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31화
무료소설 광룡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75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31화
131화
주백천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호연청을 직시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를 딱 한 번 봤을 뿐,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소. 그러니 그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내 어찌 알겠소? 더구나 원로원주께서도 그자가 사라진 후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고 말이오. 물론 나에게도 책임이 없는 건 아니나, 그 일로 본 부주를 과하게 핍박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저 역시 부주께서 그런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나, 완전히 깨끗하다고 볼 수도 없지요.”
여후량이 넌지시 호연청의 말에 힘을 실어주며 주백천을 압박했다.
“어찌 되었든 환마라는 자가 정말 범인이라면, 부주도 이번 구룡성주 선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야 할 것이외다.”
한마디로 성주의 자리를 포기하라는 뜻.
주백천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 미친놈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하다니!’
그러나 쉽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는 상황이오. 본 부주는 모든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기 전에는 권리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소.”
“허허허,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외다. 어느 누가 추측만으로 부주를 핍박할 수 있겠소이까? 다만 사건이 다 밝혀질 때까지 자중을 해주었으면 할 뿐이지요.”
너털웃음을 흘리는 동방휘의 말에 주백천은 차갑게 말을 받았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 접읍시다. 뻔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아무리 그래 봐야 자신의 생각은 변함없다는 말이다.
호연청과 동방휘와 여후량은 그 정도에서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몰아붙인다고 해서 모든 걸 포기할 주백천도 아니다.
주백천의 마음을 흔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득을 본 터. 더해봐야 오히려 역효과만 있을 뿐이었다.
“하긴… 그럼 그 이야기는 잠시 접어둡시다.”
5
영호승 등을 상대로 가뿐하니 몸을 푼 이무환이 광룡대의 연무장을 나서는데, 막 광룡대 앞을 지나가던 호연청이 손짓해서 불렀다.
“잠깐 나 좀 보세.”
호연청이 어디를 갔다 온지 알고 있는 이무환은 눈빛을 빛내며 다가갔다.
“어떻게 됐습니까?”
“결국 자네가 생각했던 대로 되었네.”
“그래요? 누굽니까?”
“와룡이 그리 말하더군.”
이틀을 당기자고 했다. 하지만 그리되지 않을 것을 이무환도 알고 호연청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밀어붙인 것은, 와중에 누군가가 적절한 중재에 나설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일 가능성 많은 사람은 제갈무진. 그런데 역시나 그가 나섰다고 한다.
입을 여는 이무환의 입가로 가느다란 냉소가 맺혔다.
“흠, 이거 바짝 긴장되는데요?”
긴장? 광룡이?
‘개도 안 물어갈 소리를 하는군.’
호연청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가늘게 뜬 눈으로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일단 주백천을 흔들어놓았네. 곧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거야. 우리는 자네만 믿을 테니, 수고해 주게나.”
이무환은 느릿하니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호연청이 돌아서려 하자 다급히 입을 열었다.
“단주. 그전에 단주께서 해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뭔가?”
“은자 천 냥만 지원해 주시죠.”
“천 냥? 나에게 그런 큰돈이 어디 있다고…….”
“아무래도 급박하게 움직이려면 돈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듣자 하니 수룡단에 특별 운영비로 들어오는 게 좀 있다고 하던데… 조금만 푸시죠.”
“누가 그런 헛소리를?”
“정통한 소식통으로부터 들은 것입니다. 사실 필요한 것은 삼천 냥 정돈데, 단주님 생각해서 조금만 요구한 것입죠.”
호연청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어떤 놈이 그런 소리를 이놈에게 했지?’
광룡이 그 사실을 안 이상 그냥 넘어가기는 틀린 일이다. 받은 녹봉을 광룡 자신이 직접 철저하게 관리한다는 소문이다.
게다가 듣기에는, 얼마 전 부인이나 다름없는 어린 소저에게 몇 냥 안 되는 선물을 사주면서 벌벌 떨었다지 않던가. 그 선물을 받은 어린 소저야 감격에 겨워 하루 종일 싱글벙글했다지만.
