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8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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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48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80화
180화
“남자답게? 아하! 그래서 지금까지 합공한 거요?”
끝까지 속을 긁는다. 걸음을 멈춘 호연청은 이를 갈며 이무환을 노려보았다.
“그건 네가 먼저…….”
“그러니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여야 나갈 수 있다, 이 말이죠? 단주, 당신 미쳤수? 그렇게 죽고 싶어요?”
호연청의 눈에서 백색에 가까운 싸늘한 광채가 일렁였다. 분노에 찬 살기였다.
이무환이 그 눈빛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오, 환우사천 중 한 사람인 백령무존(白靈武尊)의 백령천존수(白靈天尊手)를 익혔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호연청의 눈에서 일렁이던 백색 광채가 파도처럼 출렁였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놈이 그 사실을 안 이상 이제 죽일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호연청은 두 손에 전 공력을 집중시키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시 걸음을 옮기자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헌원숭과 그의 두 제자만 그 자리에 있을 뿐.
그렇게 이무환과 이 장의 거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두 다리를 철탑처럼 바닥에 굳게 박은 호연청이 쌍장을 들어 올려 앞으로 내밀었다.
순간, 백색 광채가 호연청의 쌍장에서 번쩍이더니, 설백색의 하얀 기운이 이무환을 향해 밀려갔다.
십성 공력이 실린 백령천존수의 기운이었다.
이무환은 백령천존수의 기운이 석 자 거리까지 다가온 후에야 천광뇌령의 장력을 마주 쳐냈다.
우우우웅!
두 기운이 얽혀들자 그 충격파에 고막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콰아앙!
일성 굉음이 수룡전을 무너뜨릴 것처럼 뒤흔들더니, 호연청의 몸이 그대로 주욱 밀렸다.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 것이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의외의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무환이 뒤로 이 장이나 훌쩍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장력에 당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호연청이 잘 알았다.
그는 이무환이 갑자기 물러나자 다급히 명을 내렸다.
“퇴로를 막아!”
그 순간, 탁! 탁! 이무환이 갑자기 손바닥을 쳤다.
우르르릉.
지붕에 벼락이라도 떨어진 듯 수룡전이 부르르 떨렸다.
가공할 진기의 파동!
호연청을 비롯한 밀천회의 고수들은 움직임을 멈추고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은 채 이무환을 노려보았다.
내력을 실어서 박수를 친 것으로 밀천회 고수들의 발길을 붙잡은 이무환은 그들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무환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호연청은 갑자기 등골을 타고 한기가 솟구쳤다.
만장 심해처럼 깊은 이무환의 눈빛. 그 눈빛 깊은 곳에서 청광과 적광, 그리고 암흑보다 더 어두운 묵광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바라보고 있으니 이무환의 눈 속으로 심혼이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이, 이놈은 대체……!’
그때 이무환이 입을 열었다.
“정말 내가 미치길 바라는 거야? 좋게 말할 때 사람 마음을 알아줘야지 말이야. 그래도 함께 밥 먹은 정이 있어서 말로 풀어보려고 했더니, 무더기로 덤벼?”
그에 대해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암습을 한데다 협공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밀천회의 사람들은 모두가 정파의 기재 출신들. 잘잘못을 모를 정도로 낯 두꺼운 자들이 아니었다.
문제는, 어떻게든 이무환을 죽여 입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겁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욕을 먹어도 저놈만큼은 반드시 죽여야 된다!’
모두가 이를 지그시 악물고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무환이 그들의 마음을 눈치 채고 냉랭하게 코웃음 쳤다.
“흥! 설마 밀천회에 대해서 나만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정말 그렇게 알고 있었다면 당신들은 다 똥멍청이들이야. 안 그래?”
졸지에 똥멍청이가 된 사람들.
호연청과 황보광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때였다.
“죽고 싶지 않다면 비켜라!”
수룡전 내부까지 뒤흔드는 커다란 외침이 바로 문밖에서 들려왔다.
