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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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80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30화
130화
호연청과 밀담을 나눌 정도라면 상당한 지위에 있는 자라고 봐야 했다. 그런데도 처음 보는 자였다. 소문으로도 들은 적이 없는 자.
다구나 놀랍게도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결코 천중십마의 아래가 아니었다. 그 사실이 항상 여유만만하던 이무환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저 희멀건 자도 너구리굴에서 나왔나 보군.’
호연청이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어서 의자를 가리켰다.
“자, 이리 앉게.”
어차피 드러난 마당이다. 어설프게 변명해 봐야 광룡의 의심만 살 뿐.
“내 소개시켜 주지. 상명, 너도 앉아라.”
두 사람이 마주 앉자 호연청이 입을 열었다.
이무환에 대한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니 생략하고 바로 백의인을 소개시켰다.
“모용상명이라고, 내 조카네.”
백의인, 모용상명이 먼저 포권을 취했다.
“모용상명이오. 말은 많이 들었소.”
순간 이무환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이름이 절로 떠올랐다.
‘중원오신룡 중 잠천신룡?’
위지호천으로 인해 중원오신룡에 대한 것은 머릿속에 새겨질 정도로 외웠다.
잠천신룡(潛天神龍) 모용상명. 오신룡 중 가장 신비에 싸인 자.
형주를 휘어잡은 마도 문파 악살검문의 이백 무사를 혼자서 전멸시키고 홀연히 사라진 게 삼 년 전이라 했다.
그런 잠천신룡이 구룡성의 사람인 것도 놀라운데, 호연청의 조카라니!
“이무환입니다.”
마주 포권을 취하는 이무환의 눈에거 기광이 번뜩였다.
‘으흥! 이거 갈수록 냄새가 나는데?’
그가 슬쩍 떠보았다.
“천하의 잠천신룡을 이렇게 만나다니, 이거 가슴이 떨리는데요?”
떨리는 놈이 그 따위 표정으로 봐?
모용상명은 담담한 표정으로 이무환의 말을 받아넘겼다.
“나야말로 천외광룡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심장이 두근거리오.”
심장이 두근거리기는커녕 앞에 사람이 없는 것 같은 표정이다.
이무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음, 강적이군. 역시 잠천신룡이다, 이 말인가?’
그때 호연청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이무환의 심장에 창을 찔러 넣었다.
“한데, 웬일인가? 지금쯤은 어린 소저와 정답게 이야기나 나누고 있을 줄 알았는데.”
‘윽! 저 양반이 정말!’
이무환은 호연청을 향해 잡아먹을 듯이 눈을 흘겼다.
“당연히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까 왔죠!”
“중요한 이야기?”
이무환은 입을 닫고, 호연청과 모용상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호연청이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흐음,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상명이는 남이 아니니 괜찮네. 말해보게.”
그것으로 이무환은 또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호연청과 모용상명은 단순한 숙질간이 아니라 전부터 손발을 맞추며 지내온 사이라는 것.
“좋습니다. 그렇다면 말씀드리죠.”
이무환은 일단 운을 떼고 머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남궁산산이 말한 의견을 자신의 의견인 양 내놓았다.
“구룡성주 선출일을 한 이틀 앞당기자고 했으면 합니다.”
호연청의 눈이 커졌다.
모용상명도 의외인지 담담하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들 역시 이무환과 마찬가지로 구룡성주 선출일을 앞당기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자세히 말해보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말이야.”
“그러니까 말이죠…….”
3
노란 찻물을 바라보던 제갈무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는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친구야. 신룡부의 원로원 건물을 그렇게 부수다니.”
“재미있는 것만이 아니라 머리도 보통이 아닙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오죽하면 자네와 내가 그 친구에게 당했겠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래서 더 걱정입니다.”
방양고는 그 말만 하고 입을 닫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제갈무진이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그가 호연청의 사람이라서 그러는가?”
“예, 부주.”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예?”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그는 호연청에게 휘둘릴 사람이 아니야. 그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지.”