‘쪼잔한 놈.’
호연청은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으로 은근히 속이 쓰렸다.
사흘 전, 집안일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는 게 미안해서 마누라에게 스무 냥짜리 선물을 사주었다. 그러고도 마음에 안 든다고 구박을 받았다.
누구는 몇 냥짜리 선물에 싱글벙글하고, 누구는 스무 냥짜리 선물을 받고도 구박이나 주고. 은연중에 비교가 되는 것이다.
“천… 냥이면 되겠나?”
“현재 여유 자금이 만 냥도 넘는다는데, 조금 더 주신다면야 저야 좋지요. 하지만 제가 단주님을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 하, 하!”
잔금까지 알고 있다. 거기다 필요한 것은 삼천 냥인데 천 냥만 요구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더 내놓으라는 말.
‘날강도 같은 놈!’
호연청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이무환을 째려보고는 툭 한마디 던지고 돌아섰다.
“알겠네. 그럼 특별히 이백 냥을 더해서 천이백 냥을 주겠네.”
“감사합니다, 단주.”
이무환은 호연청의 뒤통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크흐흐, 이백 냥은 거저먹었군.’
6
신룡부로 돌아온 주백천은 곧바로 신룡전의 내실에 있는 지하 대전의 입구를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사십사 개의 계단을 내려간 후 십여 장의 통로를 지나자, 곧 서른여섯 개의 대황초가 타오르는 지하 대전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촛불이 황금빛 휘장과 사방 기둥과 벽의 금은 장식에 반사되어 휘황한 빛을 뿜어내는 곳. 황제의 내전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호화로운 대전이었다.
그 대전의 한가운데에는 붉은 비단이 깔린 커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한 사람이 앉아 그가 들어오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천세도인, 바로 그였다.
주백천은 굳은 표정으로 천세도인의 앞으로 다가가 말없이 앉았다. 동시에 한 여인이 휘장을 젖히고 나오더니, 주백천의 앞에 옥빛 찻잔을 놓고 차를 따랐다.
주백천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어 입을 적셨다.
그제야 천세도인의 입이 열렸다.
“무슨 일로 팔부와 삼단의 주인이 모인 것인가?”
“그게 좀… 상황이 묘하게 되었습니다.”
주백천이 입을 열자, 천세도인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근 반 각, 주백천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천세도인의 입이 열린 것은 주백천의 이야기가 끝나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갑자기 날짜를 당기겠다고 하는 거지?”
“저도 그걸 모르겠습니다. 난데없이 거꾸로 나오니 놈들의 마음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으음, 자세히 알아보게. 분명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런 제안을 했을 거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서 알아보고 있으니 곧 놈들의 속셈을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천세도인은 주백천의 말을 들으며 차갑게 식은 찻잔만 노려보았다.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아. 음, 이놈에게만 맡겨놓아선 안 되겠어.’
주백천은 천세도인이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긴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마음이 상했을 텐데, 가서 쉬게나.”
주백천이 지하 대전을 나간 지 일각 후. 천세도인은 싸늘히 식은 찻잔을 집어 들며 이름 하나를 불렀다.
“왔으며 들어오너라, 비아야.”
휘장이 젖혀지고 백의청년이 나왔다. 천세도인의 막내제자인 ‘비’였다.
“조금 늦었습니다, 사부님.”
천세도인은 ‘비’가 앞에 앉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사형들은 어떻게 하고 있느냐?”
“제가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어린 계집을 납치하면 광룡이 끌려올 거라 보느냐?”
“대사형의 일이 거듭 틀어진 것은, 대사형이 그자를 일반 사람처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 제자는 그자를 일반 사람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광룡은 공인된 미친놈이다. 절대 일반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해선 안 되는 별종.
천제도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놈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가능성이 어느 정도나 된다고 보느냐?”
