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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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7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77화
177화
이무환은 일단 당호민을 만나서 자신이 폭령잠마영단을 총 열 개나 복용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역시 그래서…….’
당호민은 어젯밤에 보았던 이무환의 모습을 떠올리고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를 내지 않고 최대한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어디 맥을 좀 짚어보세.”
당호민은 이무환의 맥을 짚고서 일각 가까이 고민했다.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정상이 아니라면 맥의 흐름이 불규칙하다든지, 하다못해 평상시보다 빠르기라도 해야 했다.
그런데… 너무나 정상이다. 이상할 정도로.
게다가 맥을 타고 흐르는 기운이 강한 것인지, 약한 것인지 그것조차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당호민은 눈곱만큼이라도 이상한 부분을 찾기 위해 모든 심력을 쏟아냈다.
‘어딘가 이상이 있을 거야. 절대 이럴 수는 없어!’
어디엔가 잠복해 있던 광기가 불길처럼 일어날 거다.
그럴 것이다. 자신이 아는 한 그래야 정상이니까.
이무환의 맥문을 잡은 채 모든 신경을 집중한 지 얼마, 당호민의 이마에 땀이 솟았다.
일각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뭐가 잘못된 걸까?
“어떻습니까?”
그때 이무환이 불쑥 물었다.
그제야 슬그머니 눈을 뜬 당호민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 허. 역시 내가 정확히 판단한 것 같네. 폭령잠마단이 영단이 되었군.”
이무환의 표정도 환해졌다.
“그렇죠?”
“그런데 말이네……. 혹시 다른 것하고 혼동해서 잘못 복용한 것은 아니겠지?”
“가지고 있는 약은 그것밖에 없었는데요? 아! 어릴 적 만년해령실이라는 것을 먹은 적이 있는데, 어제 그 기운이 전부 퍼진 것 같더라고요.”
“만년… 해령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당호민은 자신이 모르는 약재가 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는 한편으로 호기심이 일었다.
“그게 어떻게 생겼던가?”
이무환이 간단하게 만년해령실을 설명했다.
“뜨거운 바다 속에 있는 건데 말이죠. 나무는 불길처럼 빨갛고, 열매는…….”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당호민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그리고 곧 입술이 문풍지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 그걸… 세 알이나… 먹었다고?”
“예, 맛은 별로 없었죠. 입에 넣으니까 그냥 녹아버려서…….”
‘오오오! 맙소사!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광룡이 말한 것은 분명 그거야! 전설로만 전해지는, 인세에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전설의 불로불사영과, 해심만년화령불로혈란실(海深萬年火靈不老血卵實)!’
그가 자신과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그 이름을 잊지 않은 것은, 우습게도 열매의 이름이 워낙 길기 때문이었다. 이름이 긴 만큼 수십 번 외워야 했으니까.
당호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럼… 광룡의 피야말로 천고의 보약이라는 말.’
이무환을 바라보는 당호민의 눈이 번들거렸다.
‘전설이 사실이라면 한 대접만, 아니, 반 대접만 먹어도… 우리 악이의 공력이 절정 수준에 오를 수 있을 텐데…….’
자신이 먹을 경우에는 제 명보다 오십 년, 아니 적어도 이십 년은 더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상대는 광룡. 욕심을 낸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진짜 용을 잡는 게 더 쉬울지도…….
그래도 이무환을 보면 볼수록 침이 고였다.
꿀꺽.
당호민이 침을 삼키자 이무환이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을 이었다.
“좌우간 그거 먹고 나서 처음에는 고생 좀 했죠. 이삼백 년 묵은 산삼을 먹고 나면 조금 괜찮아지는데, 큰 것이 없어서 작은 것을 먹으면 날뛰는 기운이 쉽게 가라앉지 않더라고요. 그 바람에 물속에서 한나절씩은 살았죠, 뭐.”
천고의 영약을 먹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삼백 년 묵은 삼을 간식으로 먹었다고?!
―자네 피, 한 종지만 주면 안 되겠나!
당호민은 목구멍까지 기어 나온 그 말을 꾹 눌러 삼키고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랬군. 험, 좌우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게. 아까운 피를 흘리면… 아니, 그게 아니고, 커험! 폭령잠마단을 더 복용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말이야.”
이무환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에겐 자신의 피가 어떤 약효를 지녔는가 하는 것보다 품속의 폭령잠마영단이 더 중요했다.
“그럼 말이죠, 혹시 두어 개 더 복용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글쎄, 한두 개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군. 단, 시일을 두고 복용해야 할 거네. 부작용이라는 것은 집 나간 마누라가 돌아오듯이 갑자기 찾아올 수 있거든.”
