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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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01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26화
126화
제1장. 미친 짓 한두 번 해보나?
1
주백천은 등줄기가 얼어붙는 충격에 일시지간 몸이 굳었다. 그러나 곧 평정을 되찾고는 짐짓 노기에 찬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환마가 바로 구룡무제 어르신을 시해한 범인이라는 말이지요. 정말 안타깝지 않습니까? 그래도 혹시나 내가 잘못 안 것이 아닌가 하고 이곳에 있기를 바랐는데 말이죠.”
정말 안타깝다는 듯 말하는 이무환이다. 하지만 그것이 주백천을 놀리는 말이란 걸 주백천도 알고 신룡부의 모든 사람이 다 알았다.
주백천은 이무환의 주둥이를 꿰매 버리지 못하는 한을 분노로 뱉어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물론! 증거도 있습니다. 제가 누굽니까? 설마 제가 증거도 없이 왔을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주백천은 속이 끓었지만, 이무환이 증거가 있다고 하자 입을 다물었다.
의아했다. 증거가 있다면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을까? 광룡이 참을 놈인가?
‘증거가 있을 리 없어.’
시신이 반쯤 녹아서 누군지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자신이 알아본 바로도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냥 떠보는 것일지도…….’
주백천은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분노하다 보면 저 얄미운 놈의 농간에 넘어갈지 몰랐다.
“나는 자네 말을 믿을 수 없네.”
이무환이 하얗게 웃었다.
“아, 뭔가 잘못 아셨군요. 저는 부주께 믿어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희가 알아낸 사실을 통보하는 것일 뿐이지요.”
‘이 건방진 놈이!’
주백천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무환을 노려보았다.
그는 광룡이 말 한마디 실수만 하면, 그걸 꼬투리 잡아 죽여 버릴 생각을 했다. 구룡의 주인을 농락한 죄로.
‘어디 걸리기만 해봐라, 이놈!’
“통보라… 좋아, 그럼 먼저 증거를 내놓게.”
이무환이 엽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엽상이 품에서 작은 책자를 꺼내 펼치자, 이무환은 힐끔 그것을 바라보며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범인은 시해 현장에서 자결한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다행히 천룡부의 이충선, 이충현 어른께서 현명하시게도 시신을 재빨리 보존 처리해 주셔서 저희는 많은 것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이 모두 여기에 적혀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시신을 직접 가져와서 대비해 보이겠습니다.”
이충선과 이충현이 들었으면 ‘내가 언제!’ 하면서 펄쩍 뛸 말이었다.
그러나 이무환은 정말로, 그 두 사람에게 고마워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주백천을 바라보았다.
“아시겠지만, 수룡단에는 본 성의 주요 인물에 대한 자료가 상당히 많지요. 눈발, 몇 권 정도 되지?”
갑작스런 질문에도 엽상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칠백이십오 권입니다, 총대주!”
이무환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지금쯤은 몇 권이 더 늘어났을 겁니다. 좌우간, 그 안에는 아주 세세한 것까지 적혀 있지요. 특히 특징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말입니다.”
잠깐 말을 멈춘 이무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어느덧 주위 사람들은 침 삼키는 것도 잊은 채 이무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 이무환이 말을 멈추자 그제야 침을 삼켰다.
곧 나직하면서도 심혼을 짓누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희는 그중 시신과 똑같은 특징이 있는 사람을 찾아보았지요. 혹시나 그것 가지고 어떻게 범인을 단정 지을 수 있냐고 묻고 싶으시다면, 잠시 참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시신에는 결코 일반 사람들에게 없는 아주 특이한 특징이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범인을 알아내는 게 충분할 정도니까요.”
막 입을 열려던 주백천이 주춤했다.
이무환은 그런 주백천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체형만 따졌을 때 용의자는 셋, 그중 두 사람은 아직도 살아 있고, 한 사람만이 보이지 않더군요. 한데 거기에 더해 특이한 특징을 지닌 사람도 그뿐이고 말이죠.”
“얼마나 특이한지 몰라도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환마 한 사람뿐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이무환이 왼손의 약지를 들어 올렸다.
“글쎄요. 잘린 것도 아니고, 두 마디밖에 안 되는 약지에 손톱까지 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거라 보십니까? 아마 환마와 체형이 똑같고 그런 특징까지 지닌 사람은 강호를 다 뒤져 봐도 없을 것입니다.”
