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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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81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28화
128화
정신을 차린 주용천은 급히 밖으로 나가보았다.
이무환이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 천세도인의 거처가 있는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부숴보면 비밀 통로가 있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설마 저 건물을……?”
“맞습니다. 주춧돌까지 다 들어내 볼 생각이지요. 거기! 멋쟁이, 뭐 해? 그냥 기둥을 잘라서 뽑아버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무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영호승이 검을 꺼내고, 막위가 도끼를 휘두르더니 이층부터 기둥을 하나씩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몇 사람이 재미난 놀이라도 생긴 듯 달려들더니 기둥을 잡아 뽑아냈다.
우르르릉!
“거기! 조심해! 지붕이 무너진다!”
“그쪽 말고, 저쪽부터 뽑아!”
“어이! 손발을 잘 맞춰야지! 한쪽이 먼저 무너지잖아!”
난데없이 신룡부의 원로원에서 다시 보기 힘든 구경거리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십여 명이,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십여 명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이층이 사라지고, 일층마저 조금씩 건물의 모습을 잃어갔다.
쿠르르릉! 와장창! 와르르르!
단 이각.
특조대원들을 비롯해 주용천과 멀쩡한 원로, 담장 위에 빽빽이 올라선 신룡부의 무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건물 하나가 완전히 해체되었다.
와중에 소식을 들은 주백천이 달려왔다.
하지만 그조차 건물이 해체되는 걸 말리지 못했다. 도착하자마자 원로원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전말을 들은 것이다.
그는 탈혼마조가 광룡의 암기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광룡이 분노해서 말했다는 ‘대항하는 놈들은 다 죽여! 내가 책임질 테니까!’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몸을 돌려 원로원을 떠나 버렸다.
이를 갈면서. 단 몇 마디만을 남긴 채.
“저 미친놈이 나머지 건물을 다 부숴도 그냥 놔둬!”
이무환은 정말 주춧돌까지 부숴 버리고, 그 후로도 건물이 있던 바닥을 난장판으로 파헤쳤다.
한참 만에 그가 한 말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여기에는 없군.”
그러고는 곧바로 돌아섰다.
“부상자를 챙겨. 이제 돌아가자고!”
광룡의 ‘신룡부 원로원 분쇄 사건’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하지만 몇 사람만은 그게 끝이 아님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오늘은 건물이 무너졌지만, 언젠가는 피가 흐를 것이다. 어쩌면 파여진 건물 터를 가득 메우고도 남을 만큼의 피가 흐를지도 몰랐다.
2
“놈이 한바탕 미친 짓을 하고 갔습니다.”
주백천의 말에 천세도인의 감긴 눈이 조용히 뜨였다.
“나도 들었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놈이야.”
“아무래도 놈의 수작에 놀아난 것 같습니다.”
“대응책은 있는가?”
주백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당장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젭니다. 자칫하면 마룡부나 도룡부처럼 놈들에게 명분만 줄지 모르는 일이라서… 일단은 놈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만…….”
분노를 씹어 삼키는 주백천의 두 눈에서 자광이 일렁거렸다. 당장 달려가서 모조리 쓸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 주백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천세도인의 두 눈에서도 묵빛 회오리가 조용히 맴돌았다.
‘역시 곱게 자란 놈이라 한계가 보이는군. 그 정도에 흔들리다니. 쯔쯔쯔…….’
그러나 아직은 이용 가치가 충분했다.
천세도인은 주백천을 달래듯이 말했다.
“난들 어찌 그런 생각이 없겠나? 하나 우리 측의 손해도 엄청날 수밖에 없네. 그럴 경우 이긴다 해도 남들 배만 불리게 될 거야. 정천무림맹이나 천마교는 물론이고, 사우천이나 묵운방이 가만히 있을 것 같은가? 아마 꿀을 본 벌 떼처럼 달려들 거네.”
“저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어쨌든 그놈이 문제긴 한데, 너무 걱정 말게. 며칠 안 남았지 않은가? 제 놈이 설쳐 봐야 변할 것은 없네.”
주백천도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가 힘들었다.
이를 으드득 간 그가 분노를 쏟아냈다.
