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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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76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33화
133화
5
술시 무렵의 무창성은 불야성이었다.
이무환과 남궁산산은 이제 막 촌구석에서 올라온 촌놈들처럼 두리번거리며 무창성의 대로를 걸었다.
“와아! 저번에 왔을 때랑은 완전히 다르네요. 그죠, 오빠?”
“밤이니까.”
“어머? 저 여자들 봐요. 정말 예쁜 군(裙:치마)을 입었어요. 위에 걸친 비갑(緋甲:갑옷처럼 생긴 비단으로 만든 겉옷)도 멋지고. 어머어머… 저 여자들은 속이 보일 것처럼 옷이 너무 얇아요.”
이무환이 가자미눈으로 남궁산산이 바라보는 곳을 훔쳐보았다.
붉고 푸른 등이 걸린 홍루 청루가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 안쪽에서 여인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옷이 불빛에 투과되는 바람에 몸의 윤곽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항주에서도 몇 번 홍루나 청루 근처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낮이어서 별반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밤늦게 보니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우와!’
마음 같아서는 천천히 골목을 지나가고 싶었다. 천천히 구경하면서. 그러나 지금은 여유를 부리며 구경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이무환은 아쉬움을 접고, 별것 아니라는 표정을 지은 채 수하점으로 향했다.
“볼 것도 없는데, 빨리 가자.”
“헤헤, 오빠는 역시 대단해요. 둘째 오빠는 저런 여자들을 보면 눈이 휘둥그레져서 침을 흘리며 덤벼들던데.”
‘아마 지금은 함부로 그러지 못할 거다. 그랬다가는 나에게 맞아 죽을 테니까.’
그 뒤를 영호승 등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따라갔다. 이무환과 일행이 아닌 것처럼 거리를 조금 더 벌린 채.
그렇게 대로를 지난 여섯 사람이 용강통으로 가기 위해 북쪽으로 걸음을 틀었을 때, 남궁산산이 막 문을 닫기 직전의 포목점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오빠, 저기 아직도 문 안 닫았네요. 저기서 옷 사요.”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한다는 것이 자신의 신조가 아닌가.
이무환은 쓸데없이 돈을 쓰는 것 같아 아까웠지만, 겉으로는 호쾌하게 소리치며 조금도 아깝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까? 가자! 앞장 서!”
“예, 오빠!”
남궁산산은 이 옷을 걸쳐 보고, 저 옷을 걸쳐 보고, 이십여 벌의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며 옷을 골랐다.
주인은 문을 닫지도 못한 채 남궁산산이 옷을 고를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
바로 옆과 문밖에 칼 찬 무사들이 다섯이나 있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새 옷을 걸친 남궁산산의 모습이 선녀처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남궁산산이 마지막 옷을 집어 들자, 주인은 재빨리 열 벌의 옷을 더 가지고 나왔다.
“헤헤헤. 아름다운 소저, 이것도 한번 입어보시는 게…….”
이무환은 주인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남궁산산을 재촉했다.
“아무거나 빨리 골라라. 이러다 날 새겠다.”
결국 남궁산산은 연녹색의 치마와 겉옷을 골랐다. 포목점에 들어간 지 반 시진 만이었다.
이무환은 물론이고, 영호승 등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포목점을 나섰다.
다시는 여자 옷 사는 데 따라가지 말아야지! 일제히 그런 표정을 지은 채.
“두 벌 샀으면 기다리다 지쳐 죽을 뻔했다. 뭔 놈의 옷을 그렇게 오래 고르냐?”
이무환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어도 남궁산산은 즐겁기만 했다.
“오빠, 우리 뭐 먹고 가요. 응?”
“저녁 먹었잖아?”
“아이, 저녁을 조금밖에 안 먹어서 배고프단 말이에요.”
‘이 여우가 어쩐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하더라니…….’
하지만 어쩌랴. 배가 고프다는데.
“좋아, 그럼 용강통으로 가서 먹자.”
영호승 등도 오랜만에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삼 장의 거리를 이 장까지 좁혀서 따라갔다.
혹시 알아? 술이라도 한잔 얻어먹을 수 있을지.
얼마를 가자 용강통이 보였다.
그곳도 낮에 왔을 때와는 풍경이 많이 달랐다.
홍등 청등이 사방에 널려서 세상이 온통 빨갛고 파랗게 변해 있었다.
앞선 두 사람은 여전히 촌놈처럼 여기저기 힐끔거리며 용강통으로 들어섰다.
‘쩝, 홍루와 청루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볼 좋은 기횐데, 꼬맹이를 데리고 들어갈 수도 없고…….’
