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32화
무료소설 광룡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32화
132화
이무환이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엽상이 넌지시 물었다.
“왜 밤에 가려고 그러십니까? 내일 날이 밝은 후에…….”
이무환은 손을 척 들어 엽상의 입을 막았다.
“이런 일은 머뭇거려서 좋은 게 없어. 더구나 몰래 움직이려면 아무래도 아침보다 밤이 낫지.”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밤새 잠 못 자고 시달리기 싫다는 것.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정말로, 진짜로 꼬맹이가 염려되어서였다. 남들이야 믿든지 말든지.
‘내일부터 놈들의 공세가 시작될 것이야. 숨겨놓았던 힘을 드러내면서 말이지. 그러면 꼬맹이를 데려다 줄 시간이 없어.’
아닐 수도 있었다. 광룡대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밖으로 나가려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 때문이었다.
“눈발은 이쁜이 입술이나 닦아주면서 기다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고.”
엽상은 얼굴이 벌게지고, 종리난경은 눈을 흘기며 몸을 돌렸다. 그때 한쪽에 서 있던 무설강이 다가왔다.
“나도 함께 갔으면 싶네만.”
“형님은 이곳에서 남은 사람들을 이끌어야죠. 다 가면 광룡대는 누가 지킵니까?”
언제는 내가 지켰나? 무설강이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사이 제갈신걸이 나섰다.
“그럼 나는 어떻……?”
이무환이 제갈신걸의 말을 단칼에 잘라먹었다.
“뇌고자는 형님을 도와줘야지.”
그러고는 둘러선 사람들을 돌아다보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내가 무창에 가는 것은 비밀이니까, 절대 말하면 안 됩니다.”
무설강, 제갈신걸, 엽상, 종리난경.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어이가 없었다. 광룡대 사람 다 들으라는 듯 소리치고 나온 사람이 누군데, 이제 와 비밀이라니!
어디 그뿐인가?
“만일 누가 알게 되면,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범인이 있는 거요.”
다물어진 입이 절로 벌어질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나중에라도 그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무환은 그렇게 몇 마디로 사람들의 입을 봉해놓고 씩 웃으며 돌아섰다.
“나는 너무 철저해서 탈이란 말이야. 자, 가자.”
그러더니 정문으로 가지 않고 담을 훌쩍 넘었다.
남궁산산도 커다란 보따리를 멘 채 이무환의 뒤를 따라 담을 넘어가고, 행여나 놓칠까, 영호승 등도 부리나케 그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잠시 후. 적룡단 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앗! 도둑놈들이다! 도둑놈들이 담을 넘었다!”
“구룡성에서 도둑질을 하다니! 저 미친놈들을 잡아라!”
무설강은 잠시 그쪽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우리는 모르는 일이네. 그러니 자네들도 들어가서 쉬게.”
당연히, 이무환과 남궁산산의 외출은 비밀(?)로 처리되어야만 하는 일. 세 사람도 안으로 들어갔다.
“하긴 비밀이니까…….”
누구도 광룡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2
“제기랄!”
이무환은 먹다 만 땡감을 뱉듯 한 소리 내지르고는, 눈을 홱 돌려 남궁산산의 등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보따리를 좀 줄이라고 했잖아? 보따리만 아니었어도 도둑으로 몰리지는 않았을 거 아냐?”
남궁산산은 입만 삐죽이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기회다 싶었는지 이무환이 계속 공격했다.
“도대체 무슨 놈의 보따리가 그렇게 커? 이사라도 가는 거야?”
“별로 안 큰데…….”
“반만 줄였어도 저들이 도둑이라고 하지 않았을 거다.”
남궁산산이 더 참지 못하고 눈을 새초롬하게 치켜떴다.
“옷을 사주면 줄인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돈 없다면서요?”
이무환은 바로 대꾸하지 않고 걸음을 빨리했다.
“가자, 무창까지 가려면 한참 가야 하니까.”
“피이, 할 말 없으면 꼭 말을 돌려.”
남궁산산은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종종걸음으로 이무환의 뒤를 바짝 따라가 팔짱을 꼈다. 뒤따라오는 영호승 등이 보든지 말든지.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무환은 힐끔 남궁산산을 내려다보았다.
달빛에 남궁산산의 하얀 얼굴이 밝게 빛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즐거움만 가득한 남궁산산이다.
