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5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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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70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58화
158화
그는 말을 다 끝맺을 수가 없었다.
십여 명이 남쪽 지붕을 넘어서 날아들고 있었다.
모두가 예사롭지 않은 고수들!
현 상황만으로도 유리하다 볼 수 없거늘, 저들이 합세하면 빠져나가기도 쉽지 않을 듯했다.
무면검마는 의혹을 접어두고 뒤를 향해 소리쳤다.
“돌아간다!”
그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 난전을 벌이던 이십여 명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미리 약조가 된 듯, 그야말로 손쓰고 자시고 할 틈도 없는 빠른 철수였다.
무면검마는 그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 마지막으로 유유히 몸을 날렸다.
황보광 등을 이끌고 남쪽 건물의 지붕을 넘어온 모용상명은 여유 있게 수룡단을 벗어나는 무면검마를 향해 몸을 날렸다.
“멈춰라!”
호연청은 청색가면인을 쫓으려는 모용상명을 다급히 제지했다.
“그냥 놔둬라, 상명!”
쫓아간다고 잡을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상대는 자신이 작정하고 펼친 공격마저 무리없이 막아낼 정도의 절대고수. 모용상명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아직은 그의 적수가 아니었다.
호연청의 곁으로 돌아온 모용상명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숙부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광룡대가 없는 틈을 타서 타격을 주려고 습격한 것 같다. 창룡에 이어 우리마저 힘을 잃으면 내일 무조건 이길 거라 생각한 거겠지.”
호연청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룡단의 단원들이 넘어진 화톳불을 세우고 있었다.
적이 습격하고 빠져나간 시간은 반 각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하거늘 화톳불의 불빛에 비친 장내의 풍경은 말 그대로 살풍경이었다.
수룡전 앞마당에 쓰러져 있는 자만도 이십여 명. 그중 죽은 자가 반이 넘었다. 아마 바깥쪽의 피해는 더 클 것이 분명했다.
물론 적도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쓰러진 적은 모두 넷. 둘은 헌원숭의 궁에, 하나는 소천득의 절명수에, 나머지 하나는 헌원숭의 제자들 손에 당한 상태였다.
‘으음,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고 너무 방심했군. 설마 선출일을 하루 남겨놓고 공격할 줄이야.’
호연청은 속으로 자책하며 고개를 돌렸다.
한 사람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이네, 광.”
황보광을 향해 포권을 취하는 그의 얼굴이 서서히 펴졌다. 마치 수십 년 만에 친구를 만나는 듯 짙은 감회가 서린 표정.
황보광도 조용히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소, 호연 형.”
5
양류한의 방을 나온 이무환은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숙소에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젠장, 늦지 않았나 모르겠군. 망할 인간, 조금 더 일찔 말해주었으면 오죽 좋아?’
이무환은 속으로 양류한을 두들겨 패면서 창룡전으로 향했다.
양류한이 말한 ‘그’를 찾아가 보았다. 하지만 ‘그’는 거처에 없었다. 그렇다면 창룡전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단숨에 창룡전에 도착한 이무환은 앞을 막으려는 위사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비켜!”
창룡부에서 광룡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이무환은 입 한 번 뻥끗하지 못하고 벼락을 피해 옆으로 물러선 위사들을 스쳐서 곧장 창룡전으로 들어갔다.
덜컹!
문이 거세게 열리자 안에 있던 예닐곱 명의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
노곽의 질문에 이무환이 대뜸 물었다.
“혹시 염추인을 본 사람 있소?”
“염 공자? 못 봤네만.”
“다른 분도 보지 못했소?”
“그러고 보니 저녁 먹을 때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고석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흐리자 이무환은 짜증스런 투덜거림을 뱉어냈다.
“제기랄!”
그때 노곽이 물었다.
“왜 염 공자를 찾는가?”
하지만 이무환은 그에 대한 대답 대신 사람들을 둘러보며 되물었다.
“최근에 그를 본 것이 언제요?”
장로 중 한 사람, 칠절귀수(七絶鬼手) 상소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유시 초에 의당 쪽으로 가는 것을 봤네만…….”
“의당 쪽으로?”
더 이상의 대답이 없었다. 다른 사람은 그마저도 보지 못한 듯했다.
이무환은 사람들을 쓱 훑어보고는, 별다른 인사말도 없이 몸을 돌렸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빌어먹을!’
