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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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6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52화
152화
귀조는 명을 내리고 기문진을 향해 다가갔다.
동시에 뒤쪽에서 황산검문의 제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여섯 명의 수하로는 저들을 모두 막기에 역부족인 상황. 마음이 다급해진 귀조는 일단 진세 안으로 들어가 진세의 축을 찾기로 작정했다.
수하들이야 다 죽어도 상관없었다. 계집만 찾으면 그 계집을 이용해 자신은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밖으로 나갔다면 수하들이 들어와 알렸을 터. 아직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세 안으로 발을 딛자 갑자기 안개가 앞을 가로막았다.
‘팔진도에서 따온 진세인가?’
이런 곳에 사는 놈이 기고한 절진을 알 리 없었다. 그렇다면 파훼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듯했다.
그는 천천히 발을 뻗으며 자신이 아는 진에 대한 지식을 총동원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귀조는 다섯 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표정이 조금 펴졌다.
몇 걸음만 더 가면 진세를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 여섯 걸음을 옮기고, 일곱 번째 발걸음을 내딛었을 때였다.
쉭!
뭔가가 좌측 옆구리로 다가왔다.
귀조는 왼손을 떨쳐 다가오는 것을 쳐냈다.
순간이었다. 갑자기 반대쪽 옆구리에 뭔가가 틀어박혔다.
푹!
‘흐읍!’
이를 악문 귀조는 급히 몸을 틀었다. 이번에는 좌측 옆구리를 날카로운 물체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 빌어먹을…….”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귀조의 걸음이 흐트러지자 안개가 출렁이고, 사방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쉴 새 없이 밀려들었다.
쉭! 쉬쉭!
귀조는 미친 듯이 손을 휘두르며 밀려드는 기운을 막았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휘둘러도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옆구리에 난 상처에서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차!’
뒤늦게 자신이 허상에 당했음을 안 귀조는 휘두르던 손을 멈추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또 한줄기의 날카로운 기운이 다가왔다.
귀조는 가만히 선 채 기문진의 중심축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바로 그때였다!
푹!
다가오던 기운이 가슴에 꽂히며 격한 통증이 일었다.
‘젠장, 허상치고는 너무 아프군.’
그런데 왠지 이상했다. 단순히 아픈 정도가 아니었다. 숨도 쉬기 힘들 정도.
‘크읍!’
그때 들려온 소녀의 목소리.
“그따위 머리로 나를 잡으러 왔단 말이지?”
귀조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 설마……?’
그는 황급히 자신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가슴에서 뭔가가 잡혔다. 비수의 손잡이인 듯했다. 그리고 뒤이어 느껴지는 끈적끈적한 물기. 피였다.
차라리 계속 막아냈다면 이번의 공격도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처음부터 손을 쓰지 않고 허상이라 생각했다면, 이번 공격이 진짜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마음이 흐트러진 그는 둘 중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그것이 생사를 갈랐다.
“깨끗이 죽을 생각은 포기해. 나에겐 쇠도 자를 수 있는 비수가 아직 몇 개나 남았거든.”
허공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차가우면서도 밝은 목소리.
귀조는 그 목소리를 듣고 소름이 끼쳤다.
‘이, 이 계집은 내가 죽어가는 상황을 즐기고 있어. 뭐, 이런 계집이…….’
그는 억지로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순간 뭔가가 다리에 걸렸다.
서걱!
“크윽!”
앞으로 비틀거리는 귀조의 입에서 절로 격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밝은 목소리가 그의 귀청을 때렸다.
“한쪽 다리로는 나를 잡을 수 없을 걸?”
“이 악독한 년!”
“흥! 나를 잡으러 온 놈이 나더러 악독하다고?”
그 말은 맞았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단순히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때로는 불길한 생각이 현실로 드러날 때가 많았다.
오늘이 그랬다.
그가 평생 내지른 신음보다 더 많은 신음이 숨을 몇 번 쉬는 사이에 흘러나왔다.
“크억! 허억!”
귀조는 바닥을 기며 진세를 빠져나가려 했다.
이제 멀쩡한 것은 그의 양팔뿐이었다. 그나마 청마귀조를 익혀 쇠보다 단단하기에 멀쩡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곳은 베이고 잘려 온통 피로 범벅되어 있었다.
“나는 나를 건드리는 놈은 누구든 용서하지 않을 거야. 물론 오빠는 제외지.”
“주, 죽여라……. 악독한 년…….”
“뼈를 하나하나 분리하고, 힘줄을 모조리 빼서 죽이고 싶은데, 오빠는 내 손에 피가 묻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 그냥 죽어. 피가 다 빠지면 고통도 덜해질 거야.”