그랬다. 환마의 약지는 두 마디밖에 되지 않았고, 거기에 손톱까지 난 기형이었다.
물론 조사 당시 수룡단의 책자에는 그런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다. 지금은 이무환의 지시에 의해 세밀하게 적혀 있지만.
어쨌든 그것만으로도 주백천은 말문이 막혔다.
더 말하면 시신까지 들고 올 태세다.
‘빌어먹을 놈!’
그는 속으로 이무환과 환마를 싸잡아 욕하고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본 부를 조사하겠다는 건가?”
이때라는 듯 이무환이 빠르게 두어 가지 질문을 쏘아붙였다.
“특조대가 왜 소집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구룡무제를 시해한 범인을 잡기 위함이 아닙니까? 환마가 원로원주의 그림자든, 종자든 신룡부에 속했던 자인 것만큼은 분명한 일. 그 일을 조사하려면 신룡부 내부를 조사해야 하는데… 설마 부주께서 저희들의 임무를 방해하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내가 언제 방해한다고 했나?”
주백천이 노기를 드러냈다.
이무환이 바라던 바였다.
“방해하시지 않겠다? 하하, 이거 제가 오해했나 보군요. 그럼 저희가 일을 할 수 있도록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느물거리는 말투. 들을수록 노기가 끓어올랐다.
주백천의 눈에서 다시 자색 광채가 스멀거리며 피어났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는 없네. 특조대는 자네들이지 우리가 아니니까. 그러니 조사는 자네들이 알아서 하게.”
말을 맺은 주백천이 자광이 이는 눈으로 이무환을 직시했다.
그러나 이무환은 꿈쩍도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뭐, 좋습니다. 그럼 저희가 알아서 하지요.”
“지나친 월권은 용납지 않겠네. 내가 허락할 수 있는 곳은, 환마와 관계된 곳뿐이네. 명심하게. 월권을 하면, 후회하게 될 거네.”
이무환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하죠. 누가 후회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요.”
정말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사람의 감정을 박박 긁는 놈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당장 손을 뻗어 머리통을 터뜨려 버리고 싶었다.
구룡성주 선출이 나흘 후만 아니라면, 하다못해 한 달 후만 되었어도 만사 제치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흘 후면 모든 것이 끝난다. 호연청이나 광룡이 제아무리 설쳐도 터진 둑을 막을 수는 없을 터.
‘그때가 되면 제일 먼저 네놈을 죽여주마, 광룡, 이놈!’
주백천은 악다문 입에 힘을 주고 옆을 바라보았다.
“용천! 네가 직접 특조대를 원로원으로 안내해라! 조사와 상관없는 곳은 보여줄 필요 없다! 만일 허락없이 허튼짓을 하는 자가 있으면, 본 부의 법대로 처리해라!”
원로원은 신룡부의 북쪽에 있었다.
이천여 평의 부지에 들어선 건물은 모두 네 채. 건물을 둘러싼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긴 했지만, 특별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원로원 앞에 당도한 특조대는 누구 하나 그곳을 우습게 생각하지 않았다.
구룡성의 구부 어디나 그렇듯이 원로원에는 나이 칠십이 넘어 일선에서 은퇴했거나, 은퇴 직전의 원로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물론 아무나 나이가 되었다고 그곳에 기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각주나 전주, 단주, 장로, 호법 등 최고 상층부의 간부를 역임한 자들 중 원하는 이만이 머물렀다.
개중에는 너무 늙어 힘을 쓰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직 젊은 사람 못지않게 팔팔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을 건드려 봐야 얻을 게 없는 것이다.
이무환은 원로원의 문을 통과한 후 걸음을 멈추었다.
칠팔십대로 보이는 노인 여덟 명이 정원에 나와서 원로원으로 들어서는 특조대를 쳐다보았다.
지나온 세월이 그대로 묻어 있는 주름진 얼굴과 그 얼굴에 핀 검버섯, 그리고 약간의 분노와 의아함이 떠올라 있는 눈빛.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잔잔한 원로원의 대기에 자잘한 파랑이 일어났다.
“저분들은 저희가 왜 왔는지 아십니까?”
주용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밖에서 일어난 소란을 들으셨다면 아실 것이네.”
표정을 보니 아는 듯했다.
하긴 자신이 오죽 크게 소리를 질렀던가? 아마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은 모두가 들었을 것이다.