호연청과 황보광 등은 목소리에 담긴 내력을 가늠하고 이를 악물었다.
절대의 힘이 담긴 외침이다.
분명 신경 쓸 만한 고수는 오지 않았다 했거늘, 대체 누가 저런 기세를 뿜어낸단 말인가?
콰당!
호연청 등의 궁금증을 풀어주겠다는 듯 문이 거세게 열리고 몇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벌써 싸움이 벌어졌군. 일찍 온다고 오긴 했는데, 조금 늦었나?”
그를 본 호연청의 눈매가 잘게 떨렸다.
‘만겁존자 담사황!’
담사황만이 아니다. 무설강, 제갈신걸, 유철상 등 기존 광룡대의 고수들도 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자들.
‘공손척! 으음, 철룡칠의까지?!’
두려운 것은 그들이 아니다. 그들의 뒤에 와룡부와 철룡부가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젯거리였다.
“하, 하, 하! 오셨군요. 오실 때까지 시간 좀 끌어보려고 했는데, 어찌나 성질들이 급한지 계속 달려들어서 혼났습니다.”
호연청과 황보광을 비롯해 밀천회의 고수들 얼굴이 참담히 일그러졌다.
결국 이무환이 이러쿵저러쿵 질질 시간을 끈 것이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단 말인가?
와중에도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왜? 그럴 거면 함께 오면 되었을 것이 아닌가?
이무환이 그들의 의문에 답하듯 무설강에게 물었다.
“검룡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오까지 문밖을 나서면 적과 내통한 걸로 알겠다고 했네. 동방 부주가 얼굴이 벌게지더군. 하마터면 담 궁주님과 다툴 뻔했지.”
다툴 뻔?
이무환이 슬쩍 담사황을 바라보았다.
담사황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한판 붙고 싶었는데, 자네 형이 말려서 참았지. 빨리 가지 않으면 자네가 곤란해질지도 모른다고 하더군.”
그들이 태평하게 말을 나누는데, 호연청 등은 천 장 벼랑 위에서 떨어진 돌에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별 볼일 없는 수하들만 데리고 왔다는 것에 너무 마음을 놓았다. 그들은 광룡만 잡으면 되었으니까.
그런데 말로 시간을 끌면서, 그사이에 검룡부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놓다니!
‘사악한 놈! 그런 잔꾀를 부리다니!’
마음 같아서는 잘근잘근 두들겨서 패 죽이고 싶었다.
조금 전만 같았어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고수들이 몰려온 이상 이제는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이젠 검룡부의 도움도 바랄 수가 없게 됐군. 빌어먹을.’
검룡부 탓만 할 수도 없었다.
천룡과 와룡과 철룡의 주요 인물들이 움직였다. 삼룡부가 움직인 것과 다름없는 상황. 천하의 동방휘라도 웅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판사판 놈들을 칠까, 아니면 이대로 빠져나갈까?
치자니 이길 가능성이 없고, 그냥 빠져나가자니 밀천회의 비밀을 아는 자들을 그대로 두고 가야만 한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호연청이 갈등을 겪으며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이무환이 광룡 특유의 썩은 웃음을 지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하, 하, 하! 자,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미친 새끼! 백여우보다도 더 교활한 놈!
그래도 호연청은 겉으로나마 태연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뭘 말인가?”
“그야,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서로 간에 이익이 되는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자는 거죠, 뭐.”
“더 나눌 이야기가 있던가?”
“아니면, 서로 죽일까요? 그렇게 하길 바라십니까?”
웃지나 않으면 덜 미울 것이다. 피식피식 웃는 이무환의 얼굴을 울퉁불퉁한 돌판에 문질렀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어차피 적으로 상대할 생각이 아니었나? 내가 잘못 듣지 않았다면 처음에 그렇게 말한 거 같던데?”