다행히 홍등 청등이 달리지 않은 주루의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문이 활짝 열린 주루를 바라보던 이무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저기서 먹자.”
말이 떨어지자마자 남궁산산이 뽀르르 주루로 들어갔다. 순간 주루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입구로 쏠렸다.
술에 취한 용강통의 사람들은 입구에 들어선 남궁산산을 보고 한마디씩 했다.
“저거 남자야, 계집이야?”
“눈알이 개눈깔이냐? 보면 몰라?”
“복잡하게 뭘 따져? 벗겨보면 알지.”
“킬킬킬. 맞아, 그러면 되겠군.”
“근데 저 보따리는 뭐야? 선물인가?”
취객이라면 남궁진을 찾아다니며 질리도록 경험해 본 남궁산산이다. 그녀는 취객들이 뭐라 떠들든 말든 적당한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사이 이무환이 들어와 남궁산산을 스쳐 갔다.
“나 따라와.”
남궁산산은 절대명령이라 받은 것처럼 이무환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그런데 두 개의 탁자를 지나갈 때였다. 누군가가 손을 뻗어 남궁산산의 손목을 붙잡았다.
“너 계집 맞지? 이리 와라. 나하고 놀자.”
삼십대의 텁석부리 장한이었다. 장한은 음충맞은 웃음을 지으며 남궁산산의 팔을 잡아당겼다.
순간, 뚝!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장한이 입을 딱 벌리고 비명을 내질렀다.
“크억! 이 계집이……!”
남궁산산은 장한의 부러진 팔을 털어내고 한기가 풀풀 날리는 표정을 지었다.
“목을 부러뜨리려고 했는데, 오빠 때문에 참은 거야. 운 좋은 줄 알아.”
같은 자리에 앉았던 두 명의 장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미친 계집이 어디서……!”
“죽고 싶어 환장했나? 우리가 누군 줄 알고……!”
두 사람이 앞 다투어 소리치자 주루 안이 조용해졌다. 마치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표정들이었다.
순간 바로 뒤따라 들어온 영호승이 척, 장한의 어깨에 검을 검집째 얹었다.
“움직이면 진짜 목뼈 부러진다.”
막위가 도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씩 웃었다.
“도끼로 이마를 두 쪽 내기 전에 그냥 앉아.”
그때 앞서 가던 이무환이 돌아서서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사정 봐주니까 귀찮게 덤비잖아. 다음에는 다리까지 부러뜨려. 양쪽 다. 죽이면 귀찮아질지 모르니까, 목뼈는 놔두고.”
“예, 오빠.”
남궁산산이 상냥(?)하게 대답하고는, 몸이 굳은 두 장한을 직시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일어섰던 두 장한은 등골이 오싹한 한기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직도 볼일 남았어? 없으면 앉아서 술이나 마셔.”
장한들의 귀에는 남궁산산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나찰의 목소리보다 더 두렵게 들렸다. 엉거주춤 자리에 앉은 두 장한은 눈을 돌리고 손을 잘게 떨었다.
그제야 남궁산산이 다시 밝게 웃으며 이무환의 뒤를 쫄랑거리며 따라갔다.
이무환이 그런 남궁산산을 흘겨보며 혀를 찼다.
“쯔쯔쯔. 그러게 조심하라니까, 왜 그렇게 방정 맞냐?”
“나도 오빠 닮아가나 봐요. 헤헤헤.”
“요게! 헛소리 말고 따라와. 저쪽에 자리 비었으니까.”
이무환이 찾아간 자리는 열 명이 앉아도 충분한 커다란 탁자였다. 그리고 그 옆 탁자에는 달랑 한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큰 키와 그에 어울리는 기다란 장검을 등에 멘 사십 전후의 중년 무사.
남궁산산은 힐끔 그를 바라보고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영호승 등도 그를 스치듯 바라보고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점소이가 달려왔다.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처음서 끝까지 지켜본 점소이는 이무환과 남궁산산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주문을 받았다.
“뭘… 드시겠습니까?”
이무환이 입을 열기도 전에 남궁산산이 음식을 주문했다.
“음, 당초리어(糖醋鯉魚)하고 내탕환자(쵇湯丸子), 동파육(東坡肉)을 여섯이 먹을 수 있을 만큼 적당히 줘요. 그리고 소흥주(紹興酒) 있나요? 가반주(加飯酒)가 있으면 좋겠는데.”
완자탕인 내탕환자이나 동파육은 그저 그렇지만, 살아 있는 잉어로 요리하는 당초리어는 제법 비싼 요리다.
“잠깐…….”