귀조는 기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피로 범벅된 바닥에 머리를 떨구었다.
계집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고통을 즐기지 못해 아쉽다는 듯.
귀조는 죽어가는 중인데도 소름이 끼쳤다.
‘나 같은 것은 상대도 안될 만큼 나찰 같은 계집이다. 주군께선… 이 계집을 너무 몰랐어. 빌어먹을…….’
황산검문의 사람들이 여섯 명의 혈의인을 모두 죽인 것은 그로부터 반 각가량이 지나서였다.
그 싸움으로 인해 세 사람이 부상을 입었지만, 그다지 심한 부상은 아니었다.
그제야 진세가 걷히고, 진세 안쪽의 참혹한 광경이 드러났다.
진세 안에서 죽은 사람은 모두 넷. 그들은 팔다리가 찢기고, 온몸이 너덜거릴 만큼 베어진 채 피를 다 쏟아내고 죽어 있었다.
그들에게서 쏟아진 피가 광장을 붉게 물들여 마치 혈해를 보는 듯했다.
황산검문의 제자들이 굳은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볼 때다. 백귀를 돌보던 당악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남궁산산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남궁 소저! 괜찮습니까?”
남궁산산이 힘없이 대답했다.
“저는 괜찮아요.”
누가 봐도 힘없는 소녀의 목소리, 표정이었다.
“크게 놀랐을 텐데,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조부님은 어디 계십니까?”
“제가 진세를 움직이는 동안 안전한 곳에 계시라고 했어요.”
남궁산산의 말이 끝남과 동시, 그녀의 뒤에 있던 석문이 열리고 당호민이 걸어나왔다.
그는 펼쳐진 광경을 보고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억지로 얼굴을 펴고 남궁산산을 바라보았다.
“괜찮으냐?”
“예, 할아버지. 심력을 너무 소모해서 힘이 없을 뿐이에요. 다친 곳은 없으니 걱정 마세요.”
“휴우, 정말 다행이다, 다행이야.”
당호민은 자신의 도움 없이 적을 막아낸 남궁산산이 대견하기만 했다.
그런 한편으로는, 수하들이 죽어가는데도 뒤로 물러나 있어야만 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남궁산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지만, 그래도 십수 년을 함께한 사람들이 아닌가.
‘후우, 차라리 나 몰라라 도망갔으면 몇 명이라도 살았을지 모르거늘. 멍청한 사람들…….’
남궁산산이 그런 당호민의 마음을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분들도 할아버지를 이해할 거예요. 어쩔 수 없었잖아요.”
“글쎄다. 아무튼 네가 진을 펼쳐 적을 막아냈으니 그나마 다행이구나.”
“모두 할아버지 덕분이죠. 진세를 펼칠 재료를 모두 대주셨잖아요.”
“그거야 그냥 있던 것을 내줬을 뿐이지…….”
그때 황산검문의 사람들이 남궁산산에게 다가갔다. 공은효와 유소경이 그녀를 향해 반갑게 말을 건넸다.
“정말 대단하오. 저 무서운 자를 진세로 막아내다니.”
“늦은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어.”
남궁산산이 밝게 웃었다.
“아니에요. 그래도 여러분이 때맞춰 오셨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정말 잡혀갈 뻔했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표정이 굳었다.
“아! 아마 놈들의 일행이 밖에 있을 거예요. 우리가 비밀 통로로 도망치면 잡으려고 말이에요. 나가서 그들을 모두 잡아야 해요. 그래야 우리가 장소를 옮겨도 적들이 모를 거예요.”
2
밖으로 나오자 무설강이 넌지시 물었다.
“너무 지나치게 몰아세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 그렇게까지 상대의 기분을 건드릴 필요가 있었나?”
이무환은 별 신경 안 쓴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 덕에 일하기는 편해졌잖아요. 창룡부의 간부들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조사해야 할 판인데, 기세를 제압하지 못하면 골치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고의로 그들의 신경을 건드린 건가?”
“뭐, 겸사겸사요.”
꼭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세 사람 정도는 분명 가식적인 표정이었어.’
생각에 잠긴 이무환을 제갈신걸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이무환 때문에 기를 못 펴서 그렇지, 와룡부의 잠룡이 바로 그다. 그는 몇 마디 말에서 이무환의 의도를 짐작했다.
“그들 중에 수상한 자라도 있었소?”
이무환은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꼬리를 어떻게 드러나게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겠죠.”