“일이 끝날 때까지 놈이 살아 있으면, 제일 먼저 그놈부터 잡아 죽일 생각입니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석치상이 그 말을 듣고 입을 열었다.
“오늘 밤에 내가 놈을 잡겠소.”
주백천이 이마를 좁혔다.
“가능하겠소? 그의 옆에는 날고 기는 놈들이 상당히 많소이다. 헌원숭은 물론이고……. 으음.”
헌원숭이 광룡과 함께 움직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주백천이 헌원숭을 들먹이다 말을 멈춘다.
뭔가 이유가 있을 터, 천세도인이 물었다.
“왜? 눈에 걸리는 사람이 또 있던가?”
“헌원숭과 나란히 서 있던 자가 있었는데, 처음 보는 자였습니다. 오십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아무래도 그자가 마음에 걸립니다.”
나란히 서 있다면, 적어도 헌원숭과 비슷한 위치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그런 말에도 석치상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같은 천중십마에 속해 있다 해도 헌원숭은 자신보다 한 수 아래였다. 헌원숭이 둘 있다 해도 계획을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상관없소. 듣기로는 어제저녁에 그놈 혼자 몰래 나갔다 들어왔다고 하더구려. 어제는 미처 나선 것을 몰라 기회를 놓쳤소만, 오늘은 그런 상황까지 생각해서 오직 그놈만을 지켜볼 사람을 셋이나 붙여놓았소. 그리고 나오지 않는다면… 나오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 것이오.”
말을 맺는 석치상의 눈에서 싸늘한 살기가 번뜩였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광룡의 목을 치겠다는 듯.
“그렇다면야 상관없소만……. 어쨌든 그자가 누군지 알아봐야겠습니다.”
천세도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럼 석 아우에게 놈을 맡기겠네.”
석치상의 주름진 입가로 차가운 웃음이 번졌다.
“놈의 목을 구룡성의 성문 위에 매달고 말겠습니다.”
“기대하지. 그건 그렇고, 내 우선 애들을 시켜서 호연청을 흔들어볼 생각이네. 며칠 남지 않았는데 다된 밥에 재를 빠뜨릴 수는 없지 않겠나?”
그제야 주백천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좋습니다. 그럼 저는 함께하기로 한 사람들을 확실히 단속해 놓겠습니다.”
구룡성을 차지하고 나면 천하로 나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성주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구룡성의 모든 무사들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자신들의 계획대로라면, 나흘 후 그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죽 쒀서 개 줄 수는 없지.’
주백천은 짐짓 거친 동작으로 찻잔을 집어 들며 천세도인과 석치상을 바라보았다.
3
수룡단으로 돌아온 이무환은 곧장 단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신룡부를 뒤집어놓은 것은 그럭저럭 성공했다. 주백천의 심기를 건드려 부동심을 흔들어놓는 것도 성공했다. 그리고 호연청에게는 비밀로 할 것이지만, 주용천의 마음도 흔들어놓았다.
하지만 가장 기대했던 천세도인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목적의 반만 성공한 것이다.
호연청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늙은이 얼굴을 못 보다니.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얼굴인지 알아야 길거리에서 만나도 알아볼 것 아냐?’
길 가는데 정면으로 다가와 갑자기 칼로 푹 쑤셔도 모를 것이 아닌가!
그럴 일은 거의 없을 테지만, 세상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이무환이 헌원숭, 소천득과 함께 집무실로 들어가자 호연청이 일어나서 맞이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잔뜩 궁금한 눈치였다.
“신룡부에서 벌어진 소란이 구룡성을 흔들고 있네. 대체 어떻게 된 건가?”
털썩, 자리에 앉은 이무환이 대충 상황을 설명했다.
“밥 먹고 나서 신나게 달려갔는데 말이죠. 문이 쫘악 열리고 주용천이 나서지 뭡니까. 하지만 주용천은 결코 제 상대가 되지 못했죠. 음하하하! 한데 그때…….”
이야기는 근 일각가량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주백천의 코를 납작하게 누른 것부터 시작해서 원로원으로 쳐들어간 것, 원로원에서 싸움이 벌어져 특조대원 십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밀 통로를 찾는다는 핑계를 대고 원로원의 건물 하나를 완전히 해체한 것까지.
