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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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7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23화
123화
십대 대원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나마 약한 벌인 것은 분명한데, 문제는 물구나무서면 냄새가 더 고약할 거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 같은 엽상의 모습을 보니 그나마 있던 불만도 싹 가셨다.
덜컹!
고진의 방문이 열렸다. 당연히 텅 빈 방이었다.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한심한 생각마저 들었다.
미련이라면 미련이었다.
그동안 실수한 것이 거의 없는 것 같아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백조부께서 돌아가신 것도 막지 못했고, 아직까지 범인을 잡지도 못했다.
쌍칼이 팔병신 되는 것도, 종리난경이 중상을 입는 것도 막지 못했다.
비록 자신이 직접적으로 잘못을 한 것은 아니라지만,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 것은 결국 자신의 잘못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또 품 안에 들어온 고진을 놓쳤다.
‘후우, 멍청한 이무환!’
이무환은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인상을 찌푸린 채 고진의 침상으로 다가갔다.
한편, 뒤따르던 엽상은 죽을 맛이었다.
인상을 쓰는 걸 보니 아무래도 조용히 넘어가기는 틀린 듯했다. 이틀 전에 했던 지옥 수련을 다시 할지도 몰랐다.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 할지도 몰랐다.
생각만으로도 몸이 덜덜 떨렸다.
‘지미,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 에휴, 내가 어쩌다…….’
엽상은 고개를 돌리고 소리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그때였다. 문득 이상한 것이 보였다.
“저… 총대주.”
앞서가던 이무환이 홱 몸을 돌렸다.
엽상은 말문이 턱 막혔지만 가까스로 입술을 떼었다.
“저, 저기…….”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여기서 패버려?’
이무환은 그런 생각을 하며 엽상을 노려보다가, 엽상이 손가락을 뻗자 천천히 눈을 돌렸다.
엽상이 가리킨 곳은 벽면, 정확히는 벽에 걸린 족자였다.
“저게 왜? 족자가 거꾸로 걸리기라도 했어?”
“그, 그게 아니라… 저건 제가 길가에서 은자 한 냥 주고 산 다섯 개의 족자 중 하난데…….”
“그래서, 돈이 아까워? 내가 줄까?”
영락없이, 남자가 왜 그렇게 쪼잔하냐는 눈빛이다.
엽상은 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죽더라도 할 말은 하고 죽어야 시원할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 누가 저기에다 낙서를 했단 말입니다!”
“눈발이 한 것 아냐?”
“내가 왜 합니까?! 매일 총대주의 명을 이행하기도 바쁜데 언제 장난하고 있어요! 언제 총대주가 그럴 시간을 주기라도 했습니까?!”
이무환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으흥! 이제 막가자, 이거지? 맞아 죽더라도 한번 해보자. 까짓거 재수 좋으면 이길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이야?”
몇 번 버럭버럭 소리치고 나니 욱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런데 마음이 가라앉자, 엽상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어렴풋이 느끼고 입술이 떨렸다.
“제,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럽니까?!”
“오호? 안 하셨다? 그럼 엽 대주님께서 조금 전 소리치신 것은 저에게 말씀하신 게 아니었나 보군요?”
한기 풀풀 날리는 목소리로 존대까지 한다. 엽상은 심장이 손가락만 하게 오그라드는 기분임에도 끝까지 대답했다.
“그, 그야 총대주님에게 했죠.”
“그래도 거짓말은 안 하는 거 보니 아직 완전히 돈 것은 아닌 것 같군.”
이무환이 입꼬리에 냉소를 걸고 다가온다. 자신이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뭔가 깊은 원한을 진 표정이다.
엽상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다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안간힘을 다해 말했다.
“낙서는 어제까지 없었습니다. 그럼 누가 했겠습니까?”
이무환이 멈칫했다. 입꼬리의 냉소도 거짓말처럼 걷히고, 원한 진 표정도 누그러졌다.
“고진?”
엽상은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동아줄이라도 잡은 심정으로 크게 소리쳤다.
“바로 그겁니다, 총대주!”
이무환은 엽상이 동아줄을 잡고 지옥을 탈출하던가, 아니면 다른 지옥으로 건너가던가 상관하지 않고 족자 앞으로 다가갔다.
엽상의 말대로 족자는 누군가의 낙서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본래는 산수화였는데, 여기저기 줄도 그어지고, 동그라미도 그려져 있고, 글자도 몇 자 쓰여 있었다.
“약속(約束)을…… 지켜라[守]? 아니, 지켰다?”
이무환은 원수라도 찾아내려는 것처럼 족자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무환의 눈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선은… 길이고……. 동그라미는……!’
산 아래 집이 있고, 그 집의 담에서부터 산으로 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산 중턱 부근의 절벽 사이, 옴폭 파인 곳에서 선이 끝나고 글자 하나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대충 그림의 의미를 짐작한 이무환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똥통에 빠진 줄 알았던 물건이 족자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약속을 지키라고? 아암! 남자가 신의를 어기면 안 되지!’
스윽, 고개를 돌린 이무환은 엽상을 향해 씨익 웃었다.
“명을 이행하느라 쉴 시간도 없었다고 했지? 가서 푹 쉬어, 눈발.”
엽상은 그런 이무환이 더 무서웠다.
“괘, 괜찮습니다, 총대주.”
“가서 쉬라니까?”
이무환의 얼굴에서 웃음이 서서히 사라진다. 뭔지 모르지만 말대로 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쉬.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총대주.”
한데 뒷걸음으로 물러선 엽상이 방문을 나서려고 할 때다.
“아참, 눈발.”
엽상은 ‘그럼 그렇지!’ 하는 심정으로 몸을 돌렸다.