‘가만, 전보다 키가 더 큰 것 같은데? 언제 컸지? 어제만 해도 이렇게 안 컸던 것 같은데…….’
더구나 팔에 와 닿는 감촉도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가슴도 더 커진 것 같고…….’
문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냥 하루 더 재우고 내일 나올 걸 그랬나? 그냥 돌아갈까?’
남궁산산의 잠버릇을 생각할 때, 잘하면 가슴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정말 커졌는지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텐데.
다시 돌아간다 해서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저기… 꼬맹아…….”
“왜요, 오빠? 옷 사주시려고요? 돈 없다면서요?”
이무환은 남궁산산을 째려보며 툭 쏘아붙였다.
“누가 돈 없다고 했냐? 아껴야 한다고 했지.”
“옥이 언니 옷 같았으면 두말 않고 샀을 걸요?”
“그거야 당연하지.”
“쳇!”
남궁산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걸음만 옮겼다.
이무환은 몇 번 더 입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돌아가자는 말은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꼬맹이가 걸핏하면 삐치기나 하고 말이야. 옥이 같으면 저렇게 삐치지 않을 텐데…….’
그런데 말없이 걷자니 이무환이 먼저 심심해졌다.
무창성이 저만치 보이자 이무환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한 벌만 사줄게.”
달빛 아래 환한 복숭아꽃이 피었다.
“정말요?”
“그래.”
“음흐흐흐……. 헤헤헤…….”
남궁산산이 괴이한 웃음을 흘리며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당연히 가슴의 감촉도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몸이 구름 위로 붕 뜬 기분이 들었다. 걸음도 더욱 가벼워졌다. 돈 아깝다는 생각도 멀리멀리 날아가 버렸다.
‘한 벌 더 사줄까? 그런데… 음, 역시 커지긴 커졌어.’
여섯 사람은 그렇게 달빛을 받으며 무창까지 걸어갔다.
기다랗게 늘어진 그림자만 남긴 채.
3
능조염은 구유마도 석치상의 대제자로, 석치상의 명을 받아 광룡대를 감시하는 구유도문의 제자들을 총괄했다.
그가 광룡의 외출을 안 것은 적룡단의 소란이 잦아든 후였다.
설마 자신의 거처를 나오면서 담을 넘을 줄이야!
그나마도 눈치 빠른 신룡부의 무사 하나가 적룡단의 소란을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재빨리 적룡단으로 달려가 도둑이 광룡대 쪽에서 넘어왔다는 것을 알아내지 않았다면 몰랐을 뻔했다.
마침 외성에 머무르고 있던 그는 보고를 듣자마자 즉시 석치상에게 사제 하나를 보냈다. 그러고는 대동했던 구유도문의 제자들을 데리고 구룡성을 빠져나갔다.
그는 무창성을 삼 리 정도 남겨놓은 곳에서, 덩치가 엄청나게 큰 괴인과 함께 가는 다섯 사람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천외광룡……!’
능조염은 무창성으로 다가가는 여섯 사람의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술시가 다된 시간,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길에 여섯이 걸어간다. 그중 커다란 덩치와 함께 앞장서서 걷는 자가 광룡인 듯했다.
걸어가는 모습에 너무 여유가 넘치고, 걸음걸이도 구름 위를 걷듯 가벼웠다. 경지에 이른 고수의 걸음걸이.
자신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가 광룡일 것이 분명했다.
어둠 속에 몸을 감춘 능조염은 사부인 석치상이 오기를 기다렸다.
광룡이 정말로 헌원숭보다 강하다면 자신과 사제들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더구나 뒤따라가는 네 사람과 커다란 덩치 역시 만만치 않아 보였다.
욕심을 내기에는 처한 상황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광룡과 광룡사위. 음, 그런데 저놈이 누군지 모르겠군.’
능조염의 눈이 커다란 덩치를 향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 머리는 보이지 않았지만, 커다란 몸집(?)만으로도 위압적이었다.
광룡과 나란히 움직이는 자라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자일 터. 무리한 공격은 자칫 사제들을 죽음으로 내몰 뿐이었다.
잠시 상황을 판단하는 사이 여섯 사람이 성문 앞으로 다가가는 게 보였다.
그때 그의 뒤로 소리 없이 네 사람이 다가왔다.
돌아선 능조염의 허리가 깊숙이 숙여졌다.