“보통 사람이라면 팔구 할의 가능성이 있지만, 놈이라면 반의 확률도 높다고 봅니다. 다만 하지 않는 것보단 나을 거라 생각하고 있기에 해보려는 것입니다, 사부님.”
반의 확률.
그렇다. 광룡이라면 계집을 버려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오히려 분노해서 더 미친 듯이 설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되면 그만큼 광룡이 실수할 확률 또한 늘어날 것이다.
“음… 좋다. 그건 그렇고, 담사황이 종아에게 끌려다닐 거라고 보느냐?”
“담사황은 그렇게 녹록한 자가 아닙니다. 종 사형의 능력으로는 그를 마음대로 다룰 수 없을 것입니다.”
천세도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담사황은 이용 가치가 많은 자이지. 어떠냐? 훗날을 위해서라도 네가 직접 그자를 다뤄보는 게?”
“종 사형이 싫어할 것입니다.”
“그건 그리 문제될 것이 없다. 내가 말하면 제놈이 어쩌겠느냐?”
“물론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면 종 사형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오나 그리되면 종 사형과 저 사이에 금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사형제 간에 틈이 생기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 사료됩니다, 사부님.”
“흠, 그건 그렇지. 좋다. 그럼 담사황은 잠시 그대로 놔두도록 하고, 창룡부를 먼저 처리해야겠다.”
‘비’라 불리는 백의청년, 환비의 눈이 반짝였다.
“창룡부를… 제거하실 생각이십니까?”
“마음 같아서는 검룡부를 처리했으면 좋겠는데, 너도 알다시피 동방휘라는 놈이 만만치 않은 놈이다. 더구나 다른 곳과 달리, 검룡부의 원로인 팔대검노는 아직도 젊은 놈들 못지않은 기력을 지니고 있지. 조금 아쉽지만 창룡부를 먼저 처리해야겠다.”
“급하게 서둘러야 할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아직 천룡부의 회의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한데 자신의 말만 듣고도 뭔가 급박한 일이 생겼음을 짐작한다.
천세도인은 셋 중 환비를 선택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음에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놈들의 요구로 구룡성주 선출일이 하루 앞당겨졌다.”
천세도인은 간단하게 상황을 말해주었다.
천세도인의 말이 끝나자 환비의 표정이 굳어졌다.
“뭔가 꿍꿍이가 있겠군요.”
“이 사부도 그리 생각한다. 그래서 놈들이 모략을 꾸미기 전에, 내가 먼저 놈들의 손을 하나 꺾으려 하는 것이다.”
“부주님은 뭐라 하십니까?”
“모든 정보망을 총 가동해서 놈들의 속셈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주백천만 믿고 있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아. 속셈을 안 다음에 움직이면 늦을지도 모르고.”
잠시 입을 닫은 환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후량을 소리없이 제거하려면 드러난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럼 숨겨놓은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인데… 자칫하면 저희들의 힘이 밖으로 드러날지 모릅니다, 사부님.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천세도인의 입가에 걸린 미소에서 한기가 흘렀다.
“하루가 당겨졌잖느냐? 놈들이 날뛴다 해도 이틀만 버티면 된다. 그때가 되면 놈들은 자신들이 자충수를 놨다는 걸 알게 되겠지.”
단 하루지만, 급박한 상황에서의 하루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천세도인의 말대로 이틀만 버티면, 동방휘와 호연청이 아무리 설쳐도 소용없었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최대한 신속하고 완벽하게 창룡의 깃발을 꺾어놓겠습니다.”
제3장. 무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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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꼬맹아!”
“네에에, 오빠아아!”
덜컹!
이무환은 웃는 듯 아쉬운 듯 묘한 표정을 지으며 기세 좋게 방을 나섰다. 간편한 경장을 입은 남궁산산이 올 때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보따리를 등에 멘 채 뒤따라 나왔다.
밖에는 영호승 등 광룡사위가 함께 무창으로 가기 위해서 미리 와있었다.
“다 왔군.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