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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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39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55화
155화
이무환은 그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태연히 천으로 검을 감쌌다.
“제가 왜 나이 드신 노인장을 놀린단 말입니까? 함부로 의심하지 말라는 말이 놀리는 말로 들리던가요?”
육도산은 주름진 입술을 씹으며 분노를 꾹 참고 되물었다.
“그럼 너는 무슨 이유로 양류한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냐?”
이무환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더러 범인이 아니라고 했습니까?”
“뭐야?!”
“그가 검을 잃어버렸다는 말이 사실일 수도 있으니 무조건 의심만 하지 말라는 말이죠. 제 말이 틀렸습니까?”
육도산은 분노가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 말에는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사이 이무환은 천으로 감싼 검을 제갈신걸에게 넘기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좌우간 조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모두 입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누군가를 범인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그가 범인이 아닌 게 밝혀지면 어떻게 얼굴을 마주하실 겁니까? 안 그렇습니까?”
얄밉긴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육도산조차 이글거리는 눈으로 쏘아볼 뿐.
이무환은 그런 눈빛 정도는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럼 저는 계속 조사를 진행하지요. 아! 대공자, 이 정도면 일단 첫 번째 성과는 내놓은 셈이 되겠지요?”
여건평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지.”
이무환이 씩 웃었다.
“다음에는 더 확실한 걸 내놓지요. 아마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노려보는 수십 쌍의 눈빛이 뒤통수에 화살처럼 꽂혔다.
뒷목이 근질거리는 것을 꾹 참고 창룡전을 나온 제갈신걸은 태평한 표정으로 털레털레 걸어가는 이무환을 향해 툭 쏘듯이 물었다.
“양류한이 정말 검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거요, 대주?”
이무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최소한 범인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장 혐의가 짙은데도 말이오?”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 봐서는 양류한이 범인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무환은 양류한이 범인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보니 두 사람의 갈등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들이더군요. 그렇다면 제일 의심받을 사람이 바로 양류한이라는 말인데… 그런 판에 양류한이 여후량을 죽인다? 그가 그렇게 멍청한 사람일까요?”
“똑똑한 사람도 가끔은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는 법이오. 더구나 여인과 관계된 일이라면…….”
멈칫, 말을 멈춘 제갈신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큭, 네가 그런 말할 자격이라도 있느냐? 제갈신걸, 사랑하는 사람조차 지켜주지 못한 너는 그런 말할 자격도 없다.’
자조의 표정으로 고개를 흔든 그는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하지 않고 땅만 쳐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이무환은 제갈신걸이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모른 척하고 자신이 양류한을 믿는 또 하나의 이유를 들이댔다.
“그리고 말이죠. 우수에 찬 그의 눈을 봤습니까? 오랜만에 보는 멋진 눈이더군요. 꼭, 나처럼 말입니다. 그런 눈을 지닌 사람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못합니다.”
어깨가 축 처진 채 땅을 쳐다보고 걷던 제갈신걸이 이무환을 흘겨보았다.
묵묵히 걷던 무설강도 눈에 힘을 주고 이무환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이무환이 눈을 반쯤 내리깔고 걷는다.
우수에 찬 광룡의 눈?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광기에 찼다면 몰라도…….’
두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영호승을 비롯한 광룡사위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총대주의 눈이야말로 정말 멋진 눈이지요.”
“그럼요,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 같은 눈이죠.”
“아냐, 그보다는 석양을 더 닮았어.”
“맞습니다. 아마 세상에서 제일 멋진 눈일 겁니다.”
그들은 이무환의 눈을 이구동성으로 찬양했다.
새벽녘, 이무환이 폭령잠마영단의 약효를 확실하게 녹여주겠다며 자신들을 불러냈는데, 네 사람은 그때 보았던 이무환의 붉은 눈을 잊을 수 없었다.
‘지금 이렇게 걸어다니는 것도 기적이지…….’
6
사시 무렵.
창룡부주 여후량의 죽음이 수룡단을 통해 구룡성 전체에 공식적으로 알려졌다.
극도의 긴장감이 구룡성 전체를 휘감았다.
