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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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16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22화
122화
“싫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쇼. 비밀은 지켜줄 테니까.”
화운결은 입을 꾹 닫은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이제 와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곳까지 왔다는 걸 그가 왜 모를까.
이금환이 급히 나서서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정리했다.
“대주, 그렇게 할 테니 너무 걱정 마시오. 화 아우도 그만 진정하게.”
그제야 이무환은 두 팔을 활짝 펴고 어깨를 으쓱했다.
“흐음, 좋습니다. 뭐 더 할 말 있습니까? 없으면 저 먼저 일어나지요.”
그러면서 슬쩍 전음을 보냈다.
<내가 준 것, 다 복용했수?>
이금환의 고개가 천천히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이무환이 털레털레 밖으로 나가자 화운결이 이금환을 바라보았다.
“원주, 저자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금환도 화운결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마찬가지 마음일 테니까.
“지금 본 성에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광룡밖에 없네. 그리고 이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어.”
“저도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여전히 못미덥다는 표정.
이금환은 그런 화운결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명부신사 헌원숭이 광룡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말은 들었을 거네.”
“그거야 저도 들었지요.”
“호연청은 아마 헌원숭이 광룡을 제어하길 바랐을 것이야. 그런데 헌원숭은 광룡을 제어하기는커녕 오히려 끌려 다니고 있지. 그 이유를 뭐라 생각하는가?”
화운결은 물론이고 여건호마저 눈을 빛내며 이금환을 주시했다. 이금환은 이무환이 나간 밀실의 방문을 바라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많은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하나뿐이더군. 헌원숭은 광룡을 제어할 능력이 없다는 것.”
결론을 내리듯 말을 맺는 이금환을 보고 화운결과 여건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금환의 말이 뜻하는 것은 하나였다.
―광룡이 헌원숭보다 강하다!
그게 정말일까?
정말이라면 충분히 모험을 걸 만하다. 하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기에는 천중십마라는 이름이 너무나 거대했다.
당장에라도 잡아서 쥐어 팰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광룡이 천중십마를 능가하다니.
화운결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제든 내 직접 확인해 보리라.’
3
이무환은 나올 때만큼이나 조용히 광룡대로 돌아왔다.
경비를 서던 무사들은 이무환을 알아보고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힘이 없는 모습, 비 맞은 광룡이 따로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일 때는 인사도 건네지 않는 것이 오래 사는 길이었다.
척! 경비들이 말없이 고개만 숙이자, 이무환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향했다.
잠시 후, 방문을 열고 침상을 바라본 이무환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휘유우우우…….”
두꺼운 휘장으로 인해 반쪽 난 침상. 그 반대편에서 남궁산산이 자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가 문제였다.
몸은 제 위치에 있는데, 다리가 휘장을 젖히고 자신의 구역으로 넘어와 있는 것이다. 허벅지까지 맨살을 다 드러낸 채.
고의적일 것이 분명했다.
여우의 유혹!
‘흥! 내가 넘어갈 줄 알고?’
이무환은 침상으로 다가가 손을 살짝 저었다.
남궁산산의 다리가 휘장 너머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낮은 비음이 흘러나왔다.
“으응……. 흐응…….”
정말 묘한 소리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리니 더 이상했다. 가슴이 뛰고 눈이 자꾸만 휘장 건너편으로 돌아갔다.
이무환은 힐끔 반대편을 바라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도를 한쪽에 내려놓고 장포를 벗었다.
“험, 넘어오지 마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자고 있지 않을 확률이 반은 되었다.
이무환은 귀를 쫑긋 세우고 슬그머니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꼬맹이의 공격에 대비한 채.
순간 콧속으로 은은한 향이 밀려들었다.
쿵쿵쿵!
가슴이 더 세차게 뛰었다.
당연히…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백, 아흔아홉, 아흔여덟……. 마흔일곱, 마흔여섯……. 셋, 둘, 하나……. 지미, 내일 당장 침상부터 가져오라고 해야겠어. 안 가져오면 다른 데 거라도…….’
결국 한 시진이 지난 후, 천광지령의 내력으로 모든 감각을 차단하고, 옥이 생각을 하면서 겨우 잠이 들었다.