“하오나 부주님도 호연청이 어떤 자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 그가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적어도 세 배는 무서운 자라는 걸 나도 잘 아네. 그런데 말이야, 무환이라는 그 친구도 호연청 못지않아.”
“하지만 그는 너무 젊습니다.”
“그래, 맞아. 그는 젊지. 그런데 젊다는 것. 그것이 때로는 약점이 되기도 하지만, 장점이 되기도 한다네. 무환, 그 친구는 젊음의 장점이 뭔지 잘 알고 있어. 그래서 나는 별걱정을 하지 않고 있는 거네.”
방양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음에 담은 말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걸 꺼낼 때가 아닌 듯했다.
그가 입을 닫고 있자 제갈무진이 물었다.
“공손척에게서 연락은 왔나?”
“예, 부주.”
“뭐라 하던가?”
“생각 외로 천마교의 사정도 심각한 것 같습니다. 순우결조차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골치를 앓고 있다고 합니다.”
제갈무진의 이마에 깊게 골이 파였다.
“순우결의 능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라고?”
“예, 부주. 아무래도 그곳에서도 머지않아 한차례 폭풍이 불 것 같습니다.”
“흐음…….”
눈을 반쯤 감은 제갈무진은 등을 의자에 깊숙이 기대고 생각에 잠겼다.
방양고는 묵묵히 제갈무진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제갈무진이 반쯤 감은 눈을 떴다.
“양쪽의 일이 얽혔을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보나?”
“잠풍련이 그곳까지 침범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갈무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전설의 무공은 하나가 아니네. 그리고 그 무공을 삼악이 나누어 가졌지.”
“아, 그럼 그들 중 하나가 천마교를……?”
한순간 어떤 생각을 떠올린 방양고의 눈이 커졌다.
제갈무진은 가볍게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리된다면 정녕 무서운 일이지. 하지만 아직은 가능성뿐이야. 그러니 우선은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만하고 있게.”
“후우… 예, 부주.”
“당장 우리가 할 일은 잠풍련의 일을 원만히 해결하는 데 힘을 보태는 거네. 그 일이 선행되어야 다른 일도 할 수가 있어.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부주.”
방양고가 고개를 숙일 때다.
반쯤 남은 찻잔을 들어 올리던 제갈무진이 불쑥 물었다.
“공손척은 지금 어디에 있지?”
“무창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시끄러우니 내일 아침에 안으로 들어오라 하게. 아무래도 그에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어봐야겠어.”
4
황금빛 석양이 구룡성을 집어삼킬 즈음.
전령이 천룡부, 신룡부, 금룡부, 철룡부, 와룡부, 적룡단, 화룡단을 일시에 방문했다.
그리고 이각이 지나서 서산 하늘이 검붉게 물들 무렵. 구룡성 최고의 권력자들인 팔부 삼단의 주인들이 천룡부의 문턱을 넘었다.
천룡지주 구룡무제의 장례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잠시 후.
천룡전에서 검룡부주 검왕 동방휘의 일성이 터져 나왔다.
“구룡성주 선출 시일을 앞당겼으면 합니다! 모레 정도면 어떻겠소?”
그 말이 나옴과 동시, 억만 근 침묵이 천룡전을 짓눌렀다.
제일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주백천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오, 동방 부주?”
조금은 당황한 목소리. 상대의 머리를 갈라서라도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눈빛이다.
동방휘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차피 할 것이라면, 차라리 일찍 결정을 내자는 것이외다.”
금화산이 비대한 몸을 뒤로 젖혔다.
“허어, 그렇게 반대하실 때는 언제고, 왜 그렇게 서두르는 것이오?”
“우리가 반대했다고 해서 늦춰진 것이 있소? 없잖소. 그렇다면 시간을 끌 필요가 뭐 있겠소?”
창룡부주 일수만천 여후량이 동방휘의 손을 들어주었다.
“본 부주는 찬성이오! 알게 모르게 이 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본 성의 무사들이 죽고 다쳤소? 어디 그뿐이오? 구룡이 척을 지고 갈라지는 판이외다. 더 이상의 피해는 누구에게도 좋지 않다는 생각이오!”
