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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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41화
141화
2
호화로운 대전을 억만 근의 침묵이 짓눌렀다.
절대 깨질 것 같지 않던 침묵이 깨진 것은, 얼굴에 청색 가면을 쓴 무면검마가 보고를 올린 지 일각이 지나서였다.
“석치상이 제자들과 함께 죽고, 풍아마저 죽었다고? 월마와 창마도 죽고 말이지?”
의제인 석치상과 대제자인 신도연풍이 죽었다. 거기다 련의 핵심 고수인 잠풍십삼마 중 둘을 잃었다.
분노의 화염이 대전을 다 태운다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
그러나 천세도인은 그저 눈썹만 조금 꿈틀거리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지웠다.
“한데도 놈의 부상 상태가 심각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예, 련주.”
무면검마의 무심한 대답에 천세도인의 길고 가느다란 눈썹이 바람도 없는데 흔들렸다.
“그럼 여태 광룡에 대한 정보가 엉터리였다는 말이군.”
광룡의 수하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강했고, 그들 중에는 정보에 없던 고수도 하나 끼어 있었다고 했다.
게다가 나중에는 뜻밖의 인물마저 나타났는데, 신도연풍은 광룡이 아닌 바로 그에게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해도, 광룡의 무위는 자신의 예상 밖이었다.
광룡은 석치상을 죽이기 위해서 상당한 내상을 입었을 터였다. 그런 몸으로 신도연풍과 오마 중 넷을 혼자 상대하고도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이 아는 한, 현 천하에서 그 정도로 강한 자는 삼악을 제외하면 오직 환우사천(寰宇四天)뿐이다.
천중십마와 우내십존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네 사람, 환우사천 말이다.
‘놈이 진정 환우사천만큼 강하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광룡의 강함을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찌 환우사천과 비교한단 말인가.
정말 그 정도 강했다면, 호연청 따위의 밑에서 움직일 일이 없었다. 그리고 진즉 일이 터졌어야 했다.
‘어림없는 소리. 지난 삼백 년래 가장 강하다는 그들과 이제 스물이 갓 넘은 놈을 비교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
천세도인은 강하게 부정하고 무면검마를 직시했다.
세상에서 그만큼 무면검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무면검마 본인뿐일 것이다.
그가 아는 무면검마는 석치상에 거의 비견될 정도로 강했다. 그런 무면검마가 단지 광룡이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냥 물러난 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가 진정 네가 꼬리를 말고 도망쳐야 했을 정도로 강하더냐?”
말투는 담담하지만 비꼼이 역력했다. 그래도 무면검마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물러나지 않았다면 저희들 역시 그곳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광룡에게 최대한의 피해는 입혔을 것이 아니냐?”
무면검마의 무심한 눈이 무저의 늪처럼 깊어졌다.
자신과 도마, 귀검마가 살아 돌아온 게 불만인 것처럼 말한다. 광룡의 팔 하나를 자를 수 있다면, 자신쯤은 죽어도 상관없다는 투다.
하지만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는 것이다. 천세도인이 정말 그런 뜻으로 말했다는 걸.
눈앞에 있는 사람. 선인처럼 보이는 천세도인은 충분히 그런 말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그조차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미미한 부상만 입히고 세 사람이 죽는다면, 본 련의 손해가 아니겠습니까?”
“훗, 네가 본 련의 이익을 다 생각하다니,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세상은 항상 변하지요.”
천세도인은 석치상과 신도연풍의 죽음을 다 잊은 듯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이 무면검마의 변화인 양 얼음처럼 굳은 검은 눈동자로 무면검마만을 바라보았다.
“명심해라. 너 하나의 뜻에 따라 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걸 말이다.”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천세도인의 검은 얼음 같은 눈에 보일 듯 말 듯 물결이 쳤다.
그러나 백 장 깊이 늪 속에서 이는 물결처럼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정식 대책은 아침에 논할 것이다. 그만 돌아가서 쉬어라.”
“그럼.”
무면검마가 돌아서서 대전을 나가자, 뒤쪽에서 한 사람이 휘장을 젖히고 걸어 나왔다. 환비였다.
천세도인은 뒤를 보지도 않고 물었다.
“놈은 들어왔느냐?”