4
방문을 조금 연 고진은 회랑 저만치에 무사가 보이자 넌지시 말했다.
“저, 뒷간 좀 다녀오겠습니다.”
고진의 말에 수룡단 제십대 칠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시 대상이 대소변을 보기 위해 방을 나선 것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감시를 철저히 하라고 했지, 방을 나가지 못하게 막으라는 말은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새벽, 유난히 요의(尿意)가 심할 때였다.
“함부로 다른 곳에 들어가지 말고 조심하시오.”
“예, 나리.”
칠호는 밖으로 나가는 고진을 바라보며 천천히 뒤따라갔다.
고진을 감시하는 사람은 삼 인 일 조. 아마 다른 두 사람도 자신처럼 고진의 모습을 보며 움직이고 있을 것이었다.
인시 무렵.
뒷마당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새벽어스름이 밀려오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할 듯했다.
뒷마당으로 나온 고진은 다른 때와 다름없이 뒷간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칠호는 사오 장가량 떨어진 어둠 속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제길, 신세 처량하군.’
수룡단의 대원치고 일류고수 아닌 사람이 없다. 그 정도는 되어야 감찰부의 활동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런 일류고수가 삼류무사로 보이는 자를 하루 종일 감시하자니, 자연 어깨에서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부에서 내려진 명령을 거부할 용기가 그에겐 없었다. 그것도 광룡이 직접 내린 명령이라지 않는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자신만 처량한 신세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크크, 그래도 내가 지붕에 숨어 있는 팔호보다는 낫군.’
얼마나 지났을까.
칠호는 기대고 있던 나무를 밀치고 몸을 세웠다.
어스름이 서서히 어둠을 밀어내고 있는데, 뒷간에 들어간 고진이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 이번에는 제법 오래 보네? 큰 걸 보나?’
그때 지붕에 있던 팔호가 전음을 보냈다.
<곽가야, 아무래도 이상하다. 한번 확인해 봐.>
칠호는 조금 더 기다려 보고 싶었다. 새벽부터 냄새나는 뒷간 문을 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 마음에 칠호는 일단 고진을 불러보았다.
“이봐, 아직 멀었나?”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나왔다면 자신의 눈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거늘,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봐.”
칠호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여전히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휙!
단숨에 고진이 들어간 뒷간문 앞에 도착한 칠호는 문을 두들겼다.
“있으면 대답해!”
그의 목소리가 커지자 지붕 위의 팔호와 처마 위에 몸을 숨기고 있던 구호가 뛰쳐나왔다.
“문을 열어봐!”
팔호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칠호가 문을 잡아당겼다.
덜컹!
고리가 걸린 듯 열리지 않았다.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는 말.
구호가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문을 부숴!”
이를 악문 칠호가 냅다 발로 문을 걷어찼다.
와직!
뒷간문이 부서지며 고약한 냄새가 확 밀려왔다. 하지만 세 사람은 냄새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사람이 없다.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제일 먼저 팔호가 이상한 점을 눈치 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돌가루. 큰 것은 엄지손톱만 한 것도 있었다. 양도 적지 않았고.
“곽가야! 저 거적을 치워봐!”
칠호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건너편에 걸쳐져 있는 거적을 치웠다.
순간 세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억 소리가 나왔다.
건너편의 석벽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런……!”
“젠장!”
5
꼬맹이의 얼굴이 점점 커졌다.
코와 코가 달라붙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호치가 보였다.
화악 밀려오는 복숭아 향기!
이무환은 눈앞이 어질어질해지고, 머리가 멍해졌다.
그냥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자신의 입술에 꼬맹이의 입술이 살짝 닿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가 싶더니, 자신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어디엔가 힘이 들어간다.
‘이러면 안 돼, 꼬맹아. 안 돼……. 안…… 되는데…….’
그때였다!
갑자기 찬바람이 밀려오면서 하얀 얼굴이 자신과 꼬맹이의 입술 사이에 끼었다.
‘헉! 이건 뭐야? 저리 안 비켜?! 빨리 비켜!’
