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3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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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85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35화
135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 이유를 아는데도 그러한 생각을 인정하기가 싫은 것일지도 몰랐다.
‘꼬맹이여우가 뭐가 좋아서…….’
이무환은 공손척을 만난 주루에 도착할 때까지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뒤를 따라가던 영호승 등은 갑자기 심각해진 이무환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주기 싫어서 그러나?’
‘안 주면 어쩔 수 없지.’
‘내가 먼저 달라고 하지는 말아야지.’
공손척은 이무환이 나타난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입구에 서 있던 이무환은 굳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공손척이 몸을 일으키자 몸을 돌렸다.
“무슨 일 있었나?”
왠지 굳은 표정. 주루를 나선 공손척이 물었다.
이무환은 속이 텅 빈 것처럼 쓰리고 아릿했지만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별일 아닙니다. 그냥 좀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럽니다.”
영호승 등 네 사람은 흠칫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시 말 안 하길 잘했어.’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자시가 넘어서인지 성문은 꽉 닫혀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나갈 수 없소.”
성문을 지키는 군졸 중 하나가 창으로 이무환의 앞을 막으며 눈에 힘을 주었다.
아무리 무사들이라 해도, 성 안에서 군졸인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있으랴 하는 자신감에 찬 행동이었다.
평상시라면 몇 마디 말로 그들을 설득했을 이무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분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이무환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창대를 톡, 쳤다.
땅!
창대가 부러지고, 창날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좀 나가자니까?”
멍하니 부러진 창을 바라보던 군졸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다른 네 명의 군졸은 감히 막을 생각도 못한 채 한쪽으로 비켜났다.
이무환은 그들을 보지도 않고 성문을 향해 다가갔다.
성문에는 장군목이 빗장처럼 가로질러 놓여 있었다.
성문 앞에 멈춰선 이무환은 장군목을 가볍게 밀었다.
빠직!
그날, 광룡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창성 동문의 장군목이 사십 년 만에 수명을 다하고 부러져 버렸다.
묵묵히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바라보던 공손척의 눈이 좁혀졌다.
‘광룡이라더니, 정말 성격을 종잡을 수가 없군.’
영호승 등 네 사람은 바짝 긴장했다.
‘저러다 악귀 성질이 나오는 거 아냐? 아무래도 날 샐 때까지 조심해야겠어.’
그사이 성문을 활짝 연 이무환이 뒤를 향해 소리쳤다.
“뭐 해? 안 갈 거야?”
올 때에는 듬성듬성 떠 있던 구름이 어느새 하늘을 뒤덮었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지자 구룡성으로 향하는 길이 검게 물들었다.
하늘도, 땅도 검게 물든 길. 멀리서 물새 소리만이 들려온다.
“후우우읍.”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길게 들이쉰 이무환은 어깨를 폈다.
이제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그래, 내가 꼬맹이를 좋아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아.’
그런데 그럴 경우 옥이가 문제였다. 꼬맹이와 함께 돌아가면 옥이가 순순히 받아줄까?
“에휴휴…….”
그 생각을 하니 다시 어깨가 축 처졌다.
터벅, 터벅.
이무환이 힘없이 걸음을 옮기자 속도 모르는 공손척이 물었다.
“어디 몸이 안 좋은가?”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거려 죽겠수.’
“동생을 남겨놓고 온 게 마음에 걸리나?”
푹! 공손척이 이무환의 심장을 제대로 찔렀다.
‘윽, 이 양반이!’
이무환의 가늘어진 눈이 공손척을 향했다.
영호승은 그런 이무환을 힐끔 쳐다보고 고개를 돌렸다.
어렴풋이 이무환의 증세를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자신이 겪은 증세와 비슷했다.
‘그랬군, 그랬어! 우흐흐흐…….’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 모습이 겉으로 조금 드러난 듯했다. 이무환이 영호승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멋쟁이, 지금 웃는 거야?”
“어찌 제가!”
“정말 아니야?”
“물론입니다, 총대주!”
이무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못 믿겠다는 표정.
영호승은 등줄기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숨을 멈췄다.
영단은 나중 문제였다. 여차하면 지옥행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막위와 단우경, 혁수린까지.
‘일단 영단을 포기한다고 할까?’
그럼 광룡의 기분이 바뀔지도 모르는데.
‘아니면 다시 돌아가서 남궁 소저를 데려오자고 해?’
어쩌면 그게 더 좋은 방법일지도 몰랐다.