“아직 성안으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 사람을 보내면 놈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두 번의 공격을 받은 자입니다. 그가 제정신이라면 밖에서 오래 지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연히 저희들의 힘을 드러내 호연청을 자극하느니 다음을 기약하는 게 나을 거라는 게 제자의 생각입니다.”
“하긴…….”
천세도인도 그렇고, 환비도 천하제일을 다툴 정도로 영리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결론지어지자 두 번 다시 추가공격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은밀히 사람을 보내서 모든 것을 지워라.”
“예, 사부님. 날이 새기 전에 모든 흔적이 지워질 것입니다.”
천세도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환비를 돌아다보았다.
무면검마를 바라볼 때와는 다르게 약간의 온기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풍아가 죽었으니 이제 네 책임이 더 무거워졌구나.”
“사형의 복수는 제가 반드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깊게 생각할 것 없다. 힘이 없으면 죽는 게 세상이다. 풍아는 힘이 없어 죽은 것뿐이지. 하나… 어쨌든 광룡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죽여야 한다.”
“예, 사부님.”
“그리고 창룡부에 대한 것은 오늘 안에 매듭짓도록 해라.”
“그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환비의 눈 깊은 곳에서 잔잔한 파도가 일었다.
광룡!
그동안 나름대로 조사를 하면서 그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도 부족했다. 좀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했다.
‘광룡이 세상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사부의 마음을 흔들다니.’
환비는 그 사실만으로도 광룡이라는 자를 진정한 자신의 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노인네들 때문에 좀 지루했는데, 그자 덕분에 재미있게 생겼어. 귀조의 연락이 오면 더 재미있겠지?’
광룡대를 살피던 조천에게서 연락이 왔다. 광룡대에 계집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대로 무창에 있다는 말.
‘광룡, 아직 너와 나의 싸움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아마 기대해도 좋을 거야.’
3
일곱 번의 대주천을 마치고 눈을 떴다.
단전도 안정되었고, 공력도 구성가량은 되찾은 듯싶었다. 부푼 혈맥이나 상한 내부 장기도 일단 부기가 가라앉았다.
물론 부기가 가라앉았다 해서 완벽하게 치유된 것은 아니었다. 내상은 본래 단숨에 낫는 것이 아니기에 완치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
‘그나마 이 정도로 그친 것이 다행이야.’
아마 폭령잠마영단이 없었다면, 이 정도의 상태를 되찾기 위해서 열흘 이상은 골방에 꼼짝없이 처박혀 운기를 해야 했을 텐데.
이무환은 자신을 골방에서 꺼내준 고진에게 고마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울렁이는 기분 외에 큰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완벽한 몸을 만든 후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새 새벽어스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곧 몰려나올 터, 그전에 돌아가야만 했다.
‘다행히 추가 공격 할 생각은 없는가 보군.’
멀리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느껴졌었다. 하지만 그들은 수색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적이었다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터. 적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다른 목적 때문에 바빴던지.
“자, 다들 깨어났으면 그만 가지?”
4
구룡성의 서문위사 신기영은 스물두 살로, 동백산의 소문파 비영문의 제자였다.
그는 일 년 전, 사부인 비운객(飛雲客) 오자명이 마정문의 마정삼살에게 죽임을 당하자, 복수를 하겠다면 동백산을 떠나왔다.
그러나 신법 하나만 그럴싸할 뿐 다른 무공은 별 볼일 없는 문파가 비영문이었다. 당연히 신기영도 신법을 제외하면 삼류무사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마도의 일류고수인 마정삼살에게 복수한다는 것은, 토끼가 늑대를 잡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동백산을 내려온 지 십 개월. 결국 현실을 직시한 그는 당분간 복수를 미루고 힘을 키우기로 작정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하지 않던가!
때마침 천하제일성 구룡성에서 무사를 뽑는다는 말이 들렸다. 그는 즉시 구룡성으로 달려왔다. 먹고사는 것도 문제였고, 구룡성의 무사가 되면 복수로 가는 길이 한 걸음 좁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벽은 높았다. 적어도 이류는 되어야 구룡성의 말단 무사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실력으로는 말단 무사도 되기가 힘들었다.
결국 신기영은 눈물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구룡성의 서문을 나섰다.
바로 그때, 구룡성의 고위 간부로 보이는 사람 하나가 그를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성을 한 바퀴 돌아보라고 했다. 전력을 다해서.
