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6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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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61화
161화
“그리고 이사형으로 하여금 담사황을 움직이게 할 생각입니다. 놈들이 뜻밖의 원군을 끌어들였지만, 그자들 정도는 담사황이 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이 너무 커지는 것이 아니겠느냐? 만에 하나라도 저들이 이 일을 빌미 삼아 반격한다면 상황이 복잡하게 될 텐데?”
환비는 반쯤 고개를 숙인 채 담담히 대답했다.
“어차피 하루도 남지 않았습니다. 반격은 오히려 환영할 일이라 생각됩니다, 사부님. 나중을 위해서라도 상대를 약화시킬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긴, 구룡성주 선출이 끝났다고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지. 보나마나 어느 한쪽이 순순히 인정하지는 않을 테니까. 좋아, 그럼 네 뜻대로 해보거라.”
마침내 천세도인의 허락이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환비는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아마 당신의 생각보다 일이 크게 벌어질 겁니다.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사부.’
그리 생각하면 당연히 기분이 좋아야 했다. 그런데 왠지 찝찝한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빌어먹을 귀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금철종이 와서 물었다. 대체 언제 계집을 납치할 거냐고.
그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다만 오늘 밤이면 결정 날 거라고만 했다.
화가 났다. 그까짓 멍청이에게 추궁을 받다니.
‘흑귀가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있겠지.’
4
창룡부를 빠져나온 이무환은 곧바로 이금환을 찾아갔다.
이제 그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전해주어야 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왔는지 알아보아야 했다.
“받으쇼.”
이무환이 주머니를 내밀자 이금환이 주머니와 이금환을 번갈아 보았다.
“그게 뭐요?”
“일단 받으쇼.”
이금환은 엉겁결에 주머니를 받고 이무환의 설명을 기다렸다.
“그거, 백조부께서 잠시 나에게 맡겨놓았던 거요. 뭐, 줄 사람이 없으면 나더러 가지라고 했는데, 귀찮아서 그냥 금 형 주는 거요.”
“할아버님이?”
“잘 들으쇼. 이제 그걸 받은 이상 뒤로 물러날 생각도, 상황을 피할 생각도 마쇼. 알겠수?”
이금환이 손에 들린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안에 든 게 뭔데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이무환은 별거 아니라는 듯, 철전 몇 개 툭 던지듯 말했다.
“천룡령.”
하지만 이금환에게는 만 근짜리 철전이 머리 위에 우르르 떨어진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이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천룡령!
천룡지주를 상징하는 영패를 말함이다.
그간 천룡령은 원로들이 가지고 있다고 소문났었다. 이건천이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맡겼다고 했다. 다음 대의 천룡지주를 원로들에게 선택하게 했다는 말과 함께.
그 때문에 이충선과 이충현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런 천룡령이 어떻게 해서 이무환에게 있단 말인가?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깊게 생각할 것 없소. 노친네가 수를 쓴 것뿐이니까. 잘난 손자 가만히 있는 꼴을 못 봐서 고생시키려고 말이오.”
“할아버님이 자네에게 맡겼다고?”
“더 깊게 이야기하려면 머리만 아프니까, 이것만 아쇼. 이제부터 당신이 천룡의 주인이라는 것 말이오. 물론 천룡에 속한 사람들을 어떻게 부리느냐 하는 것도 다 당신이 알아서 해야 하오.”
“나는 자격이 없소. 차라리 그대가…….”
“거참! 내가 하고 싶었으면 미쳤다고 형에게 그걸 주겠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형’이라는 말에 이금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우…….”
다 귀찮다는 듯 이무환이 손을 저었다.
“잔소리 말고, 좌우간 그걸 가지고 내일 회의에 참석하쇼. 그리고 무조건 내가 하라는 대로 하쇼.”
이금환의 방을 나온 이무환은 암영무류를 시전해 천룡부 뒤쪽에 있는 원로원을 찾아갔다.
천룡부의 원로원은 다른 부의 원로원과 조금 달랐다.
다른 부의 원로원이 반쯤 개방되어 있다면, 천룡부의 원로원은 완전히 폐쇄되어 극히 일부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왕래를 하지 못했다.
구룡무제가 생전에 원로원의 원로들로 하여금 어떤 일에도 참견하지 못하도록 대못을 박아놓았던 것이다.
그로 인해 천룡부의 원로들은 구룡무제의 장례 때를 제외하고는 결코 원로원을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구룡무제가 살해당한 후에는 더 심해져서, 음식을 가져오는 시비를 외에는 누구도 왕래하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이충선과 이충현도 원로원에 들어갔다가 쫓겨나올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무환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담장을 넘었다.
