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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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37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02화
102화
고진이 연단한 약을 가지고 도망친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까, 죽어라 일해서 먹고살게 해준 사람의 가족을 당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모두 죽였다, 이 말이지? 에라이!”
퍽!
두 시진 후.
이무환은 여인들에게 그간의 상황을 모두 전해 듣고는, 장원에서 찾은 금붙이를 나눠 주고 멀리 도망가라는 말과 함께 내보냈다.
그렇게 오시 초가 되자, 유군명이 마차 한 대와 열두 명의 대원을 데리고 장원으로 돌아왔다.
이무환은 마차에 장주인 하종건과 잠풍련의 간부로 보이는 자 둘을 태우고, 연단실에서 수거한 물품을 담은 커다란 자루를 함께 실어 장원을 떠났다.
떠나면서 이무환이 엽상에게 전음으로 명을 내렸다.
<눈발, 최대한 빠른 연락망을 통해서 황산에 연락해. 물건의 일부를 찾았다는 말을 하고 확인할 사람을 보내라고 해. 너무 많이 오지는 말고. 아마 이십 명 안팎이면 적당할 거야. 아! 유소경도 함께 오라고 해.>
단순히 확인을 하기 위해서 사람을 보내라는 말이 아니다. 이무환의 말인즉, 소수이되 황산검문의 최정예고수들을 보내라는 것이다.
황산검문의 최정예고수면, 구룡성 각 부의 최정예고수 정도는 될 터. 아무도 모르는 전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엽상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 말하면, 전대와 현재의 황산십검이 총출동하겠군.’
장난처럼 구룡성을 뒤집는다 했었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헛웃음만 나왔었다.
그런데 그 일이 점점 현실화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엽상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대답 대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2
광룡대가 장원을 떠나가던 그 시각.
백간산 중턱의 은밀한 동굴 속에서는 한 사람이 반듯이 누운 채 멍하니 동굴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체격. 많이 봐줘야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 입가의 커다란 점. 고진이었다.
‘하마터면 잡힐 뻔했어.’
십여 년 전, 약초를 채취하다 소나기를 만났다. 그때 비를 피하려다 우연히 지금 누워 있는 동굴을 발견했다.
언뜻 보면 입구가 한 뼘밖에 되지 않아서 그저 바위틈으로만 보였지만, 바위 하나만 치우면 사람이 기어들어 갈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게다가 안쪽으로 이 장만 기어들어 가면, 사람이 살기에 그리 불편하지 않을 만큼 넓었다.
그는 그 동굴을 발견한 후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했다. 동굴에 이런저런 도구도 가져다 놓고, 여차하면 며칠은 지낼 수 있게끔 꾸며놓았다.
자신이 누워 있는 나무 침상도 그때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하종건, 개보다 멍청한 놈! 연단이 끝나면 전부 죽는다는 것도 모르는 멍청한 놈!’
고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다 쏟아져 이제는 나올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 생각을 하자 또 눈물이 나왔다.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과 장주를 비롯해서, 이 일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죽일 것이 분명한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자신의 가족을 살려뒀을 리가 없었다.
한 달 전, 놈들을 떠보기 위해 물어볼 것이 있다며 아버지를 데려다 달라고 했다. 하지만 개 같은 하종건은 아버지를 데려오지 않았다. 몸이 아파서 오기가 힘들다며.
헛소리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아버지는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올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아버지! 여보! 아들아! 어흐흐흑!’
소리 없는 울음에 가슴이 들썩거렸다.
장주에게 다 죽는다는 말을 하려다 참았다. 그 말을 들은 장주가 겁을 내서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면, 도망칠 기회도 없이 모두가 죽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연단을 하며 고의로 약향을 더욱 고약하게 풍기도록 손을 썼다.
그 덕에 장주는 한 달에 한두 번만 자신을 찾아왔다. 놈들도 연단실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그사이 토굴을 팠다.
연단실은 자신의 아버지가 만든 곳, 그곳에는 아버지와 자신만 아는 또 다른 지하 석실이 있었다. 원래는 약초를 보관하는 곳이었는데, 그 석실은 결국 토굴을 파며 나온 황토로 메워졌다.