“원주님의 거처는 어디입니까? 계시다면 일단 그분을 먼저 뵙고 싶습니다만.”
그때 노인들 중 하나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원주께선 오전에 출타하셨네. 가도 만나 뵐 수 없을 게야.”
세모꼴 눈에 염소수염, 뾰족한 턱만큼이나 입이 작은 노인이었는데, 바라보는 눈에서 싸늘한 광채가 일렁이고 있었다.
‘귀혼척(鬼魂尺) 악갈?’
이무환은 머릿속에서 악갈의 이름을 찾아냈다.
오 년 전, 은퇴하기 전까지 신룡부의 호법이었던 노인. 생긴 것만큼이나 손속이 독하기로 유명한 자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문제가 아니었다.
‘제길, 이 늙은이가 어디로 숨었지?’
이무환은 속으로 천세도인을 욕하며 입맛을 다셨다.
“꼭 뵙고 싶었는데, 아까운 기회를 놓쳤군요. 쩝, 뭐 할 수 없죠. 그럼 그분의 방이라도 둘러보는 수밖에.”
악갈의 세모꼴 눈에 각이 지며 싸늘한 한광이 흘러나왔다.
“주인이 없는 방에 들어가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조사를 하러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부주께선 원로원의 조사만큼은 특조대의 재량에 맡겼지요.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비킬 수 없다면?”
악갈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이무환이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하아,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말로 하려고 하는데, 왜 사람들은 제 마음을 몰라주는지 모르겠군요.”
악갈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훗, 말로 안 되면 힘으로라도 해결하겠단 말처럼 들리는군.”
“못할 것도 없지요.”
“그래? 그럼 어디 한번 해봐라, 어린놈아! 듣자 하니 광룡이라 불리며 미친 짓도 곧잘 한다며?”
악갈이 먼저 이무환을 슬쩍 건드려 보았다. 네놈이 어쩔 것이냐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무환은 악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척! 손을 든 이무환이 원로원 안쪽을 가리켰다.
“이 안에 있는 사람들, 한 사람도 빼놓지 말고 모두 끌어내쇼! 반항하는 자는 때려눕혀! 죽여도 상관없어!”
특조대원들이 안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끌어내! 죽여도 상관없어!
그 말에 주용천이 홱 고개를 돌려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이보게! 그게 무슨 말……!”
하지만 이무환은 그의 반응에 눈썹 한 올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뒤엎을 작정으로 오지 않았는가.
“누구든! 조사를 방해하는 자는 모두 적이지요. 구룡무제를 시해한 환마라는 놈과 한패라, 그 말이죠. 막으면 당신도 죽을지 모르니 조심하쇼.”
주용천의 입이 꽉 닫혔다.
악갈이 세모꼴 눈을 홉뜨고 미친놈 바라보듯 이무환을 쳐다보았다.
“뭐 이런 미친 새끼가……!”
“흥! 내가 미친 줄 이제 알았다니, 나이를 먹다보니 귀가 먹어서 소문도 못 들었수?”
“뭐, 뭐야? 네 이놈!”
어느새 꺼내 들었는지, 악갈이 두 자 길이 철척을 쥐고 단숨에 삼 장 거리를 좁히며 날아들었다.
찰나의 순간! 철척이 이무환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이무환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철척을 빤히 바라보며 뇌정갑을 낀 우수를 뻗었다.
그걸 본 악갈의 입가에 독랄한 웃음이 걸렸다.
‘네놈의 손을 부수고, 머리통까지 쪼개주마!’
그러나 웃음도 잠시뿐.
덥석!
이무환의 우수에 잡힌 철척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에서 흐릿한 주먹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가슴이 콱 막혔다.
퍽!
뇌정갑을 낀 채 펼쳐진 만압회의 일격!
“쿠헉!”
입을 쩍 벌린 악갈은 삼 장 밖으로 날아간 후 바닥에 나뒹굴었다.
내심 악갈의 철척에 광룡의 머리가 쪼개지는 것을 상상하고 있던 주용천은 그 광경을 보고 손 하나 꼼짝하지 못했다.
그사이 특조대원들이 원로원 깊숙이 진입했다.
이무환이 그들의 등에 대고 천둥벽력처럼 소리쳤다.
“막는 자는 구룡성의 반도로 취급할 것이다! 알아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