이무환의 표정이 환해졌다.
혹시나 이상이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멀쩡하단다. 거기다가 한두 개는 더 먹어도 된단다.
비록 한두 개지만, 그것만 해도 어딘가!
그때 당호민이 그냥 지나가듯이 물었다.
“그런데, 영단이 아직 많이 남았나?”
이무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제 몇 개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당호민의 눈빛이 변하지 않는다. 뭔가를 바라는 눈치.
이무환은 호탕하게 웃으며 인심 좋게 말했다.
“하, 하, 하! 뭐, 그래도 한 개쯤은 더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누굽니까?!”
그러고는 품속에서 대나무통을 꺼내 단약 하나를 꺼내주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당호민의 표정이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이 양반이……!’
하는 수 없이 하나 더 주었다.
“뭐, 혼자 드시기 뭐하면, 손자도 하나 주십시오. 하, 하!”
그제야 당호민의 표정이 펴졌다.
‘후우우. 부릴 욕심을 부려야지, 다 늙어서 무슨…….’
그가 자신의 피를 바라고 있다는 걸 알 리 없는 이무환은 내심 안도하며 대나무통을 품속에 넣었다.
“그럼, 저는 가볼 곳이 있어서……. 편히 쉬십시오.”
그렇게 당호민의 거처를 나온 이무환은 입맛을 다셨다.
“쩝, 왜 그러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단순히 폭령잠마영단이 욕심나서 바라봤던 것이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다시 들어가서 물어보기도 그랬다.
‘꼬맹이라면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르는데. 나중에 물어보라고 할까?’
그때 영호승이 넌지시 물었다.
“뭐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응? 아, 별거 아니야. 천룡전으로 가자고. 일거리 마저 해결해야지.”
천룡전은 무거우면서도 엄중한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전날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이무환은 어제나 다름없는 걸음걸이로 털레털레 걸음을 옮겨 천룡전으로 들어갔다.
광룡사위와 함께 이층으로 올라가자 천룡호위들이 이무환을 알아보고는 목이 부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절도 있게 머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일어나셨지?”
곧 그들 중 하나가 고개를 들더니 방 안에 대고 소리쳤다.
“부주께 아룁니다. 천외광룡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셔라.”
“들어가시지요.”
이무환은 광룡사위를 밖에 남겨둔 채 천룡호위가 열어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천룡의 주인이 집무를 보는 그 방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이금환과 북궁만호와 이충신.
이금환이 빙그레 웃으며 아침 인사를 했다.
“편히 쉬었는가, 아우?”
이제는 말을 높이지 않는다. 이무환도 그것이 편했다.
“꿈속에서 몇 놈이 설치는 바람에 개꿈만 꾸다가 깼수.”
“어떤 몽귀(夢鬼)인지 모르지만, 재수도 없군. 하필 찾아가도 광룡의 꿈속을 찾아가다니.”
“앞으로 머리 없이 돌아다니려면 고생 좀 해야 할 거유.”
북궁만호가 실없는 농담에 끼어들었다.
“네깟 놈이 잘라봤자 콧방귀도 안 뀔 거다, 이놈아. 귀신들은 머리가 잘려도 곧 자라난다고 하지 않더냐.”
“젊은 귀신들은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늙은 귀신들은 그럴 힘도 없을 걸요?”
흘겨보는 모습이 은근히 비꼬는 것만 같다.
‘그놈 참…….’
말상대해 봐야 자신만 열날 뿐이다. 얼굴 본 것은 겨우 하루 반이지만 북궁만호도 그쯤은 알았다.
하기에 그는 더 이상 말상대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이놈아, 밀천회 애들을 어떻게 할 거냐?”
이무환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웃는 얼굴과 달리 무저의 늪처럼 가라앉은 눈빛이다. 보는 사람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드는 괴이한 웃음.
“제가 가서 담판을 짓지요.”
어제저녁과는 사정이 다르다. 천룡부도 안정이 되었고, 자신의 몸도 팔 할은 나은 상태다.
멋모르고 수작을 부리면 뒤집어엎어버리지 뭐.
솔직히 이무환으로선 그들이 그렇게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래야 깨끗이 정리가 될 테니까.
하지만 이금환은 걱정이 되는 듯했다.
“몸도 아직 안 나았을 텐데 괜찮겠나, 아우?”
“숨어서 꼼지락거리는 미꾸라지들 때려잡을 정도는 되니까 걱정 마쇼.”