의당으로 달려간 이무환은 즉시 지하로 내려갔다.
여후량의 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염추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무환은 유등불에 비친 그의 뒷모습을 보고 이미 늦었음을 직감했다.
“염추인.”
그가 불러도 염추인은 꼼짝하지 않았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꿇고 있는 무릎 아래쪽으로 흐르는 핏물이 유등불에 반사되어 유난히 검붉어 보였다.
이무환은 눈살을 찌푸린 채 염추인의 옆으로 다가갔다.
심장에 박힌 비수가 보였다.
비수의 손잡이 끝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니 죽은 지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무환은 염추인의 몸을 옆으로 눕히고 상태를 살펴보았다.
반쯤 뜬 눈이 보였다.
절망과 고통이 뒤섞인 눈빛.
아마도 육체적인 고통이 아닌, 마음의 고통이 염추인을 절망으로 몰아넣은 듯했다.
“바보같이…….”
옆으로 다가온 엽상이 나직이 물었다.
“왜 자결했을까요? 염추인이 여 부주님을 살해한 것입니까?”
이무환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염추인은 여후량을 죽일 실력이 안 돼.”
“그럼 왜……?”
“아마 자신의 행동이 사부의 죽음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알고는 자괴감을 견디지 못한 것 같아.”
영호승이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검을 훔친 자가 염추인입니까?”
이무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돌아오던 양류한이 검을 품에 숨긴 채 어스름 속으로 사라지는 염추인을 멀리서 봤다더군. 양류한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검을 택한 염추인을 친동생처럼 아꼈던 것 같아. 그래서 차마 염추인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던 거고. 물론 설미랑과의 관계 때문에 자학적인 마음도 있었을 테지만 말이야.”
“그럼 염추인이 범인에게 검을 건넸겠군요.”
“아무래도 그랬겠지.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음, 어쩌면 자신 때문에 양류한이 범인으로 몰리는 것도 죽고 싶다는 마음에 일조했을 것 같군.”
“누구에게 검을 건넸을까요?”
이무환이 힐끔 영호승을 흘겨보았다.
“그걸 알면 내가 당장 가서 때려잡았지.”
움찔한 영호승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하긴… 그런데 살해에 쓰일 것을 몰랐다면, 어디에 사용하려는 것으로 알고 검을 가져다주었을까요?”
막위도 그것이 정말 궁금한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조금 화려한 검이긴 해도 연인에게 선물하려고 가져가지는 않았을 테고…….”
이무환의 눈빛이 화살처럼 막위의 두 눈에 꽂혔다.
“도끼, 방금 뭐라고 했지?”
제풀에 놀란 막위가 흠칫 머리를 뒤로 뺐다.
“예? 뭐, 뭘요?”
“방금 한 말. 연인에게 선물하려고 했다고 안 했어?”
“그건… 그냥… 그럴 생각은 아니었을 거라고…….”
이무환은 말을 더듬는 막위에게서 시선을 떼고 엽상을 바라보았다.
“눈발, 즉시 가서 정향원의 시비들에게 염추인이 최근 누굴 자주 만났는지, 특히 여자 쪽에 신경 써서 알아봐.”
“예, 총대주.”
엽상이 밖으로 나가자 이무환은 염추인을 내려다보았다.
절망과 고통의 눈빛, 그 속에서 어렴풋이 또 하나의 감정이 느껴졌다.
‘누구에 대한 원망이냐, 염추인? 누군데 그렇게 원망하면서도 입을 여는 대신 죽음을 택한 것이냐?’
염추인의 눈에서 느껴지는 눈빛.
그것을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애증(愛憎)’이라 할 수 있었다.
의당을 나온 이무환은 곧장 여소화를 찾아갔다. 그녀에게 물을 것이 있었다.
여소화는 이무환이 찾아가자 순순히 만나주었다.
이무환은 그녀에게 양류한의 검을 가져간 자가 염추인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염… 사형이요?”
여소화의 그늘진 얼굴이 잘게 떨렸다.
양류한의 일이 풀리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염추인이다.
좋아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기이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자, 이무환이 질문을 던졌다.
“혹시 염추인이 여인을 사귀고 있었소?”
그 말에 여소화의 표정이 묘하게 이지러졌다.
“그것까지 알아야 하나요?”
뭔가 알고 있는 듯한 표정. 이무환은 무심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여소화를 직시했다.
