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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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57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54화
154화
3
아침 해가 떠오르자 창룡부 후원의 작은 연못에서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이제 교대 시간이 반 시진 정도 남은 상황.
제갈신걸은 날이 밝자 시신이 발견된 장소를 한 번 더 훑어보았다.
밤에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무환이 찾지 못했다고 해서 자신까지 찾지 못하란 법은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이각이 지나도록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아쉬웠다.
‘뭔가를 발견해서 광룡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얼마 전만 해도 와룡의 복병으로서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자신이지만, 자신 나이 또래의 누구에게도 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거늘, 광룡에게 꺾이고, 그것도 모자라 지난 한 달 동안 항상 끌려다니기만 했다.
이겨봐야겠다는 마음조차 들지 않을 정도의 완벽한 패배감!
해서 무공이 안 된다면 다른 것으로라도 한 번쯤 이겨보고 싶었다.
자신이 누군가, 와룡부의 잠룡이 아니던가?
머리싸움이라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린 남궁산산에게 당하는 것을 보니 가능할 것도 같았다. 물론 잔머리는 힘들지 몰라도.
그런데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광룡은 잔머리뿐만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읽고 계획을 세우는 것까지 자신을 능가하는 듯했다.
도대체가 남궁산산에게 매일 당하는 걸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차, 여후량의 살해 사건이 터졌다. 기회라면 기회였다.
광룡이 찾지 못한 사건의 실마리를 내가 찾아내는 거야!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 위안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이렇다 할 것이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제갈신걸의 입에서 그답지 않게 투덜거림이 흘러나왔다.
눈앞에 보이는 연못의 물안개가 마치 부글부글 끓어오른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처럼 보였다.
연못을 가득 뒤덮은 수련 잎처럼 자신도 강호라는 물위에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뭔가 알 수 없는 이질적인 느낌이 그의 뇌리를 자극했다.
‘응? 뭐지?’
제갈신걸은 눈살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췄다.
정확히 ‘이거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뭔가가 느껴졌었다. 자연스럽지 못한 그 어떤 것이 그의 감각에 걸렸다.
제갈신걸은 천천히 뒤로 걸으며 물안개 피어오르는 연못을 둘러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그의 눈에 자연스럽지 못한 그 어떤 것이 얼핏 스치고 지나갔다.
제갈신걸은 가만히 서서 수련 잎으로 가득 메워진 연못의 구석, 두 자 정도 위쪽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그제야 중간 중간 떨어진 수련 잎 사이의 공간이 하나로 이어져 보였다. 마치 누군가가 막대기로 내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반듯하고 길게.
제갈신걸은 다섯 자 정도 되는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들고 그곳으로 다가갔다.
연못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묘한 빛으로 반짝였다.
‘제발 내 생각이 맞기를…….’
그는 나뭇가지를 뻗어 반듯하게 갈라진 것처럼 보이는 곳의 수련 잎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밀어냈다.
잠시 후, 수련 잎이 대충 치워지자 바닥이 보였다.
순간 뭘 봤는지 제갈신걸의 입이 쫙 찢어져 귀밑에 걸렸다.
“우흐흐흐흐, 찾았다.”
4
수룡단에선 아침 일찍 호연청의 주재로 창룡부주 살해 사건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이무환은 못 잔 잠을 운기행공으로 대신하고 호연청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수룡단의 간부들과 헌원숭, 소천득, 모용상명 등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이무환이 털레털레 걸어서 자신의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호연청이 물었다.
“명 대주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었네. 범인에 대해 자네가 가진 생각을 듣고 싶군.”
이무환은 일단 차를 따라 목을 축이고는, 호연청이 눈에 힘을 주고 막 재촉하려 할 때 입을 열었다.
“일단 어떠한 관점으로 용의자를 분류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죠. 첫째는 여 부주님의 최측근일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 둘째는 검을 쓴다면 절정의 경지에 이른 자, 다른 무공을 익혔다면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자일 거라는 것. 셋째는……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죽음에 이르러서도 분노보다 원망이나 참담함을 느끼게 할 정도로 가까운 자라는 것 정도입니다.”
호연청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무 막연하군.”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그 세 가지 관점에 모두 포함되는 자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더군요.”
“몇 명이나 되는가?”
“열 명 안팎입니다.”