천룡지주이자 구룡성주인 구룡무제가 살해당한 지 겨우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거늘, 이번에는 창룡지주가 살해당하다니!
구룡성의 모든 사람들은 행여나 자신들에게 엄한 불똥이 튈까 봐 숨을 죽이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이제 구룡성주 선출이 하루밖에 남지 않은 상황.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 와중에도 몇 가지 소문이 빠르게 번졌다.
―범행에 사용된 검이 발견되었는데, 대제자인 양류한의 검이라고 하더군.
―여건평이 부주가 될 거라고 하더라.
그러더니 여후량의 죽음으로 이득 보는 곳에서 사주한 일이 아닐까, 구룡무제를 시해한 자들이 여후량마저 죽인 것이 아닐까, 하는 소문마저 돌았다.
그리고 오시가 지날 무렵에는 이틀 전 신룡부에서 일어난 일도 보다 더 상세하게 알려졌다.
―신룡부 원로원주인 천세도인의 손발이었던 환마가 구룡무제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한다.
―광룡이 특조대를 이끌고 쳐들어간 것도 환마의 주인인 천세도인을 잡기 위해서였다고 하더라.
―그게 사실이라면, 신룡부는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이번 구룡성주 선출에서 빠져야 한다.
들불이 강풍을 타고 번지듯, 소문은 단 두어 시진 만에 구룡성 전체로 퍼졌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즈음.
창룡부의 장로와 원로들이 특조대를 지휘하고 있는 이무환을 찾아와 직간접적으로 압박했다.
“행적도 수상하고 검마저 발견되었는데, 왜 양류환을 잡아들이지 않는 것인가?”
“도대체 사건을 해결할 생각이 있긴 있는 것인가?”
“자신없으면 물러서게!”
“호연 단주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이 어린 사람에게 이번 조사를 맡긴 건지 모르겠군. 커험!”
이무환은 당신들의 말이 다 옳다는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러다 장로와 원로들의 질타가 대충 끝나자 고개를 들고 나직이 말했다.
“사람들이 하도 과격하게 일을 해결한다고 해서 이번만큼은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는데, 정 원하신다면야… 신룡부에서 했던 것처럼 화끈하게 일을 벌려보죠. 사실 단주가 말리지만 않았어도 처음부터 그렇게 했을 텐데 말이죠.”
고개를 든 이무환의 눈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언뜻 붉은 기마저 보이는 눈빛에는 뭔지 모를 불길함마저 담겨 있었다.
신룡부에서 벌어진 원로원 건물 해체 사건을 누가 모를까.
창룡부의 장로와 원로들은 헛기침을 하며 슬금슬금 방에서 물러갔다.
“험, 뭐,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누가 자네의 능력을 탓하던가?”
“좌우간 조금만 더 신경을 써주게나. 어험!”
“자자, 이 정도면 알아들었을 테니 그만 돌아갑시다. 허, 허.”
이무환은 장로와 원로들이 돌아가자 차를 연거푸 석 잔이나 들이켰다.
“하긴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것은 아무래도 내 방식이 아니지.”
성주 선출이 하루밖에 남지 않아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잠풍련 놈들만 도와주는 꼴이 될 테니까.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그냥 확 저질러 버려? 에이, 참자, 참아. 하루만 더 참으면 되는데……. 쩝쩝…….”
입맛을 다신 이무환이 차를 한 잔 더 마실까 말까 고민하는데 무설강이 제갈신걸과 함께 들어왔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가?”
무설강이 그런 이무환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
“별거 아닙니다. 뭐 좀 나온 것 있습니까?”
“장로와 원로들에 대해 알아봤네만, 이렇다 할 것은 나온 게 없네.”
그때 중간 간부들을 조사하러 갔던 엽상과 유군명 등 수룡단 대주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들도 건진 것이 없는지 별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이무환이 그들을 째려보자 엽상이 넌지시 물었다.
“총대주, 외성에 퍼지는 소문에 대해 들으셨습니까?”
“소문? 뭔데?”
엽상이 소문에 대해 말해주었다.
이무환은 엽상의 말을 듣고 실소를 흘렸다.