“에이, 그거야 한번 해본 소리죠. 넘어가나 안 넘어가나 볼 겸 말이죠. 나이깨나 드신 분들이 그 정도 가지고 삐치면 애들만도 못하죠. 안 그렇습니까?”
들을수록 속만 끓는다. 차라리 빨리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나을 듯했다.
호연청이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좋아, 할 말이 뭔가? 돌리지 말고 말해보게!”
“그 양반 참, 왜 소리 지르고 그럽니까? 좋게 이야기해 보자는데.”
으드득!
호연청이 이를 갈았다. 철우평이 그 소리를 듣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게 갈면 이가 부러질지 모르는데…….”
호연청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수룡전으로 한 사람이 더 들어온 것은, 호연청이 철우평을 잡아먹을 것처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오셨습니까?”
이무환이 빙긋 웃으며 반기는 사람, 그는 북궁만호였다.
슬쩍 눈을 돌려 그를 본 호연청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저 늙은이까지 오다니…….’
이제는 더 이상 놀랄 것도 없었다. 구룡성의 모든 사람이 다 몰려온다 해도 태연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
‘흥! 어디 모조리 몰려와 봐라.’
하지만 곧 그는 물론이고, 황보광 등 밀천회의 모든 사람이 뒤통수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북궁만호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며 날벼락을 던진 것이다.
“황보광이 밀천회의 오회주고, 헌원숭과 소천득이 칠대봉공 중 두 사람이란 것을 알겠는데… 호연청, 자네에 대해선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군.”
그의 말이 떨어진 순간, 호연청은 전신의 살이 떨렸다.
상대는 단순히 밀천회라는 이름만 아는 것이 아니었다. 밀천회의 극비 사항까지 알고 있었다.
대체 저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어, 어떻게… 그걸……?”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지. 삼십 년이 걸렸으니까.”
북궁만호의 눈이 호연청을 직시했다.
“단순히 수룡단의 단주일 뿐이라고 우길 생각은 아니겠지?”
호연청의 떨리는 몸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자신에 대해 모른다면 굳이 먼저 입을 열 이유가 없었다.
그때 이무환이 방정맞은 말투로 물었다.
“할배, 백령무존도 밀천회의 사람입니까?”
할배? 썩을 놈, 그냥 할아버지라고 하면 입술이 부르트나?
“킁, 그는 밀천회의 대회주다.”
“그래요? 그럼 단주도 밀천회 사람이 맞군요.”
“무슨 말이냐?”
“단주가 백령천존수를 익혔거든요.”
북궁만호의 눈이 다시 호연청을 향했다.
“정말이냐?”
호연청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부정했다.
“나는 밀천회의 사람이 아니오.”
“아니라고?”
이무환과 북궁만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호연청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 거짓말을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모를 호연청이 아니다. 한데도 밀천회의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정말일까?
두 사람이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자, 호연청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상황이 이리된 이상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렇소. 나는… 정천무림맹의 사대령주를 총괄하는 정천무령주(正天武令主)요.”
그의 대답이 의외인 듯 북궁만호의 얼굴에 골이 파였다.
하지만 이무환은 눈빛을 빛냈다. 그에게는 호연청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낼 방법이 있었다.
“그럼 나철위라는 분을 아시겠군요?”
호연청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무환을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어떻게 그를 아는가 모르겠지만, 그는 본 맹의 동안총령주네.”
이무환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비밀이라 할 수 있는 그 사실을 아는 걸 보니 정천무령주라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그때 북궁만호가 말을 건넸다.
“일단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무환은 차가운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 느릿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러고는 호연청을 향해 싸늘히 말했다.
“엉뚱한 짓 할 생각은 아예 마쇼. 어떤 미친놈이 정천무림맹에 나타나서 기둥뿌리를 뽑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호연청은 이를 으드득 갈며 잇새로 으르렁거렸다. 그렇게 되면 정천무림맹의 모두가 자신을 원망하게 될 것이 뻔했다.
“걱정 마라. 너를 여기서 보는 것만으로도 질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