“오셨습니까, 사부님.”
석치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으로 들어가는 여섯 사람의 뒤를 바라보며 이마를 좁혔다.
성안까지 쫓아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좀 더 좋은 기회를 노릴 것인가.
하지만 생각은 길지 않았다. 장애물이 많은 곳에서 공격하다 놓치면 일만 커질 뿐이었다.
“아무래도 놈이 밖으로 나온 후를 노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조염. 아이들과 함께 쉬면서 대기해라.”
“놈이 날 새기 전에 나오겠습니까?”
“무슨 일로 무창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구룡성을 떠날 게 아니라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자리를 오래 비워둘 만큼 구룡성의 상황이 한가하지 않으니까.”
구룡성주 선출일이 하루 당겨져서 사흘 남았다. 현재 구룡성의 분위기는 칼날 위를 걷는 거와 같았다.
호연청의 손발처럼 움직이는 광룡이 하룻밤을 밖에서 보낼 만한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곧 련주가 보낸 사람들이 올 것이다. 그들에게는 오 리 밖에서 기다리라고 해라.”
고개를 들던 능조염이 멈칫했다.
“굳이 그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석치상의 입가로 싸늘한 조소가 스쳤다.
“그래서 기다리게 하는 거다. 광룡의 목은 우리 몫이니까.”
능조염의 입가에도 가느다란 웃음이 번졌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4
“광룡이 일행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고? 그것도 몰래?”
항상 담담하던 환비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렇습니다, 공자.”
“몇 명이나 나갔지?”
“구유도문의 제자가 보내온 말에 의하면 여섯이라 합니다.”
광룡이 몰래 어딜 가는 걸까? 나간 이유는?
환비는 눈을 좁힌 채 계속 질문을 던졌다.
“석치상은?”
“조금 전에 제자들과 함께 떠났습니다.”
“사부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
“예, 공자. 하온데 대공자께서 서너 분을 이끌고 지원을 할 모양입니다.”
“대사형이? 설마 혼자 가지는 않을 테고, 누구와 함께 간다고 하던가?”
“십삼마 중 몇 분을 데리고 가실 것 같습니다.”
“그래?”
환비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자신의 심복인 흑의중년인을 향해 빠르게 명을 내렸다.
“그대는 즉시 광룡대로 가서 꼬마 계집이 그곳에 있는지 알아봐라.”
“예, 공자.”
환비는 흑의인이 나가자 허공을 노려보았다.
만일 꼬마 계집이 광룡대에 없다면, 놈이 나간 이유는 뻔하다. 그 계집을 미리 안전지대로 빼돌리겠다는 것.
장소는 굳이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놈이 갈 만한 곳은 한 곳뿐이니까.
‘사람들이 많은 무창 깊은 곳에 숨기려 하겠지. 으음, 역시 만만치 않은 놈이야. 하지만 네놈은 곧 그 결정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석치상이든 신도연풍이든, 누가 죽이든 광룡을 죽일 수만 있다면 계집을 납치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의 공격에서 살아 나온다면, 더욱 미친놈처럼 설칠 것이다.
‘유비무환이라 하지 않던가? 계집을 잡아놓아서 나쁠 것은 없지.’
환비는 두 눈에서 사이한 눈빛을 번뜩이며 한 사람을 불렀다.
“귀조(鬼鳥).”
순간 안개처럼 검은 그림자가 그의 앞에 내려섰다.
“부르셨습니까?”
“즉시 칠사(七邪)를 데리고 무창으로 가라. 석치상이나 대사형의 일에는 끼어들지 말고 광룡의 흔적만을 쫓도록.”
“예, 삼공자.”
“분명 어딘가 은밀한 곳으로 갔을 것이다. 번화한 곳보다 구석진 곳을 탐문하고…….”
그때 문득, 폭령잠마단을 시험했던 암혈조의 연락이 끊긴 곳이 떠올랐다.
“아, 그래, 북쪽의 용강통. 그곳을 뒤져 봐. 그리고 그가 머문 곳을 찾거든 그곳에서 다음 명을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무창에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계집을 빼돌리려는 게 아니라 일이 있어 갔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상관없었다. 헛걸음한다고 해도 손해 볼 것은 없으니까.
‘대신, 놈이 내 생각대로 움직였다면, 귀조가 계집을 선물로 가져오겠지.’
환비의 하얀 이가 싸늘하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