
이무환이 그들보다 훨씬 살벌한 목소리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
“주귀에게 내가 왔다고 해.”
자신이 올 거라는 걸 주귀가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 말투다. 거기다 입을 연 애송이놈 옆에 있는 세 사람의 무위가 상당해 보였다.
경비조장인 장초는 상대가 만만치 않아 보이자 앞으로 나섰다.
“당신이 누군데……?”
“악귀라고 하면 알 거야. 소란 떨고 싶지 않으니까 빨리 가서 말해.”
주귀나 악귀나.
둘이 정말 잘 아는 사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장초가 재빨리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언뜻 막위가 짊어지고 있는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도적놈들인가 보군. 장물을 팔러 왔나?’
그제야 이해가 갔다. 누가 도적놈들 아니랄까 봐 정문을 놔두고 담장을 넘은 것 같다.
‘악귀? 흥! 네놈이 악귀면 나는 염라귀다, 새끼야.’
장초는 내심 코웃음을 치면서도 뒤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강해 보이는데다 주귀를 찾는 이상 자신이 대충 판단할 문제가 아닐 듯했다.
뒤쪽에 있던 장한 하나가 안쪽으로 들어가고, 반의반 각도 되지 않아 당악이 부리나케 뛰어나왔다.
“오셨습니까?”
이무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장은?”
“안에 계십니다.”
이무환이 쓱 장초를 노려보고 몸을 돌렸다.
‘분명히 도둑놈 쳐다보는 눈빛이었는데…….’
막위가 자루를 내려놓자 이무환은 아무 말 없이 주섬주섬 안에 든 물건을 꺼냈다.
당호민은 자루 안에서 원령초와 양귀비가 나오는 걸 보고 눈이 커졌다.
“원령초와 양귀비? 설마……?”
이무환이 자루를 탈탈 털고 입을 열었다.
“놈들이 연단하던 곳을 찾았습니다. 이것은 그곳에 남아 있던 약초와 자재들입니다.”
당호민은 자루에서 꺼낸 약초에 다가가더니 세심하게 살폈다.
그렇게 일각가량이 지났을 때다.
“이상하군. 폭령잠마단과 상관없는 약초도 섞여 있네.”
인상을 찌푸린 당호민이 두어 가지 약초를 들어 보였다.
“이건 약초라기보다는 독초에 가깝네. 태우면 아주 독한 향을 뿜어내지.”
이무환은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약향이 그렇게 독했던 거군.’
고진은 하종건이 들어오지 못하게 고의로 독초를 태운 듯했다. 철저히 탈출 준비를 했다는 말.
이무환은 약초를 살펴보고 있는 당호민에게 단로를 긁었던 주걱을 내밀었다.
“이건 단로를 긁었던 주걱입니다. 한번 살펴보시죠.”
당호민은 받아 든 주걱을 손톱으로 긁어내더니, 손바닥에 떨어진 가루를 혀로 찍어 맛을 보았다.
그리고 얼마가 흘렀을까. 당호민의 눈이 의혹과 경악으로 휘둥그레졌다가, 곧 곤혹함으로 찌푸려졌다.
“이, 이게 정말 그곳의 단로에서 나온 것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단로 안에 들어 있던 것이니 틀림없을 겁니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다. 하지만 굳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까지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알 수 없군. 대체 어떤 자가 이런 단약을 만들었단 말인가?”
“왜요, 너무 독합니까?”
“으음, 그게 아니네.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이건… 마단이라기보다는 영단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네.”
영단!
당호민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이무환의 눈이 점점 커졌다.
“마단처럼 기운을 급격히 북돋는 것은 비슷한데, 은은히 영기가 서려 있어서 정신이 무너진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네. 거기다 뭘 섞었는지, 잘만 사용하면 내공 소실도 최소화할 수 있겠어. 한마디로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마단이 될 수도 있고, 영단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
이무환은 쫙 찢어지려는 입에 힘을 주었다.
영단이라니! 이게 웬 떡이란 말인가!
‘우흐흐흐! 착하게 살면 복이 굴러들어 온다니까!’
남들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테지만, 이무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한편으로는 하가장에 다시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단로의 바닥에 말라붙어 있는 약까지 싹싹 긁어야겠어.’
흥분을 가라앉힌 이무환이 물었다.
“연단을 한 자가 약을 다 긁어갔습니다. 그자가 그걸 어떻게 사용할지 모르겠군요. 복용법에 대해 자세히 알고나 있을지…….”
물론 그중 일부는 자신이 가지고 있다. 하기에 그는 복용법을 꼭 알고 싶었다.
당호민이 입을 열었다.
“아마 알고 있을 거네. 그러니 이런 단약을 만들었겠지.”
‘그러니까 그 방법이 뭐냐니까요?’
이무환은 대놓고 물어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돌려 물었다.
“혹시라도 그자를 잡을지 모르는데, 복용법을 아십니까?”
당호민은 여전히 주걱을 바라보며 무심코 단약의 복용법에 대해 말했다.