부주들이 각기 나서서 의견을 피력하자 이충선이 넌지시 한마디 했다.
“저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주백천이 눈살을 찌푸린 채 이충선을 직시했다.
“자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네.”
분위기 파악을 못한 이충선이 끝까지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험, 저 역시 그간 천룡부를 대표해서…….”
그러나 때가 좋지 못했다.
주백천이 싸늘히 바라보며 이충선의 약점을 찔렀다.
“천룡부 원로들의 결정이 났는가? 천룡령은 넘겨받았나? 내가 알기로는 원로들이 자네보다 이금환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아네만.”
얼굴이 벌게진 이충선이 입을 닫았다.
주백천은 이충선의 말문을 막고 나머지 부주들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어보는 게 좋겠군.”
철군평이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철룡부는 그 일에 대해 별다른 의견이 없소.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그 결정에 따를 것이오.”
뒤이어 혁성화도 무표정한 얼굴로 같은 의견을 냈다.
“마룡부도 마찬가지요.”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 주백천이나 금화산은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러려니 했다.
그때 구자천이 이마를 좁힌 채 말했다.
“이미 본 성의 모든 무사들이 구룡성주 선출일을 삼월 십일일로 알고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소?”
그는 은근히 신룡부와 금룡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어차피 도룡부를 신룡부 편이라 생각하고 있던 동방휘와 여후량이다. 두 사람은 구자천을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려 제갈무진을 바라보았다.
천룡부는 대표할 사람이 없고, 철룡부와 마룡부는 결정대로 따라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찬성하는 쪽은 검룡부와 창룡부, 반대하는 쪽은 신룡부와 금룡부와 도룡부다. 와룡이 찬성한다면 삼 대 삼.
승부는 이제부터였다.
제갈무진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찻잔을 들어 입을 적시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구룡성주 선출을 이틀 앞당기나, 그냥 나흘 후에 하나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주를 선출하는 것이지, 이틀이라는 날짜 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특조대에 힘을 보탠 와룡부다. 당연히 찬성할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반대쪽에 무게가 실린 대답을 한다.
의외라 생각했는지 제갈무진을 바라보는 눈빛들이 제각각으로 달라졌다.
하지만 제갈무진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나, 그러한 이유로 또 말다툼한다는 것 또한 본 성의 안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요.”
동방휘가 눈을 빛내며 재촉했다.
“그래서, 할 말이 뭐요, 제갈 부주?”
제갈무진은 답을 미룬 채 차를 마저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구룡성 최고위직 십여 명이 모두 눈빛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본다. 그 열기에 짜릿한 쾌감이 스멀거리며 피어났다.
‘흠, 광룡, 그 친구가 왜 이런 상황을 즐기는지 조금은 알 것 같군.’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한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 날짜를 당기고 싶다면 이틀은 좀 빠르고, 하루만 당겼으면 어떻겠습니까?”
또다시 사람들의 눈빛이 각양각색으로 변했다.
약간의 실망, 약간의 만족,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라는 수긍의 눈빛이 교차했다.
와중에 호연청이 나직이 손을 들었다.
“그 정도라면 큰 혼란이 없을 터, 본 단주 역시 괜찮다고 생각하오.”
적룡단주 곽가위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화룡단주 장완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짧게 대답했다.
“하루라면 선출식을 준비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소.”
은연중 삼단의 단주가 찬성하는 분위기다.
주백천과 금화산은 눈빛을 마주치더니 눈꺼풀을 보일락 말락 내렸다 들었다.
더 이상 삼월 십일일을 고집하기에 뚜렷한 명분이 없는 상황. 그나마 하루만 당긴 것에 만족하기로 한 듯했다.
반면에 동방휘와 여후량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마지못한 목소리로 말을 끌었다.
“정 마음들이 그렇다면야…….”
“어차피 당길 거, 그냥 이틀을 당기면 어때서들 그런지 원…….”
그때 호연청이 화살을 쏘듯 물었다.
“그건 그렇고… 구룡무제를 시해한 환마란 자가 신룡부의 사람이었다는데, 어찌 된 일입니까, 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