이제 그 일을 시작할 것이다. 그 일에 비하면 창룡부 사람들의 기세를 꺾은 것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한편, 이무환 일행이 나간 창룡전의 분위기는 전보다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참 만에 곽운산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부주님을 살해한 범인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틀 후의 사안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네. 대공자, 어떻게 하시겠는가?”
여건평은 굳은 얼굴을 들어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아버님을 살해한 범인을 반드시 잡을 것이오. 나에겐 오직 그 일만이 중요할 뿐이오.”
그때 분노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는지, 육도산이 이마에 내천자를 그은 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자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네. 하나 본 부의 장래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육 어르신,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을 참고 있는 접니다. 제가 어찌 다른 일에 신경 쓸 정신이 있겠습니까?”
“허, 내 어찌 그걸 모르겠나? 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해 보게. 부주께서 생전에 추진한 일을 잘 마무리하는 것도 아들 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여건평이 입술을 깨물었다.
곽운산이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원주님. 어차피 구룡성주 선출일 전까지는 장례조차 제대로 치를 수 없을 터. 기왕이면 부주님의 원을 들어준 후에 장례를 치르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대공자, 결정하게나!”
“맞습니다. 대공자, 망설이지 말고 승낙하시지요!”
모두가 당연하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여건평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 여러분의 생각이 그렇다면, 여러분의 뜻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당장 부주의 위에 오르면 남들이 오해할지도 모르는 일, 모레 아침부터 부주의 책임을 다하도록 하지요.”
그 시각.
창룡전을 나온 이무환은 곧장 여후량의 가족들과 제자들이 기거하는 정향원(丁香院)으로 갔다.
창룡부의 뒤쪽에 위치한 정향원에 도착할 때까지 명세창이 여후량의 가족 구성에 대해 죽 늘어놓았다.
여후량에게는 일흔일곱 살의 노모, 삼남이녀의 자식. 그리고 열 살 터울의 아우가 하나 있었다. 그중 여건호가 죽었으니 이제 자식은 이남이녀만이 남은 셈이었다.
“제자들은 모두 다섯으로, 대제자인 양류한과 이제자 고석문, 삼제자 온현, 사제자 설미랑, 그리고 막내 제자인 염추인이 있습니다. 그중 설미랑만 여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남제자들입니다.”
“그들의 내력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소? 여후량의 제자가 된 시점은?”
“염추인을 뺀 나머지 넷은 이미 제자가 된 지 십 년이 넘은 사람들입니다.”
대제자인 양류한이 이제 서른두 살로, 제자가 된 지 이십 년이 다 되었다. 스물아홉인 고석문이나, 스물여덟인 온현, 스물다섯인 설미랑 역시 십수 년 전에 제자로 받아들여진 사람들. 모두 어릴 때 제자로 들어온 만큼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거기다 마지막 제자인 염추인은 염화릉의 아들. 당장 의심이 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무환은 명세창의 설명이 끝나자 질문을 던졌다.
“자식들과 제자 중에 검을 쓰는 사람은 누구요?”
“대제자 양류한과 막내 제자인 염추인입니다.”
“양류한이?”
의외였다. 염추인이야 염화릉의 아들이니 검을 쓴다는 걸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양류한은 여후량의 대제자다. 대제자가 사부의 주무공이 아닌 다른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일단 그를 만나봅시다.”
여후량은 측근 중 절정 이상의 경지에 이른 검의 고수에게 죽임을 당했다. 양류한이 검을 익혔다면 그 역시 용의 선상에서 피해갈 수 없을 터였다.
양류한은 무엇 때문인지 창룡전에도 나가지 않고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듣기로는 여후량의 시신 앞에서 일각가량을 소리 없이 운 후에 방으로 들어가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특조대에서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소. 들어가도 되겠소?”
생각 외로 양류한은 이무환의 요청을 순순히 응낙했다.
“좋을 대로.”
그는 머리를 풀어헤친 채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방으로 들어서는 이무환 일행을 맞이했다.
이무환은 안으로 들어가며 양류한을 살펴보았다.
풀어헤쳐진 머리카락 사이로 우수에 젖은 듯한 눈이 박혀 있고, 그 아래로 벼락에 맞아 쪼개진 바위처럼 우뚝 솟은 콧날, 두툼한 입술, 거친 수염이 자리하고 있다.
창룡전에 나가지 않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고 해서 의지가 약한 자로 보았는데, 의외로 강인한 인상을 지닌 자였다.
이무환이 코앞으로 다가갈 때까지 그는 침상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 장의 거리. 이무환은 의자를 하나 끌어당겨 그와 마주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양류한이 우수에 찬 눈을 들어 물었다.
“뭘 알고 싶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