“예, 총대주.”
이무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를 갈며 나직이 말했다.
“다시는 말이야, 다시는 끼어들지 마.”
“예?”
“그렇게만 알고 가봐.”
영문을 모르는 엽상은 이무환이 말을 바꾸기 전에 즉시 방을 나왔다.
이무환은 사라지는 엽상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입술을 문질렀다.
‘한 번만 더 나와 꼬맹이 사이에 끼어들기만 해봐라.’
그러고는 족자를 한 번 더 자세히 바라본 후 손을 저었다.
푸스스스…….
일순간 족자의 그려져 있던 산수화가 깨끗이 지워졌다.
‘흠, 고진이 변덕을 부리기 전에 다녀와야겠어.’
제9장. 했어, 안 했어?
1
태양이 천지를 황홀하게 비추며 떠오를 무렵.
이무환은 절벽 사이에 있는 틈을 어렵게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만일 그곳에 틈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산을 뒤집어엎기 전에는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허리를 바짝 구부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제법 넓은 동굴 안쪽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동굴 안에는 작은 나무 침상, 간단한 도구, 몇 권의 책만 주인 없는 곳에 쓸쓸히 남아 있었다.
이무환은 주위를 둘러보다 한곳에서 눈을 멈추었다.
동굴의 한쪽은 평평한 벽이었는데, 벽에는 돌로 긁어 쓴 듯 한 글이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놈을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반드시… 반드시……! 아버지, 여보, 아들아……. 멍청한 장주, 놈에게 죽을지도 모르고……. 내 몸에 힘이 차오른다.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나는 죽어도 상관없다. 복수, 복수, 복수……. 내 목숨을 던져 놈을 죽일 것이다. 그러면 내 가족들도 하늘에서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아버지, 여보, 아들아……. 보고 싶다. 내 가족이 보고 싶다. 죽으면 볼 수 있을까? 젠장, 제기랄! 멍청한 장주 때문에 내 가족이 죽었다. 멍청한 놈, 멍청한 하종건…….
글은 어수선했다. 차분히 쓴 것이 아니라 생각날 때마다 여기저기 빈틈을 매운 것 같았다.
한이 맺힌 글이다. 복수와 그리움이 뒤범벅된 글.
어수선하게 쓰인 글에 고진의 미칠 것 같은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글이라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멍청하기는! 그런데 왜 도망친 거야?! 내가 잡아준다는데!”
이무환은 찡한 마음에 버럭 소리쳤다.
글을 보고 나서야 고진이 어떻게 석벽을 뚫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는지 알게 되었다.
폭령잠마단, 아니, 폭령잠마영단을 서른 개나 먹었다고 했다. 다섯 개가 한계라는 그것을 말이다.
아마 그의 몸은 지금쯤 폭발 직전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 몸으로도 자신에게 들키지 않았다는 자체가 이상했다.
어쩌면 그래서 더 걱정되는 것이기도 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몰라도, 그 힘을 모두 한 곳에 모아놓고 봉인했다는 말이니까.
‘석벽을 뚫기 위해 그 힘 중 일부를 끄집어내어 썼겠지.’
그럴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자신이 고진을 잡아둠으로써 그의 죽음을 조금 앞당겼다는 말이었다.
이무환은 그러한 사실이 화가 났다.
미리 말했으면 그럴 일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제기랄! 내가 그 멍청한 인간을 왜 걱정해 주는 거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무환은 속이 썼다.
‘빌어먹을! 바보 같은 인간! 입은 먹는 데만 쓰는 게 아니란 말이야, 이 멍청한 인간아!’
한참을 씩씩거리던 이무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완전히 늦은 것은 아니었다. 뭔가 방법이 있을 터였다.
그전에 자신이 원하는 물건부터 찾아야 했다.
다행히 물건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족자의 동그라미 안에 정(鼎) 자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동굴 안에도 솥이 하나 있었다.
이무환은 한쪽에 있는 한 자 크기의 솥을 뒤집었다. 그러자 대나무통이 보였다.
대나무통을 집어 든 이무환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좋은 일에 쓰면 그도 좋아하겠지, 뭐.”
퐁!
뚜껑을 열자 진한 약향이 풍겼다. 자신이 연단실에서 거둔 약과 같은 향이었다.
손가락을 대나무통에 집어넣은 이무환은 검지로 약간의 약을 떼내어서 돌돌 말아 입 안에 집어넣었다.
‘음, 맛은 같군.’
폭령잠마영단이 침에 녹아 뱃속으로 들어가자 훈훈한 느낌이 전신으로 퍼졌다.
당연하게도 약효 역시 똑같았다.
이무환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천광지령을 운기했다.
세 번째 복용이어서인지 약효를 이끄는 것도 어느덧 익숙해져 있었다.
2
이무환이 돌아온 것은 유시가 다 되어서였다.
방으로 들어가자 침상에 앉아 턱을 괴고 있던 남궁산산이 슬쩍 눈을 치켜떴다.
“오빠,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잠깐 산책 좀 했다.”
“혼자서 두 시진이 넘게요?”
“그래.”
“물어보니까 아무도 못 봤다고 하던데요?”
“그야 조용히 생각할 것이 있어서 아무도 없는 곳만 다녔으니까 그렇지. 내가 원래 조용한 것을 좋아하잖아.”
지나가는 개에게 물어도 믿지 않을 말이었다. 하지만 남궁산산은 별다른 의문도 없는 표정으로 고개만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광룡대에는 남의 눈에 안 뜨일 만한 곳이 없는데…….”
이무환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궁산산을 째려보며 툭 쏘아붙였다.
“꼭 산책을 광룡대 안에서만 하라는 법도 없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