그는 이판사판이라는 마음으로 성을 돌았다.
그가 성을 한 바퀴 돌고 오자, 고위 간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고위 간부는 그를 한 사람에게 데려갔다. 그제야 알았다. 그는 고위 간부가 아니라, 단순히 고위 간부와 아는 사람이라는 걸.
어쨌든 그의 입김으로 인해 신기영은 구룡성의 무사가 되었다. 비록 적룡단의 말단 무사였지만.
그리고 두 달이 지난 지금, 그는 서문을 지키는 위사가 되어 이른 새벽에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어야만 했다.
“아함!”
신기영은 기지개를 켜다 말고 눈을 가늘게 떴다.
새벽 어스름을 가르며 빠르게 다가오는 자들이 보였다.
모두 여섯. 어깨 위로 삐죽이 드러난 검병과 허리춤에서 덜렁거리는 도를 보니 무사들인 듯했다.
바라보는 사이 거리가 이십여 장으로 가까워졌다. 그제야 그들의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새벽부터 별 거지 같은 것들이 다 몰려오네.”
여기저기 찢어진 옷, 헝클어진 머리,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태도. 아무리 봐도 삼류무사들이 구룡성에 족적을 남기기 위해 찾아오는 듯했다.
그나마 찢어진 옷의 거무스름하게 변색된 자국이 핏자국처럼 보이지만 않았다면, 오 장 안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소리쳐 쫓아냈을 것이었다.
“같잖은 것들이 어디서 대판 싸우고 온 모양이군.”
여섯 사람이 새벽 어스름을 안고 성문으로 다가오자 신기영이 앞으로 나섰다.
제일 말단인 이상 귀찮은 일은 어차피 자신 몫. 그렇다면 먼저 나서서 점수라도 따는 것이 상책이었다.
신기영은 손가락으로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힘주어 말했다.
“이봐! 저기서 기다리다가 해가 뜨면…….”
하지만 그는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을 닫아야 했다.
분명 이 장 정도 떨어진 것을 보고 입을 열었는데, 고개를 돌리는 사이 갑자기 한 사람이 코앞에 나타난 것이다.
턱!
이무환이 신기영의 어깨를 짚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판 싸운 것은 맞는데, 우리 거지 아니야. 지금 임무 차 나갔다 오는 것이거든? 조용히 말할 때 그냥 좀 들여보내 주면 안 될까?”
“이, 임무……?”
“그래도 말귀가 어둡지는 않군. 맞아.”
이무환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신기영의 어깨를 한 번 탁, 치고 손을 내렸다.
신기영이 이무환의 요모조모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세요? 하고 내가 순순히 속을 줄 알았지? 미친 새끼! 아침부터 개 잡기 싫으니까, 꺼져!”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영호승 등의 눈에는 밀려들던 어스름이 주춤거리고, 하늘을 떠다니던 구름이 움직임을 멈춘 듯 느껴졌다.
신기영이 어깨에 힘을 주고 다시 소리쳤다.
“안 꺼져? 요즘 너처럼 그런 말 하면서 들어가려는 놈이 하나둘인 줄 알아? 어제도 두 놈이나 그런 말 하고 들어가려다가 조장님에게 들켜서 다리뼈 부러졌어, 인마!”
영호승 등은 신기영의 거침없는 말투에 감탄해서 숨이 턱 막혔다.
―오! 저렇게 맞아 죽고 싶은 사람이 있다니!
하지만 신기영은 말투만 용감한 것이 아니었다.
신기영은 검지를 꼿꼿이 펴서 이무환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눈을 위아래로 흘겼다.
“옷이 이게 뭐냐? 달밤에 동네 건달들하고 패싸움이라도 했냐?”
이무환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순간의 충격이 그의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차라리 눈앞에 있는 자가 구룡부의 부주라도 되었다면 한바탕 난리라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문지기였다.
문지기하고 멱살 잡고 싸워봐야 자신을 좋게 볼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저 문지기만 불쌍하게 생각할 뿐.
이무환은 정말 오랜만에 성질을 죽이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기 말이지……. 당신은 내가 누군지 모르나 본데…….”
“뚝! 더 말하면 정말 다리 부러져도 책임 못 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