그 모든 이야기가 다 끝날 때까지 이무환의 입은 숨 쉴 때를 제외하고는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헌원숭과 소천득은 끼어들 생각도 못했다. 그들은 그저 신기한 재주를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이무환의 입만 쳐다보았다.
그동안 호연청의 얼굴은 몇 번이나 급변했다.
입이 반쯤 벌어졌다가, 이마를 찡그렸다가, 마지막에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벌게졌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결국 천세도인인가 망세도인인가는 보지 못하고 왔습죠.”
그렇게 이야기를 끝맺은 이무환은 찻잔을 집어 들고 입안에 쏟아 부었다.
가까스로 웃음을 참은 호연청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질문을 던졌다.
“주백천이 보고만 있던가?”
“덤벼들기를 바랐는데, 그냥 가버리더군요.”
조금도 성의가 보이지 않는 대답이다. 호연청은 의자의 팔걸이 끝을 만지작거리며 문질렀다. 마치 이무환의 입을 확 문질러 버리고 싶은 표정을 한 채.
“그가 어떻게 나올 거 같은가?”
“그냥 간 것으로 봐서 제 계획을 눈치챈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대응하기보다 너구리 굴에 다른 너구리들을 불러놓고 머리를 굴리겠죠.”
“흠, 주백천이 그 정도로 정면 대응을 하지는 않을 거야. 그래, 다음 계획은 있나? 신룡부를 그렇게 뒤집어놓았을 때는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말이야.”
뭔가 기대에 찬 은근한 눈빛.
이무환은 호연청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환마가 신룡부 사람이었다는 것도 직접 입으로 말하게 했고… 거기다 특조대가 조사 중에 십여 명이나 부상을 입었으니 그 일을 추궁해야죠.”
“주백천이 쉽게 말려들까?”
“안 말려들면 또 뒤집죠. 뭐, 미친 짓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말을 끌며 찻잔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휘젓는 이무환이다. 마치 찻물이 신룡부라도 되는 것처럼.
‘알긴 아는군.’
호연청은 그런 이무환은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무환이 좌충우돌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의 움직임 내면에는 다른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계획이 숨어 있었다.
자신조차 설명을 듣다 보면 섬뜩할 정도였으니, 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오죽할까.
어쨌든 그렇게 설친 덕에 이 할도 되지 않던 가능성이 단 한 달 만에 오 할까지 올라갔다. 정면 대결을 해도 크게 밀리지 않을 정도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이무환의 능력이 마음에 걸렸다.
누가 뭐래도 이무환은 천룡부 이가의 핏줄이 아닌가.
‘너무 위만 보고 달리다 보면 넘어지는 수가 있지. 이제는 차분하게 하나하나 마무리를 해야 할 때야. 저놈의 능력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호연청이 생각에 잠긴 사이, 이무환은 손가락으로 젓던 차를 홀짝 입안에 털어 넣었다.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꽤나 시끄럽군.’
탕!
찻잔을 내려놓은 이무환은 심심한 아이처럼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뭐, 더 하실 말씀 없으면 돌아가겠습니다. 건물 좀 들어낸답시고 힘 좀 썼더니 몸도 찌뿌듯하고…….”
“그만 가서 쉬게나. 무슨 일 있으면 내 연락하겠네.”
“알겠습니다. 어휴, 그건 그렇고, 침상을 하나 구해야겠는데… 어디서 구하지? 밖에 가서 사와야 하나?”
이무환이 너스레를 떨며 밖으로 나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호연청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어떻게 보셨소?”
소천득이 이마를 찡그렸다.
“아직은 모르겠소. 철부지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교활한 놈 같기도 하고. 도무지 속을 알기가 어려운 놈이오.”
호연청의 눈이 헌원숭을 향했다.
헌원숭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목을 축였다.
“먼저 단주의 의견을 듣고 싶소. 광룡을 어떻게 할 생각이오?”
호연청은 헌원숭을 직시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은 친구와 적만이 있을 뿐이오.”
헌원숭은 호연청의 말을 음미하며 잠시 답을 미루었다. 그리고 답답해진 호연청이 막 묻기 직전에서야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