그렇게 토굴을 완성한 것이 사흘 전. 그때 곧바로 도망가지 않은 것은 연단이 막바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죽일 놈들! 네놈들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내가 무엇을 만들었는지!’
얼마 전, 놈들이 원할 때는 미리 만들어놓은 단약 오십 개를 내어주었다.
적에게 모두 죽었다고 들었지만, 그게 아니었어도 그걸 먹은 놈들은 미쳐 날뛰다가 죽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품에 있는 단약은 그것과 천지 차이였다.
기가 폭주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결코 미쳐서 죽지는 않는다. 오히려 소량으로 지속해서 장복하면 영약처럼 작용해서 기가 쌓인다.
마단이 영단이 된 것이다.
장주가 자신에게 연단을 해달라고 부탁하던 그날, 자신이 백간산 남쪽 계곡에서 발견한 일곱 뿌리의 커다란 산삼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제일 큰 것 두 뿌리는 팔아서 독립할 자금을 만들고, 나머지는 아버지와 아들에게 복용시키려 했었다.
그런데 그날, 장주에게 연단에 대한 말을 듣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 어쩌면 영물이나 다름없는 수백 년 된 산삼을 발견하고, 그걸 연단에 쓰게 된 것도 하늘의 뜻 같았다.
‘내 손으로… 내 손으로 그놈을 죽일 것이야! 은색 옷을 입은 그놈! 그놈만은 내 반드시 직접 죽일 것이다!’
이를 간 고진은 손에 들린 대나무통 속에서 손톱만큼 약을 떼어내 입으로 가져갔다. 진득하던 약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머지를 긁어오지 못한 것이 한이군. 삼 할 정도는 남았을 텐데.’
너무 급했다. 환기 구멍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바람에 단로의 약을 다 긁어오지 못한 것이다.
어쨌든 하가장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놈이 밀리고 있다는 증거. 이대로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놈이 패할 것 같았다.
‘그놈의 목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겠어! 절대로!’
약이 녹아 뱃속으로 들어가자 뜨거운 기운이 밀려온다.
고진은 어릴 때부터 익혀온 삼양심법을 암송했다.
아버지가 만든 약으로 목숨을 구한 강호의 고수가 대가로 남겨주었다는 심법이다.
그는 그 심법을 이십오 년이나 익혔다. 덕분에 힘을 반 이상 쓴 적이 없는데도 남들은 그를 힘이 장사라고 했다.
아마 자신이 만든 단약을 모두 복용하면 짧은 시일 안에 몸이 견딜 수 있는 최대 한도의 내력이 생길 것이었다. 지나친 복용으로 얼마 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그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네놈의 머리를 내 가족 앞에 바칠 것이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려 귓바퀴에 고였다.
너무도 뜨거워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3
유군명과 엽상만 정문으로 들어가고, 이무환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와룡부의 담장을 넘었다.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어서 경비무사들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수고!”
이무환이 경비무사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고 전각을 돌아가는데, 방양고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가왔다.
“부주께서 잠시 뵙자고 하시오, 대주.”
‘제갈여우가 무슨 일이지?’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한번은 만나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사람이었으니까.
이무환은 광룡대원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서 방양고를 따라갔다.
헌원숭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방양고를 따라 백색 방에 들어가자 저만치 앉아 있는 제갈무진이 보였다.
“어이구, 오랜만입니다, 부주.”
이무환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 모습에 제갈무진이 고소를 지으며 자리를 청했다.
“하긴 천룡전에서 본 지 벌써 이십 일이 넘게 지났으니 오랜만이긴 오랜만이군.”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하하하!”
이무환의 넉살에 제갈무진의 고소가 짙어졌다.
“여긴 전에 들어와 봤을 테니 낯설지는 않을 테고…….”
자리에 앉은 이무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처음 와보는 곳입니다만?”
제갈무진의 입가에서 고소가 사라지고, 눈빛이 깊어졌다.
“몇 가지 물건까지 가져갔지 않은가? 그럼 그건 다른 사람이었나?”
“나원, 대체 제가 무슨 물건을 가져갔다는 말입니까?”