호연청의 표정이 밝아졌다. 열 명이라면 많기는커녕 뜻밖이라 할 정도로 적은 숫자였다.
“흠, 그럼 잘하면 오늘 중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군.”
이무환이 호연청을 빤히 바라보았다.
“단주님.”
“왜… 그런 눈으로 보는가?”
“이제 고기 잡으러 가려고 하거든요? 배가 고파도 좀 참으시죠?”
이무환의 말뜻을 알아들은 호연청이 멋쩍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 하. 난 그냥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한 말이네. 여건평이 부주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잡았으면 싶어서 말이야.”
이무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죠? 아직 부친을 살해한 범인이 잡히지도 않았는데, 그 아들이 부주의 자리에 오른다고요?”
“자네도 알다시피 내일 구룡성주 선출이 있지 않은가? 상황이 그러다 보니, 여건평이 극구 사양했는데도 장로와 원로들이 밀어붙인 모양일세.”
“여건평이 승낙했다고 합니까?”
“나중에야 상황을 인식하고 승낙한 모양이더군.”
이무환은 호연청에게서 시선을 떼고 눈을 반쯤 감았다.
‘여건평이 극구 사양한 후에 승낙했다고?’
여건호의 죽음, 여후량의 죽음, 여건평의 부주위 승계, 구룡성주 선출. 그 모든 게 일직선상에 놓여 있었다.
현재 그 한가운데 놓인 사람은 여건평.
아무래도 그의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여건평 주위를 자세히 조사해 봐야겠어.’
이무환이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드는데,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수룡단원이 안에 대고 소리쳤다.
“특조대주께 아룁니다. 광룡사위 중 한 분이 대주께 급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찾아왔습니다!”
바로 이어 영호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호승입니다, 대주.”
‘멋쟁이가?’
이무환의 고개가 문 쪽으로 향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영호승이 안으로 들어왔다.
길어야 일이 각이면 회의가 끝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광룡대에서 기다리지 않고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중대한 사안이 발생했다는 뜻. 게다가 굳은 표정이다.
설마 꼬맹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이무환은 당장 그 생각부터 들었지만,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멋쟁이, 무슨 일이지?”
“창룡부에서 긴급 연락이 왔습니다, 대주.”
‘휴우, 꼬맹이 일은 아닌가 보군.’
이무환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되물었다.
“창룡부에서? 무슨 일인데?”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검이 발견되었다 합니다.”
5
창룡부 후원의 연못가에 도착한 이무환은 이십여 평의 작은 연못을 살펴보았다.
연못은 온통 수련 잎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여후량의 시신이 발견된 곳과는 십이삼 장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깊이는 석 자 정도, 검을 꺼내기 위해서 그랬는지 수련 잎이 한쪽으로 밀쳐져 있었다.
“수련으로 덮여 있어서 바닥이 보이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발견했죠?”
이무환의 질문에, 제갈신걸이 목에 힘을 주고 대답했다.
“범인이 범행에 사용한 무기를 버렸을지 모른다 생각하고 주위를 살펴보았소. 마땅히 버릴 만한 곳이 없더구려. 그러던 차에 연못이 수상하게 보이더구려. 뭐, 직감이라고나 할까? 저곳에 뭔가가 있다, 그런 것 말이오. 그래서 찾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검이 나오지 않겠소?”
“흠, 그래요?”
“아무래도 피 묻은 검을 가지고 돌아다닐 수 없으니까 이곳에 버린 것 같소.”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봐야겠죠. 하나 모든 것이 밝혀지기 전에는 어떠한 것도 확답을 내려선 안 됩니다.”
“그게 아니라면 범인이 이곳에 검을 버릴 이유가 없지 않겠소, 대주?”
되묻는 목소리가 유난히 낭랑하다. 항상 고뇌에 찬 듯 보이던 표정도 오늘은 밝기만 하다.
이무환은 그런 제갈신걸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증거물을 발견했다는 것에 기분이 무척 좋은 것 같았다. 하긴 누구라도 같은 마음일 것이었다.
“검은 어디 있죠?”
“임시 숙소에 있소.”
“아직 창룡부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겠죠?”
“물론이오. 발견 즉시 사람을 보내고 숙소에 숨겨놓았소.”
“가서 보죠. 양류한의 검이 맞는지 확인을 해야 하니까.”
제갈신걸이 몸을 돌려 앞장섰다.