바로 그때, 공손척이 전면을 노려보며 코웃음을 쳤다.
“훗, 적인가?”
동시에 전면에서 북풍한설보다 더 싸늘한 기운이 어둠을 가르며 빠르게 밀려들었다.
영호승이 눈을 치켜떴다.
그는 위기를 벗어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앗! 총대주, 적입니다!”
번개처럼 검을 뽑아 든 그는 앞으로 튀어나갔다.
막위와 단우경, 혁수린도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고 영호승을 뒤따랐다.
이무환은 영호승이 벼락처럼 튀어나가자 스윽, 주위를 둘러보고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놈들, 자신 없으면 그냥 계속 숨어 있지, 나서기는…….”
무창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적의 기운을 느꼈다. 상당히 강한 기운이었다.
모두 십여 줄기. 그중 하나는 절대의 기운이었다.
이무환은 그걸 알고도 별말 없이 이곳까지 걸어왔다.
피해봐야 쫓아올 것이 분명한 일, 귀찮게 피하느니 맞서서 때려잡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그들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때맞춰서.
“하긴, 기분도 착잡한데 잘됐군.”
이무환은 품속에서 뇌정갑을 꺼내 두 손에 끼었다. 절대고수가 끼어 있는 암습자들. 기분을 풀기에는 적당한 상대였다.
스스스스…….
잠깐 사이, 회오리바람이 일듯 여섯 사람을 감싼 채 기의 폭풍이 휘돌았다.
영호승 등이 먼저 폭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무환은 손에 딱 달라붙은 뇌정갑을 쓸어만지며 경고를 주었다.
“조심해. 보통 놈들이 아니니까.”
예전의 네 사람이 아니다. 지옥을 넘나드는 수련과 폭령잠마영단 덕에 초연십이식과 관천일연심법이 하나가 된 터였다.
더구나 칠흑 같은 어둠이 그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문제는 상대 역시 단순한 암습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강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해도, 현재 움직이는 자들만도 절정에 이른 무위를 지닌 자들이었다.
어둠이 아니라면 영호승 등이 일대일로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고수들.
그래도 이무환은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언제 어떤 자들을 만날지 모른다. 힘들더라도 이제 저 정도의 적은 스스로 물리쳐야 했다.
좀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벽을 깨야 하는 것이다.
쩌저저정!
어둠이 찢어지는 소리가 십여 번 연속으로 울렸다.
갈기갈기 찢겨지는 어둠 속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신음!
“으음…….”
일순간 밀려들던 폭풍이 주춤했다.
영호승 등은 놓치지 않고 찰나의 틈을 파고들었다.
또다시 어둠이 부서지며 적들 중 둘이 비칠거리며 물러섰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이었다. 적들의 수는 아홉, 그들이 둘씩 짝을 지어 연수 합공을 펼치자 영호승 등도 더 이상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오히려 적들의 수가 많아 뒤로 밀려날 판이었다.
공손척이 나선 것은 그때였다.
스르릉.
넉 자에 이르는 장검을 꺼내 든 공손척은 전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에 일곱 자.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그는, 어느 순간 쏘아진 살처럼 전면의 어둠을 덮쳤다.
그가 합세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뇌성벽력처럼 떨어져 내리는 그의 검격은 무겁고도 강력했다.
일검 일검에 만 근의 힘이 실린 듯했다.
쾅! 콰광!
검보다 도가 더 중병인데도 부러질 듯이 휘어지며 튕겨지는 것은 적들의 도였다.
그나마도 두 번 연이어 부딪친 자들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억눌린 신음, 뿜어지는 시커먼 핏줄기, 비릿한 혈향!
순식간에 두 사람이 피를 뿌리며 무너졌다.
공손척으로 인해 상황이 급변하자 어둠 저쪽에서 한 사람이 신형을 날렸다. 석치상의 대제자 능조염이었다.
공손척도 그의 강함을 알고 검의 방향을 바꾸었다.
일순간, 두 사람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상대를 이기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장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찰나간 검과 도가 무식하리만치 정면으로 부딪쳤다.
쾅!
어둠을 뒤흔드는 굉음!
그것이 시작이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두 사람의 검과 도가 어둠을 난자하며 다섯 번을 부딪쳤다.
단순히 쇠와 쇠가 부딪치는 것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 은은한 광채가 뿜어내는 검과 도다. 처음에는 미미하더니, 다섯 번째 격돌이 이어질 즈음에는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떠더더덩!