깊어진 제갈무진의 눈에서 싸늘한 기광이 번뜩였다.
“장난도 지나치면 비례가 되는 법이라네. 나는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자넨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군.”
이무환도 웃음을 지우고 나직이 말했다.
“잊겠다고 했는데, 듣지 못했나 보군요. 어차피 잊으려 했으면 모든 것을 다 잊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갈무진의 눈빛이 찰나간 흔들렸다.
“그게… 그렇게 되나?”
“그렇지요. 그러니 저는 이곳에 들어온 적이 없는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하하하!”
다시 넉살 좋게 웃는 이무환이다. 천하의 와룡부주를 말 몇 마디로 흔들어놓고서.
제갈무진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광룡에 대한 소문을 수없이 들었다. 조금 과격하고, 제법 강하고, 약간 똑똑한 머리만 믿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자인 걸로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자네…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군.”
이무환이 씩 웃었다.
“광룡 아닙니까, 광룡! 뭐, 전에는 사람들이 악귀라고 불렀습니다만.”
악귀.
단순히 암흑가의 건달들이 부르는 별명 같은 이름이다. 무인이라면 그 이름을 듣고 가소로워서 실소를 지었을 터였다.
그러나 제갈무진은 그 이름에 이무환이 다르게 보였다.
광룡에 악귀.
잘생긴 것 빼고는 평범하게 보이는 모습 속에 그러한 이름이 나올 정도의 광기와 악기가 숨어 있다는 말이 아닌가 말이다.
광기만 해도 구룡이 골치를 썩고 있는데, 악기마저 뿜어지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걸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두렵기까지 했다.
‘후우, 내가 너무 과민반응을 보이는 건가?’
제갈무진은 그렇게 자신을 다독거렸다.
구룡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자신이 아니던가. 하거늘 일개 광기에 젖은 젊은 놈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잠시 말이 멈춘 사이, 시비가 들어오더니 두 사람 앞에 찻잔을 놓고 차를 따랐다.
그 덕에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힌 제갈무진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험, 내가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어서네.”
이무환은 날름 차부터 마시고는, 차가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말씀하시지요, 부주.”
“자네도 알겠지만…….”
이무환이 척,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더니 찡긋, 한쪽 눈을 감았다.
“저는 절대 모릅니다.”
어이가 없는지 끝내 제갈무진의 입가에 피식, 작은 웃음이 그려졌다.
그 모습을 바라본 방양고의 눈빛이 거세게 떨렸다.
이십여 년 동안 제갈무진을 옆에서 지켜본 그였다. 하기에 제갈무진은 결코 의미 없이 웃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웃음에는 언제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방양고가 아는 제갈무진이었다.
그런데… 그런 제갈무진이 그냥 웃는다.
‘주, 주군께서… 마음을 빼앗겼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이무환을 바라보는 방양고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도 이제 이무환이 두렵게 느껴졌다.
미처 방양고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한 제갈무진이 담담히 말했다.
“나에게 제법 힘을 쓰는 수하들이 있네. 그들 중 마흔여덟 명으로 이루어진 사십팔객이 있는데, 그들을 자네에게 붙여주겠네.”
이무환은 이게 웬 떡이냐 하는 마음이었지만, 겉으로는 시큰둥하니 대답했다.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앞으로 잠풍련의 압박이 더 심해질 거네. 힘이 커져서 나쁠 건 없지 않겠나?”
이무환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밥이야 수룡단에서 줄 테니 밥값이 따로 들어가지는 않을 테고, 방도 남는 게 꽤 되니 그것도 걱정 없고……. 생각해서 주시겠다는데, 받아들이죠 뭐.”
이십 년을 키운 사십팔객을 주겠다는데도 기껏 한다는 말이 밥값 타령이다.
제갈무진의 입가에 다시 웃음이 맺혔다.
그 모습을 보고 속이 탄 방양고는 차만 들이켰다.
‘뭔가가 이상하게 흐르고 있거늘, 부주께서는 의식하지도 못하는 것 같아.’
왠지 불안했다.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방양고는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하고 말았다.
‘원로들과 따로 상의를 해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