“그 양반, 머리깨나 굴렸군.”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도 같았다. 누군가가 의도했다면 그럴 만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수룡단주 호연청.
“하여간 사람은 겉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니까.”
이무환의 말에 둘러앉았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로 네가 그 표본이야! 그런 표정으로.
어쨌거나 신룡부를 궁지로 몰아넣으려 했다면 어느 정도는 효과를 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럼으로써 신룡부와 잠풍련이 더욱 강하게 나올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제길, 이러나저러나 우리만 고달프게 생겼군.”
이무환이 투덜대자 무설강이 쇳덩이처럼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오늘 저녁이 고비가 될 것 같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어디 놈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오늘 중으로 범인을 잡아서 확실한 것을 밝힌다면 놈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네.”
“그러니까 범인을 잡을 묘책이 없냐, 이 말이죠.”
“그거야……. 음, 머리 쓰는 것은 우리보다 아우가 훨씬 뛰어나지 않은가?”
이무환은 힐끔 무설강을 바라보았다. 철사자의 쇳덩이 같은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잔머리라고 하려다 말을 돌린 것 같은데…….’
갑자기 방 안이 조용해졌다.
정향원의 여인들을 만나러 갔던 영호승과 혁수린과 종리난경이 안으로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영호승은 조용한 방 안의 분위기에 멈칫하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총대주,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말해봐.”
“여소화 소저가 대주께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이무환의 눈이 영호승을 향했다.
“여 소저가?”
여소화라면 여후량의 둘째 딸로, 설미랑과 함께 창룡이화라 불리는 방년 스물하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이무환은 여소화의 이름을 듣는 순간, 짜릿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짜르르 흘렀다.
여후량의 부인과 딸이 기거하는 곳에 세 사람을 보낸 것은 아주 간단한 이유 때문이었다.
영호승과 혁수린은 얼굴이 잘생겨서, 종리난경은 여자들과 대화하기가 편할 것 같아서.
그런데 왜 자신을 찾는 걸까?
이무환이 고개를 모로 꺾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나를 찾는 거지? 멋쟁이나 꼬챙이 얼굴도 나 못지않은데 말이야. 나는 옥이하고 꼬맹이가 있어서 안 되는데…….”
푹!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숙여지고, 쇳덩이 같은 철사자마저 한숨을 절로 토해냈다.
“후우…….”
이무환은 일단 여소화를 만나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런 게 아니고 말입니다,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라는, 왠지 송곳으로 콕콕 찌르는 듯한 영호승의 말에 내심 안도하고서.
그 뒤를 광룡사위와 종리난경이 자포자기한 표정을 지은 채 뒤따랐다.
따라가고 싶지 않았지만 무설강과 제갈신걸이 등을 떼밀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여소화의 거처에 도착하자 이무환이 명을 내렸다.
“거기 네 사람은 각자 한 방위씩 맡아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
여소화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 즐거운 일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이무환의 엉뚱한 말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게 더 싫은 네 사람은 환한 표정으로 힘차게 대답했다.
“예, 총대주!”
영호승 등이 기다렸다는 듯 사방으로 흩어지자 종리난경이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저는…….”
“종리 대주야 나와 함께 들어가야지. 나 혼자 들어가면 사람들이 오해할지 모르잖아. 자, 이제 종리 대주가 앞장서.”
종리난경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여소화의 방으로 다가갔다.
여소화는 소문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설미랑에게 목단 같은 화려한 아름다움이 있다면, 여소화에게는 목련 같은 순수함이 있었다.
이무환은 여소화가 직접 따라 준 차를 홀짝이며 여소화를 힐끔거렸다.
‘얼굴은 설미랑만 못해도 눈은 설미랑보다 훨씬 예쁘군.’
옆에 있던 종리난경이 그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먼저 입을 열었다.
“대주께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죠? 그럼 저는 나가 있을게요.”
이무환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아냐, 아냐. 여기 있어.”
그제야 여소화가 입을 열었다.
“제가 하려는 말은 굳이 비밀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밖으로 새어서 좋을 것도 없어요. 괜찮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