밀천회의 고수들 중에는 천중십마와 우내십존에 속한 고수들이 셋이나 속해 있다.
하거늘 그들이 졸지에 미꾸라지로 변해 버렸다.
북궁만호는 어이없는 한편으로 이무환과 말상대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계속했으면 자신을 늙은 미꾸라지 취급하고도 남을 놈이었다.
“아무리 네가 강해도 그들을 다 상대할 수는 없다는 것쯤은 알고 하는 말이겠지?”
“그거야 당연하죠. 제가 미쳤습니까? 혼자서 설치게.”
“그럼 누구누구 데려갈 것이냐?”
“생각해 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함께 가면 저들도 쉽게 발작하지 못할 겁니다.”
“금환이가 오시에 정식으로 성주 위에 취임할 거다. 그전에 대충이라도 정리했으면 싶다만.”
“아예 끝내 버리죠, 뭐.”
고개를 끄덕이려던 북궁만호가 고갯짓을 멈추고 눈을 치켜떴다.
“응? 뭐라? 설마 그때까지 놈들과의 싸움을 끝내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못할 거 뭐 있습니까? 어르신이 도와주면 더 빨리 끝날 것 같은데, 어때요? 함께 가실래요?”
“가능하겠느냐?”
“한번 해보죠, 뭐. 기왕이면 깨끗하게 정리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누가 그걸 모르나? 그만큼 힘든 일이니까 그렇지!
이충신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카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네만, 너무 무리하다 보면 역효과가 날지 모르네.”
“좌우간! 그 일은 제게 맡겨두십쇼. 그들을 삶아먹든 구워먹든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이무환은 몇 마디로 세 사람의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세 사람을 둘러보며 또 하나의 용건을 꺼냈다.
“별원에 황산검문의 제자들이 와 있다는 거 알죠?”
“알고 있네. 아우를 찾아온 거 같던데, 왜 온 것인가?”
“저를 찾아온 것은 맞는데, 용건은 제가 아니라 구룡성에 있지요.”
“무슨 말이지?”
이무환은 구강의 풍강표국이 표물을 강탈당한 일에 대해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했다.
“…어쨌거나 구룡성의 무사들이 관여한 일이라서 구룡성도 발뺌할 수만은 없는 일이 되어버렸지요. 해서 제가 원만하게 일을 해결해 볼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이금환의 표정이 무겁게 굳어졌다.
“음, 정말 그리되었다면 본 성으로서도 나 몰라라 할 수만은 없는 일이군.”
“저들이 바라는 것은 두 가집니다. 하나는 구룡성의 공식적인 사과. 또 하나는 피해에 대한 보상.”
보상이야 어려울 것이 없었다.
문제는 공식적인 사과였다.
이충신이 눈살을 찌푸린 채 의견을 말했다.
“충분한 보상을 해주는 것만으로 끝낼 수는 없겠나?”
“고개 한 번 숙이면 될 것을 뭐 그리 어렵다고 그러십니까?”
“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네.”
“왜요? 체면이 상할까 봐서요? 속이 다 썩은 마당에 체면은 무슨 개떡 같은 체면 타령입니까?”
비꼼이 완연한 말투.
이충신의 눈에 노기가 떠올랐다.
“자네 정말……!”
그때 이금환이 손을 들어 두 사람을 말렸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숙부.”
이충신은 차마 이금환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이를 악물고 화를 참았다.
이금환의 눈이 이무환을 향했다.
“원한다면 고개를 숙일 것이네. 천룡부의 주인이 아닌, 구룡성의 차대 성주로서 말이야.”
이충신이 놀라 소리쳤다.
“부주!”
하지만 이금환은 여전히 이무환만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
“잘못을 했다면 당연히 사과를 해야겠지. 하나 만인 앞에서 하기에는 때가 좋지 않네. 그러니 따로 만나서 했으면 하네. 그 정도는 그들도 이해해 줄 거라 생각하네만.”
그 정도면 최선이라고 봐야 했다. 솔직히 황산검문도 구룡성주의 사과를 받아낼 가능성은 반의반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 정도면 뭐, 저들도 이해할 거유.”
‘사실 나야 합의금이 더 중요하지.’
합의금의 오 할이 자신 것이다. 그것만큼은 최대한 받아낼 생각이었다.
‘그 돈이면 상산에 커다란 장원을 세울 수 있을 거야.’
꼬맹이도 많이 받아내라고 했잖아?
이무환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미꾸라지를 잡으러 가야 할 때였다.
그런데 막 돌아서려던 그가 눈빛을 반짝이더니 이금환에게 뜬금없는 요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