송림에 둘러싸인 원로원은 어둠보다 더 깊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이무환은 어둠이 내려앉은 송림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십오륙 장을 들어가자 송림이 끝나고 건물이 보였다.
걸음을 멈춘 이무환은 네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원로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운을 탐지했다.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모두 넷, 원로들의 숫자와 같았다. 게다가 특별한 기운도 없었다.
며칠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사람들만 있다는 말이었다.
‘오늘 안 오면 와봐야 소용이 없는데…….’
이건천이 남긴 일지에는 한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건천은 구룡성의 존망이 위태롭게 되면 그 이름의 주인이 돌아올 거라고 했다. 삼십 년이나 구룡성을 떠나 있던 구룡성의 살아 있는 전설이.
그런데 아직까지 ‘그’의 모습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구룡성주 선출이 몇 시진 남지 않았거늘.
‘제길, 안 오면 할 수 없지. 나 혼자 미친 짓을 해보는 수밖에.’
‘그’가 구룡성을 떠난 것은 이건천의 부탁으로 모종의 비밀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쯤은 조사가 끝나 있을 것이었다.
그를 만나면 안개 속에 감춰진 뭔가가 모습을 드러낼 터. 한 가지만 확실히 드러나도 그만큼 일이 쉬워진다.
물론 그가 안 온다고 해서 물러설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구룡성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한이 있더라도 잠풍련 놈들에게 구룡성이 넘어가는 꼴은 볼 수 없었다.
광룡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지미, 북궁만호라는 노인네, 돌아다니다 돌부리에 걸려서 자빠지기라도 했나, 왜 안 오는 거야?”
이무환은 투덜거리며 원로원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다 안 오면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때 바람이 불어왔다. 상당히 거친 바람이었다.
그래서일까? 바람 속에 섞인 목소리에도 조금 날이 서 있었다.
“네놈은 누군데 원로원에 들어온 것이냐?”
이무환은 고개를 들어서 어둠에 눌린 송림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한 사람이 바람에 실려 천천히 내려오는 게 보였다.
체구가 제법 큰, 나이를 짐작키 힘든 노인이었는데, 어둠이 그의 주위에서 비켜가는 듯 느껴졌다.
가히 절대고수의 기운!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죽을 이무환이 아니었다.
“그러는 노인네는 뉘슈?”
“이제 보니 버르장머리를 장강에 던져 두고 온 놈이군.”
“처음부터 ‘놈, 놈’ 하는데 기분 좋을 놈이 어디 있겠수?”
노인은 희한한 놈 본다는 눈빛으로 이무환의 전신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곧 경악한 눈빛으로 이무환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놈이 누군데 이리도 거대한 기운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경악도 잠시, 노인은 표정을 굳히고 이무환을 노려보았다.
강하다는 말은 그만큼 위험한 자라는 뜻. 위험한 자가 원로원에 몰래 침입한 이상 이대로 놔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원로원에 아무도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겠지? 안다면 정체를 밝혀라, 어린놈.”
노인의 목소리가 깊어졌다. 은은한 살기가 노인의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이무환도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천광지령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소리가 밖으로 새지 않도록 주위 삼 장을 내력으로 감싼 후 노인을 향해 물었다.
“원로원의 원로들께선 모두 저 안에 있으니 노인네도 외부인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정체를 밝혀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것 같은데요?”
“훗, 오래 떠나 있긴 했지만, 나도 이곳 사람이다. 그러니 네놈이나 정체를 밝혀라.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다 용서될 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야.”
순간 이무환의 한껏 커진 눈이 반짝였다.
“호, 혹시… 노인장이 북궁만호……?”
“알면 되었다. 이제…….”
“구룡성의 전설이라는 그 비천룡(秘天龍)이란 말씀이죠?”
“한때는 그리 불렸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
이무환이 연속적으로 북궁만호의 말을 끊었다.
“정말 무운천수(舞雲天手) 북궁만호, 그분이란 말입니까?”
끝내 노인, 북궁만호의 이마에 골이 파였다.
“그렇다고 했잖느냐?”
이무환은 환하게 웃으며 끌어안을 것처럼 두 팔을 뻗었다.
“이거,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이무환이라고 합니다!”
북궁만호의 노안에 곤혹감이 떠올랐다.
반로환동하지 않은 이상 앞에 있는 놈은 아무리 잘 봐줘도 이십대 초반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아는 것이며, 뭐가 좋아서 저리 환하게 웃는단 말인가?
혼내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될 일. 그는 일단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네놈은 나를 어떻게 아는 것이냐?”