이무환은 주문을 바꾸기 위해 손을 반쯤 쳐든 채 멈칫했다. 남궁산산의 입에서 소흥주라는 말이 나옴과 동시였다.
소흥주는 절강 소흥현의 특산으로, 이무환이 항주에 있을 때 몇 번 마셔본 술이었던 것이다.
항주에서 이천 리나 떨어진 무창에 소흥주가 있다니, 이무환은 우선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다.
“흐음, 소흥주라……. 그것도 괜찮지.”
“소흥가반주라면 보름 전에 들어온 것이 조금 남았을 것입니다요. 한번 찾아봅죠.”
남궁산산이 용강통에서는 고급으로 통하는 요리와 술을 시키자, 점소이는 넙죽 허리를 굽혔다. 그러고는 행여나 주문을 바꿀까 싶었는지 잽싸게 돌아섰다.
“헤헤. 오빠, 내가 너무 무리하게 시킨 것 아냐?”
남궁산산이 장난스럽게 웃는다.
이무환은 ‘그까짓 거!’ 하는 표정을 지으며 호쾌하게 대답했다.
“하, 하! 그 정도야 뭐!”
그러고는 옆을 바라보며 물었다.
“노형, 괜찮으시다면 함께 한잔하시지 않겠습니까?”
옆에 앉아 있던 중년인은 기광을 반짝이며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들어올 때부터 신경이 쓰였다.
장한의 팔을 부러뜨린 어린 소녀, 네 명의 무사, 그런 소녀에게 다음부터는 다리까지 부러뜨리라는 말을 침 뱉는 것보다 더 쉽게 내뱉는 청년.
그들이 평범하게 보이면 그것이 더 이상했다.
그런데 빈자리가 있는데도 곧바로 자신의 옆자리에 앉더니, 이제는 갑자기 합석하자고 한다.
중년인은 탐색하는 눈으로 이무환을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나를 아나?”
“처음부터 알고 지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제부터 알면 되지요.”
차분하고 예의 바른 말투. 조금 전 소녀에게 말한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의문일 정도다.
“나는 합석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네.”
“거참, 좋은 안주와 술이 있으면 함께 먹고 마실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렇게 까다롭게 구십니까? 이리 오쇼.”
조금 삐딱한 말투. 중년인은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으로 이무환을 빤히 바라보았다.
“싫네. 그러니 일행들과 함께 먹게나.”
그때 조용히 앉아서 중년인을 세세히 살피던 남궁산산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오빠, 놔둬요. 공손 대협은 저희와 함께 앉기가 싫으신가 봐요.”
순간 중년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를 알고 있었군.”
하지만 이무환은 남궁산산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꼬맹이 너, 이 양반이 누군지 아냐?”
막 이무환을 다그치려던 중년인의 눈도 남궁산산을 향했다.
남궁산산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이무환을 흘겨보았다.
“육 척이 넘는 큰 키, 일반 검보다 한 자는 더 긴 장검, 철사자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냉막한 표정, 부러져 살짝 꺾인 콧등. 생각 안 나요? 더 말해줘요?”
이무환이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불쑥 이름 하나를 뱉어냈다.
“와룡무정객 공손척?”
그러더니 홱 고개를 돌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중년인, 공손척의 위아래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가 맞군.”
공손척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하에서 자신의 이름과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열 명도 채 되지 않는다. 하거늘 눈앞에 있는 두 남매가 누구기에 자신의 이름을 안단 말인가.
“자넨 누군가?”
싸늘해서 살기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인데도 이무환은 태평하게 씩 웃으며 앞자리를 가리켰다.
“이리 오쇼. 멋쟁이, 자리 좀 비켜줘.”
이무환의 맞은편에 앉았던 영호승이 옆쪽으로 비켜 앉았다.
‘저 자리에 앉으면 가르쳐 주겠다는 건가?’
사람을 놀리는 것 같으면서도 너무나 태연하게 말하니 듣는 사람이 곤혹스런 지경이다.
‘좋아, 일단은 따라주지.’
공손척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위무사로 보이는 자들이 제법 강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자신의 적수는 아니었다.
여차하면 목을 베어 입을 막아버리면 될 일, 가지 못할 것도 없었다.
공손척이 자리를 옮겨 앉자, 이무환이 탁자에 두 팔을 얹고 머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마치 비밀스런 이야기라도 할 것처럼.
남궁산산은 싱글벙글 웃으며 바라보고, 공손척은 탁자 밑으로 내린 손을 두어 번 쥐었다 폈다.
‘저 꼬마 계집은 누군데 저리 태평한 거지?’
자신을 알아봤다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 것이 아닌가.
공손척이 남궁산산의 정체를 궁금해 하고 있을 때 이무환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