“말씀해 주시오. 죽은 염추인을 위해서라도 말이오.”
한껏 커진 여소화의 봉목이 잠자리의 날갯짓처럼 파르르 떨렸다.
“무, 무슨 말인가요? 염 사형이… 어떻게 되었다고요?”
“자결했소. 부주님의 시신 앞에서.”
“서, 설마……?”
“염추인이 범인이라는 게 아니오. 그는 그럴 실력이 되지 못하니까. 여 소저, 시간이 없으니 일단 제 질문에 먼저 대답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만.”
두 손을 꼭 움켜쥔 여소화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 여자가… 염 사형의 죽음과 관계되어 있나요?”
“아직 정확한 것은 잘 모르오. 그걸 알기 위해서 조사를 하려는 거요.”
“진작 말렸어야 했는데…….”
뭔가를 알고 있다는 뜻. 이무환이 눈을 빛내며 재촉했다.
“누구요?”
여소화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마 염 사형은 따로 사귀는 여자가 없었을 것이에요.”
‘응? 그게 무슨 말이지?’
이무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아는 것처럼 말해놓고 사귀는 사람이 없다니.
그때 입술을 질겅거리며 망설이던 여소화가 말을 이었다.
“염 사형은 설 언니를 좋아했어요. 설 언니와 양 사형이 만나는 걸 멀리서 바라보다 돌아서는 걸 몇 번 봤는데, 돌아서는 염 사형의 표정이 우울해 보였었어요.”
“염추인이 설미랑을?”
여소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맷단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그냥 바라보는 정도였지만, 저도 그 마음을 알기 때문에 말리지 않았어요.”
아마 동병상련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귀지는 않고 좋아하기만 했다, 그 말이오?”
“예, 제가 아는 대로라면……. 흑흑흑…….”
이무환은 잠시 이런저런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느끼며 우는 여소화다. 더 이상 물어보아야 특별한 말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말씀해 주셔서 고맙소. 그럼 마음을 가라앉히고 쉬쇼.”
밖으로 나가자 엽상이 다가왔다.
“알아봤어?”
“예, 총대주. 염추인이 만난 여인들은 정향원의 여인들이 전부인 것 같습니다.”
“특별히 신경 쓰이는 만남에 대한 말은 없었어?”
“에, 별것은 아닌데… 어제 점심 무렵에 설미랑을 만났다고 합니다. 사형제 간이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인데, 어제 후원 안쪽에 서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이 평소와 달라 보여서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었다고 합니다.”
“그래?”
이무환은 무심한 눈을 싸늘히 빛내며 걸음을 빨리했다.
“눈발은 창룡전으로 가서 염추인의 죽음을 알려주고 와. 그리고 사위는 나를 함께 거처로 가서 상황을 정리해 보자고.”
하지만 거처에 도착한 이무환은 염추인과 설미랑의 얽힌 관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거처에 도착함과 동시, 유군명이 수룡단의 소식을 전한 것이다.
“총대주, 수룡단이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유군명의 말에 이무환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야?”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 같습니다. 반 각 만에 도망갔다는데, 잠깐 사이에 이십여 명이 죽고 사오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굳이 적이 누군지 물을 것도 없었다. 현 상황에서 수룡단을 칠 사람이 누구겠는가.
“으음, 단주로선 완전히 뒤통수 맞은 기분이겠군.”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서 금방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깁니다.”
이무환의 이마가 좁혀지며 두 줄기 골이 파였다.
“단주의 무공도 그렇고, 헌원 대협과 소 대협이 남아 있었는데, 적의 피해는 얼마나 되지?”
“적은 네 구의 시신을 남기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피해가 그것밖에 안 되었다고?”
“모두가 대단한 고수들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단주와 맞붙은 자는 능히 절대지경에 달한 고수였는데, 청색 가면을 써서…….”
이무환이 손을 들어 유군명의 입을 막았다.
“가만! 방금 뭐라고 했지? 청색 가면을 쓴 자라고?”
“예, 총대주. 왜 그러십니까?”
이무환은 명세창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수룡단 쪽을 바라보았다.
‘그자가 나왔단 말이지?’
한 번 만나자는 말을 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만나자고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의 일을 들으니, 이무환도 그를 만나보고 싶어졌다.
‘눈빛이 기이한 자였어. 뭔가 고뇌에 찬,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