“이런 약은 워낙 약기운이 강해서 소량을 복용해야 하네. 새끼손톱만 한 걸 이틀에 한 번 정도 복용하고, 운기를 해서 약기운을 북돋으면 여느 영단 못지않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거네.”
무려 반 주먹이다.
새끼손톱만 하게 쪼개면 오십 개는 될 터.
이무환은 생각만으로도 배가 터질 것처럼 불렀다.
그때 당호민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섯 번 이상 먹으면 효과가 덜해지든지, 아니면 오히려 강한 약기운으로 인해서 해가 될지도 모르네. 어느 약이든 지나친 과용은 독이 되는 법이지.”
그 말에 갑자기 배가 푹 꺼졌다.
다섯 개를 뺀 나머지 모두를 남에게 줘야 한다는 말이잖은가!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나눠 주고, 나머지는 그냥 팔까?’
그런데 스스로 생각해도 그건 너무 치사하게 생각되었다.
이무환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묵묵히 서 있자 당악이 입을 열었다.
“저… 원령초가 흘러나온 곳을 알아냈습니다.”
이무환은 아쉬운 마음을 털어내고 당악을 바라보았다. 당악이 말을 이었다.
“구룡성 화룡단의 약재당 부당주인 소한경이란 자가 가져왔다고 합니다.”
이무환의 눈이 반짝였다. 가져온 자를 찾아냈다면 흘러나온 곳도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더구나 약재당의 당주는 백문호다. 몰래 조사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을 듯했다.
5
구룡성으로 돌아온 이무환은 아무도 몰래 대나무통을 쪼개고, 그 안에 든 약을 새끼손톱만 하게 쪼개서 동그랗게 말았다. 그러자 무려 육십오 개의 단약이 만들어졌다.
이무환은 개수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나올수록 속이 더욱 쓰렸다.
‘제길. 까짓 거, 쏜다, 쏴! 쏜다고!’
아버지 거 다섯 개. 옥이 거 다섯 개. 검운장의 외조부 거 다섯 개.
일단 열다섯 개를 빼서 조그마한 옥병에 담았다. 그리고 또 줄 만한 사람들을 생각해 봤다.
‘금환이 형도 주고… 무 형도 줘야겠지? 그리고 또…….’
대충 계산을 해보니 마흔 개 정도는 소요될 것 같았다.
그래도 남는 것이 열 개나 된다.
이무환은 일단 그것으로 만족하고, 자신이 먼저 약효를 시험하기 위해 하나를 먹어봤다.
이무환이 눈을 뜬 것은,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림과 동시였다.
약효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약을 복용하고 조심스럽게 대주천을 해봤다.
단 한 알을 복용했을 뿐이거늘, 그 동안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던 만년해령실의 기운이 강한 약효에 의해서 단단한 껍질을 깨고 조금씩 피어났다.
허공에 붕 뜬 기분. 몸 안의 모든 것이 허해져서 일시지간이나마 무상의 경지를 맛보았을 정도다.
‘다섯 알을 다 복용하고 나면 만년해령실의 기운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거기다 단약의 약효까지 더해지면, 그동안 칠성에 머물렀던 천광수뢰장의 삼초, 천광무벽(天光無壁)을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호민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말.
영단이 분명했다. 단, 다섯 개 이상 먹어서는 안 되는 영단!
‘아, 젠장! 이 좋은 것을 다섯 개 이상 먹으면 안 되다니!’
하지만 어쩌랴,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데.
당호민의 말이 증명된 만큼 미련은 빨리 떨치는 게 나았다.
‘하긴… 이것만 해도 어디야?’
공짜를 너무 바라면 하늘이 시샘할지도 몰랐다.
아침이 밝았다.
식사가 끝난 지 이각, 광룡대의 간부들이 회의실에 하나둘 나타났다.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인 나날.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좀 더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조차 보일 정도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나자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모여들었다.
의자가 꽉 차자 이무환이 뜬금없이 엽상에게 물었다.
“현재 광룡대의 인원이 어떻게 되지?”
엽상이 즉시 대답했다.
“구룡수호단이 마흔두 명, 사십팔객, 광룡대의 삼대주와 일반 대원이 스물일곱, 거기에 헌원 대협과 제자분들, 총대주와 총대주의 직속 대원들까지 합하면, 광룡대의 총인원은 백삼십삼 명입니다, 총대주.”
엽상의 보고가 끝나자, 이무환이 톡톡 탁자를 두드리며 눈을 감았다.
회의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어 입을 적셨다.
침묵 속에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와 차 마시는 소리,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때 이무환이 천천히 실눈을 뜨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내 졸개가 백삼십이 명이란 말이지? 흠,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군.’
엽상이 말한 사람 중에는 천중십마 중 한 사람인 헌원숭도 있었다. 그도 공식적으로는 자신의 수하였다. 헌원숭이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게다가 조금 있으면 호연청이 이십 명 정도의 고수를 더 보내줄 터. 이무환은 흐뭇한 마음에 한밤중의 속쓰림이 그럭저럭 낫는 듯했다.
이무환이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일제히 실눈을 뜬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집중되자 이무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룡부를 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