‘우후후, 이번 일이 해결되면 내 덕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거요, 대주.’
이무환은 그런 제갈신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날 샜는데도 멀쩡하군. 잠 안 자도 일할 수 있겠는데? 잘됐어, 그러잖아도 한 사람이 아쉬운 판인데 말이야.’
추르르릉.
맑은 검명과 함께 푸른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격 한 치 위의 검신에는 ‘청령(靑靈)’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은은한 청광이 어른거리는 검신. 검날은 어찌나 예리한지 보는 이의 가슴을 섬뜩하게 할 정도였다.
일순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양류한의 눈이 잘게 떨렸다.
“어디서… 찾았나?”
“후원의 연못.”
이무환은 순순히 대답해 주며 천을 벗겼다.
“당신의 검이 맞소?”
“청령은 내 검이 맞네.”
“어제 말했던 대로 잃어버린 것이 사실이오?”
이를 악문 양류한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검을 창룡부의 간부들에게 보이고, 당신이 한 말을 그대로 할 것이오. 다른 할 말은 없소?”
“입이 열 개라 해도 할 말이 없네.”
억눌린 목소리,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이다.
이무환은 무심한 눈으로 양류한을 바라보고는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설미랑의 말에 의하면, 귀하와 돌아가신 여 부주님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 같던데, 사실입니까?
“갈등이라……. 하긴 그것도 갈등이라면 갈등이라고 할 수 있겠지.”
“혹시 설 소저와의 일 때문에 여 부주님을 찾아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어제 오전에 만나서 허락해 주십사 했네만, 사부님의 마음은 변함이 없으셨네. 건평이 옆에서 도와주었는데도 소용이 없었지.”
“대공자가 함께 있었단 말입니까?”
“그랬었네.”
이무환은 묵묵히 천으로 검을 감쌌다. 그러고는 돌아서기 전에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설 소저를 사랑하십니까?”
양류한의 눈이 또 한 번 파르르 떨렸다.
“물론이네.”
양류한의 방에서 나온 이무환은 창룡전으로 갔다.
창룡전에는 이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어제 보지 못했던 사람들도 서너 명 끼어 있었다.
이무환이 무설강, 제갈신걸, 유철상, 광룡사위와 함께 창룡전으로 들어가자,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뭐라도 나온 게 있나?”
이무환을 향해 여건평이 물었다.
이무환은 청령검을 감싼 천을 풀었다.
“혹시 이 검을 아시오?”
두어 사람이 청령검을 알아보았다.
“그 검은 대사형의 검이오.”
“그건 양 공자의 청령검이 아닌가? 그 검을 왜 그대가 가지고 있는 건가?”
이무환은 웅성거리는 창룡부의 간부들을 둘러보며 상황을 설명했다.
“조금 전, 후원의 연못 속에 있는 것을 특조대의 조장이 발견했소.”
여건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아버님을 살해한 검이 청령이란 말은 아니겠지?”
“연못 속에 있었는데도 검에 묻은 피가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소. 해서 본인은 부주께서 이 검에 의해 살해되었다 보고 있소.”
“뭐라고?”
경악한 사람은 여건평만이 아니었다.
장내의 모든 창룡부 간부들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고석문은 어이없다는 듯 큰 소리로 그 사실을 부정했다.
“말도 안 되오! 그럼 양 사형께서 사부님을 죽이기라도 했단 말이오?”
이무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양 공자는 이 검을 잃어버렸다고 했소. 그러니 속단을 해서는 안 될 것이오.”
육도산이 차갑게 말했다.
“흥! 내 듣기로는, 어제 아침 류한이 부주께 크게 혼났다고 들었다. 속단을 할 수는 없지만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거참, 노인장은 양 공자와 원한이라도 있소?”
“무슨 말이냐?”
“아니라면 검을 잃어버렸다는데 왜 믿지 않는 것이오?”
“믿기 힘든 상황이니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어지간하면 사람 좀 믿고 사십시오. 나이도 많으신 분이 뭔 의심이 그렇게 많습니까?”
능글능글한 말투로 핀잔을 주는 이무환이다.
육도산은 노기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무환을 쏘아보았다. 금방이라도 그의 머리꼭대기에서 불길이 솟을 것만 같았다.
“네, 네놈이 정녕 나를 놀리겠다는 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