출렁이는 어둠, 비틀리는 대기!
세 걸음을 물러선 공손척은 검을 앞으로 뻗었다.
장대한 체구에 기다란 검. 그에게서 천장(天將)의 기세가 뿜어졌다.
“네놈들은 누군데 암습을 하는 것이냐?!”
이 장 뒤로 튕겨진 능조염은 대답 대신 치켜든 도를 사선으로 내렸다.
순간 그의 도첨에서 튀어나온 도강이 어둠을 뚫고 번쩍였다.
천중십마 중의 한 사람, 구유마도 석치상의 대제자가 바로 그다. 광룡도 아니고, 광룡의 수하(?)에게 밀렸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듯 그의 부릅뜬 눈에선 살광이 쏟아졌다.
한편, 이무환은 공손척의 가세로 영호승 등의 숨통이 트이자, 그 자리에 선 채 격전장의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어둠 저편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의 한가운데, 한 자루 칼을 등에 매단 노인이 있었다.
이무환이 그의 정체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적들은 도를 쓰고 있다. 모두 비슷한 도법이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절대의 도객.
이무환은 공손척이 상대의 정체를 묻자 말문을 열었다.
“구유잔백도. 구유마도 석치상이라는 노인네가 직접 왔소.”
능조염과 마주 서 있던 공손척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구유마도가 구룡성의 일에 끼어들었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천중십마 중 한 사람이 직접 암습자를 이끌고 왔다는 것은 믿기가 힘든 일이었다.
그는 슬쩍 눈을 들어 어둠 속을 응시했다.
상대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노인. 그의 몸에서 서서히 피어오르는 기운이 어둠을 밀어내는 듯 느껴졌다.
절대의 기운!
숨이 턱 막혔다.
‘맙소사! 정말 석치상이 직접 왔단 말인가?!’
그의 의문에 답하듯 석치상이 입을 열었다.
“본좌에게 노인네라… 광룡이라는 이름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니구나.”
노기가 섞인 목소리다. 이무환은 두 주먹을 쥐었다 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를 죽이려고 왔나 보죠?”
“알았으면 되었다.”
“그럼 잔소리는 저승 가서 하고 칼이나 빼쇼.”
‘빼’라는 말이 나옴과 동시, 이무환의 신형이 죽 늘어나며 어둠을 건너뛰었다.
찰나간에 두 사람의 거리가 지척이 되었다.
“건방진 놈!”
석치상의 양옆에 있던 두 사람, 구유쌍마도(九幽雙魔刀)가 도를 빼 들고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이무환은 멈추지 않고 그들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투둥!
활시위 튕겨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두 줄기 붉은 구슬이 어둠을 뚫고 날아갔다. 홍옥지가 펼쳐진 것이다.
구유쌍마도는 눈을 홉뜨고 칼을 휘둘러 홍옥지를 쳐냈다.
따당!
제갈신걸조차 쉽게 맞받지 못하는 홍옥지다. 구유쌍마도는 제갈신걸보다 강하다고 볼 수 없는 자들.
홍옥지를 쳐낸 구유쌍마도의 칼이 파르르 몸서리치며 울어댔다.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은 통증!
가까스로 칼을 놓치지 않은 구유쌍마도가 멈칫한 사이, 이무환의 신형이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어둠 속에서 암영무류가 펼쳐지자, 이무환의 움직임은 유령이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의 도에서 펼쳐진 도영이 허공을 가득 메운 채 이무환의 환영을 난자했지만, 사오 초가 지나도록 허공만 갈라졌다.
그렇게 오 초가 지날 무렵이었다.
두 사람 사이를 유령처럼 유영하던 이무환의 손이 수십 개의 환영을 만들어내며 휘돌았다.
사자탄의 일곱 가지 무공 중 하나, 천수탄(千手灘)이었다.
베어도 베어도 끊임없이 밀려드는 수영에 구유쌍마도가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바로 그때다. 이무환의 손그림자 하나가 도영 사이를 파고들며 대마의 오른손 팔목을 움켜쥐었다.
우두둑!
일순간, 대마의 팔목이 마른 가지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거꾸로 꺾였다.
“크억!”
입을 떡 벌린 대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옴과 동시, 이무환의 우수가 대마의 심장에 닿았다 떨어졌다.
퍽!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대마의 몸이 이 장 밖으로 날아갔다.
이무환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곧바로 이마를 덮쳤다.
“내가 오늘 기분이 좀 좋지 않아! 재수 없었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