이번에는 ‘놈’이라고 하는데도 이무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거야 구룡무제께서 남긴 일지를 보고 알았죠. 이곳에 온 것도 그분 때문이고 말이죠. 근데…… 남긴 글로 봐서는 제법 사나운 인상인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 정말 멋진 모습인데요? 그렇게 늙기도 쉽지 않은데 정말 멋지게 늙으셨습니다.”
북궁만호의 이마에 파인 주름이 두어 개 더 늘었다.
듣다 보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대충 정리를 해보면, 구룡무제 이건천이 남긴 일지를 보고 자신을 알았고, 목적이 있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 뒤의 말이었다.
‘칭찬 같기도 하고,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도무지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다만 티 하나 없이 맑은 표정을 보니 놀리는 것은 아닌 듯 보였다.
북궁만호는 일단 끌어올린 기운을 누그러뜨리고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구룡무제의 일지는 어떻게 얻었느냐?”
이무환이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며 대답했다.
“그야 그분이 줬죠 뭐.”
“건천이 너에게 주었다고?”
“솔직히 저는 원하지 않았으니까, 떠맡긴 거라고 봐야죠. 쳇, 줄려면 좋은 것이나 주지, 골치 아픈 일만 떠맡기고. 좌우간 한 분 있는 백조부님도 도대체가 손자 편한 꼴을 못 본다니까요.”
중얼거리며 투덜대는 말에서 대충 이무환과 이건천의 관계를 눈치챈 북궁만호의 눈이 조금 커졌다.
“네가 건천의 손자란 말이냐?”
“그렇다니까요? 아니면 제가 무슨 재주가 있어 구룡무제의 일지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북궁만호는 이무환을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이무환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알았는지 눈빛을 누그러뜨렸다.
“그런데 나는 왜 찾아온 것이냐?”
이무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이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너무 반가워서 헛소리만 지껄였군요. 저쪽으로 가죠.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다 헛소리였다고?
눈을 가늘게 뜬 북궁만호는 몸을 반쯤 돌린 이무환을 노려보았다.
‘이놈, 머리가 조금 이상한 놈 아냐?’
아무리 봐도 그런 것 같았다.
인시 말.
천룡부에서 돌아온 이무환은 더 조사할 게 있다며 염추인의 시신을 수룡단으로 옮겼다.
자결로 결론지어진데다가 염화릉마저 승낙하자 창룡부에서도 반대하지 않고 순순히 넘겨주었다.
이무환은 관을 광룡대로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덜컹!
관뚜껑이 열리자 시퍼렇게 변한 염추인의 얼굴이 보였다.
“들어내서 저리 옮겨.”
이무환의 말에 영호승과 막위가 염추인의 시신을 들어내 준비해 놓은 다른 관에 넣었다.
그때까지도 이무환은 관속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텅 빈 관을 바라보던 이무환이 관속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투둑, 관의 밑바닥을 장식한 나무판이 흔들리더니 이무환의 손짓에 따라 들춰졌다.
이무환은 관의 밑바닥을 완전히 뜯어내고, 관 안을 향해 말했다.
“나오쇼.”
순간, 관 안에서 한 사람이 일어났다.
창백한 안색의 여인, 설미랑이었다.
5
“후욱!”
“후우욱!”
거친 숨소리. 붉게 변한 두 눈. 광기와 살기가 뒤섞여 넘실거린다.
모두 스물다섯 명.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에 지하석실이 터져 나갈 것만 같다.
맨 안쪽에 앉아 있던 무면검마는 이를 악물고 끓어오르는 기운을 억눌렀다.
‘너무 방심했어.’
한순간의 방심이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
한 번의 습격으로 일이 끝난 줄 알았다. 하기에 환비가 내상을 치료하라며 내준 단약을 별 의심 없이 복용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수하들까지 모두가.
그가 준 단약의 약효는 상당히 빨랐다.
처음에는 그조차 빠른 약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채 반의반 각이 되기도 전이었다. 서서히 내부의 기운이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약효가 퍼지는 것을 억눌렀다.
하지만 때늦은 깨달음이었다. 그가 복용한 것이 비록 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상을 치료하기 위한 약도 아니었다.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오르는 기운, 그것은 광기였다!
뒤늦게야 그는 그 약이 바로 소문으로만 들었던 마단임을 알고 황급히 광기를 한곳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반 이상의 약효가 그의 몸을 집어삼킨 후였다.
그나마 그는 나았다.
그의 수하들은 완전히 마단의 약효에 지배당한 상태였다.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
이를 악문 그가 전력을 다해 광기를 누르고 있을 때였다.
드르르르…….
한 치 두께의 철문이 소리없이 옆으로 밀려나는가 싶더니, 환비가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