하지만 하얀 얼굴은 비킬 생각을 하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
그사이 꼬맹이의 입술이 점점 멀어졌다.
‘비켜! 죽여 버리기 전에! 꼬맹아! 가지 마!’
순간, 꼬맹이의 얼굴이 팍 꺼지며 귀청에 벼락이 떨어졌다.
“총대주!”
이무환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헛! 꾸, 꿈?’
동시에 남궁산산과 갈라놓은 휘장이 펄럭였다. 바람도 없는데 세차게 휘날리는 휘장이 수상했지만, 이무환은 그 이유를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기가 막혔는데. 쩝쩝…….’
그때 밖에서 엽상의 목소리가 들렸다.
“총대주, 일어나셨습니까?”
이무환의 표정이 서서히 묘하게 변했다.
자신과 꼬맹이 사이로 끼어든 하얀 얼굴, 그놈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저 빌어먹을 눈발이……!’
당연히 대답이 고울 리 없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인데 그리 방정이야?”
하지만 엽상 역시 이무환의 반응을 되새김질할 상황이 아니었다.
“고진이… 없어졌습니다.”
휙! 침상에서 날듯이 내려선 이무환이 손을 휘둘렀다.
한쪽에 걸려 있던 장포가 손 안으로 빨려들자, 이무환은 대충 손을 끼워 넣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남궁산산이 실눈을 뜨고 바라보는 것은 까맣게 모른 채.
뒷간으로 간 이무환은 뻥 뚫린 석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 자 반 크기의 구멍 아래 숟가락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내공을 이용해 숟가락으로 구멍을 뚫은 듯했다.
‘빌어먹을, 내력이 별로 안 느껴져서 하종건의 말대로 삼류무사 정도인 줄 알았는데.’
삼류무사라면 숟가락으로 소리없이 한 뼘 두께의 석벽을 뚫을 수 없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열흘 이상은 걸려야 할 것이고, 그나마도 뚫는 소리를 숨길 수 없었다.
그런데 고진은 밖에서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데도 구멍을 뚫었다. 거적으로 막아놓고 두세 번에 걸쳐 뚫은 듯했지만, 그 정도만으로 고진의 능력을 낮게 평가할 수는 없었다.
자신마저 속인 고진이 아닌가 말이다.
‘대체 어떻게 나를 속인 거지?’
아무리 방심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진의 몸 상태를 모르는 그로선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것을 몽땅 처먹은 거 아냐?’
그래도 말이 안 된다. 당호민의 말에 의하면, 새끼손톱만 한 것 다섯 개 이상 먹으면 오히려 독이 된다지 않던가.
‘그 양반을 한번 만나서 보다 더 정확히 물어봐야겠군.’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무환은 주위를 둘러보고 석벽 반대편을 쳐다보았다.
석벽 반대쪽은 적룡단의 뒷간이었다. 그 정도 능력이라면, 지금쯤 적룡단도 벗어나 외성으로 나갔다고 봐야 했다.
‘그냥 곧바로 다그쳤어야 했는데, 마음이 약해서 봐줬더니…….’
때늦은 후회는 하나마나였다.
고개를 돌린 이무환은 풀 죽은 모습으로 서 있는 엽상과 수룡단의 십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땅을 파주면 앞 다투어 뛰어들 것 같은 표정들이었다.
‘참자, 참아. 이런 일로 화내면 이무환이 아니지!’
이무환은 참을 인(忍) 자 다섯 번을 외치고, 표정을 풀었다.
“너무 의기소침해하지 마. 그럴 수도 있지 뭐.”
방금 광룡이 뭐라고 했지? 저 말, 믿어도 돼?
엽상과 수룡십대는 물론이고, 소란통에 밖으로 나온 광룡대원들조차 귀를 후비고 싶은 걸 꾹 참고 이무환의 다음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조금 감동한 표정들. 이무환의 마음도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그냥 보내면 다른 사람들이 우습게볼지도 모르는 일. 약한 벌로 대신하기로 했다.
“일반 대원들은 요 앞에서 물구나무 서 있다가 해가 뜨면 들어가. 그리고…… 눈발은 날 따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