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7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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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68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75화
175화
영호승이 대답하고, 광룡사위가 사방으로 흩어진 직후, 이무환의 주위로 각 부의 부주들이 몰려왔다.
“괜찮아?”
이금환이 제일 먼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무환은 힐끔 그를 보고 툭 쏘듯이 말했다.
“싸우지도 않은 사람이 옷이 그게 뭐요?”
이금환의 옷 여기저기 핏자국이 묻어 있다. 싸움 때문에 묻은 것이 아니다. 상황을 정리하며 부상자들을 돌보다 보니 묻은 것일 뿐.
무안한지 이금환이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미안하게 되었네. 나도 싸우고 싶었는데…….”
이무환이 눈을 치켜뜨며 이금환의 말을 싹뚝 잘라 버렸다.
“누구 피 말라 죽으라고 형이 싸워? 아마 그랬으면 저 양반 머리 좀 아팠을 걸? 나도 그렇고 말이지.”
이무환이 턱짓으로 북궁만호를 가리키자, 북궁만호가 버럭 소리쳤다.
“이놈아! 저 양반이 뭐냐, 저 양반이?”
“그럼, 이 양반이라고 해요? 괜히 신경질이셔. 에이, 할아버지라고 부르려고 했더니 하지 말아야겠네.”
제갈무진과 철군평은 웃지도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광룡의 말장난에 핏대가 솟은 게 어디 한두 번인가?
하지만 이무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제길, 우리가 그만큼 처리해 줬는데도 피해가 그렇게 많다니. 대체 그동안 뭐 한 겁니까? 뭔가를 얻고 싶었으면 힘도 키웠을 거 아닙니까?”
제갈무진과 철군평의 눈꼬리도 치켜떠졌다.
그러나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누구처럼 눈앞에 뻔히 드러난 사실을 부정할 정도로 낯이 두껍지 않았으니까.
다행히 이무환은 두 사람을 더 몰아붙이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좌우간, 나는 두더지 잡으러 갈 것이니 당신들은 사람들을 모조리 불러서 이곳이나 지키고 있으쇼. 엉뚱한 생각을 하는 작자들이 있을지 모르니까.”
“두더지라면……?”
“설마 저놈들이 전부일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어떤 이유로든 천세도인이 제자에 의해 폭마단을 강제로 복용했다. 그럼 그자가 남아 있다는 말. 더구나 그 혼자 그곳에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제야 말뜻을 알아들은 제갈무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찾아냈나?”
“찾아냈으니까 잡자는 거 아뇨? 빨리 사람들이나 데려오쇼. 놈들이 도망가기 전에 잡아야 하니까.”
“알겠네.”
“아! 그리고 제갈 부주님은 나와 함께 갑시다. 들어가는 곳에다 무슨 짓을 해놨을지 모르니까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제갈무진의 눈빛이 찰나간 흔들렸다.
건성으로 대충 일을 처리하는 것 같아도 그 안에 철저한 계산이 들어 있었다.
그러한 점이 제갈무진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얼굴 보는 사이에 뒤통수 때리고도 남을 놈이야.’
그는 방양고를 불렀다. 통로가 둘이라면 또 하나의 통로를 맡을 사람으로 방양고 이상 갈 사람이 없었다.
“양고, 자네가 나와 함께 가세. 그리고 척, 잠시만 네가 와룡을 지휘해라.”
3
수룡단의 집무실에서 동방휘와 마주 앉은 호연청은 골이 지끈거렸다.
“그놈이 아무래도 우리를 의식한 것 같소.”
동방휘의 얼굴에서도 짜증이 잔뜩 묻어 나왔다.
“으음, 정말 여우보다 골치 아픈 놈이오.”
두 사람은 천세도인과 광룡의 싸움이 끝나기 직전에 도착했다. 그 이전에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자신들 역시 잠풍련의 척살대상이 아닌가 말이다.
더 염려되었던 점은, 자칫 들키기라도 하면 광룡이 그들까지 끌어들일 거라는 점이었다.
누구 좋으라고!
그들이 도착했을 때, 천룡부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의 숫자만도 이천에 가까웠다. 마룡부와 도룡부와 검룡부의 무사도 있었고, 삼단의 무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서로 눈치를 보며 어느 누구도 쉽게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마룡부와 도룡부는 검룡부를 의식하고, 검룡부는 거꾸로 그들을 의식했다.
두 사람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도룡부의 구자천이 검룡부를 견제하라는 광룡의 부탁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걸.
어쨌든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천하를 뒤흔들 일대 격전을 구경하지 못했다.
하기에 그저 사람들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고 구룡성이 뒤집힐 정도의 싸움을 본 것 때문에 그런 표정인가 보다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금환의 외침이 천룡부 안에서 터져 나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그때부터 일어났다.
구룡성의 기재라 불리는 청년들이 일제히 이금환의 명에 한소리로 외치는 것이 아닌가!
그뿐이 아니었다. 곧 십이지부장들도 우렁찬 대답과 함께 이금환의 명을 좇아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가 이상하게 흐르기 시작하자 두 사람은 잔뜩 굳은 채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했다.
점차 천룡부 안쪽에서 소란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주백천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싸우는 소리가 멈췄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상황 종료.
두 사람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무환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엉뚱한 생각을 하는 작자들이 있을지 모르니까.”
두 사람은 그 말을 듣고, 그 자리를 물러나 수룡단으로 돌아왔다. 얼굴이 잔뜩 굳은 채.
답답한지 동방휘가 차를 한입에 털어 넣고 물었다.
“호 단주의 사람들은 아직 안 왔소?”
“곧 올 것이오. 상명이 돌아와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답답한 것은 호연청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만지작거리던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광룡, 그놈의 몸 상태를 알아야 일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을 텐데…….’
모용상명이 황보광 등과 함께 돌아온 것은, 호연청과 동방휘가 천룡부에서 발길을 돌린 지 반 시진이 다 되어서였다.
그들이 돌아오자 호연청이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광룡과 천세도인의 격전에 대해 말들이 많던데, 자세히 말해보거라.”
모용상명의 목소리에서 갑자기 힘이 빠졌다.
“못 보셨습니까?”
동방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가보니 거의 끝났더군. 그런데 왜 그런가?”
일단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모용상명이 마른 입술을 떼었다.
“솔직히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광룡이 잠풍련의 고수들 사이를 누빌 때 천세도인이 나타났는데…….”
그의 보고가 이어질수록 호연청의 주름살이 늘어만 갔다.
그러다 광룡과 천세도인의 격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의 상황을 듣고는 주름살이 다 펴질 정도로 경악했다.
모용상명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천하를 진동시킬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와중에도 모용상명이 과장해서 말한다 생각했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한쪽에 묵묵히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정말 조카 말대로…….”
그러나 그는 말을 다 내뱉지도 못했다.
헌원숭과 소천득, 황보광이 약속이라도 한 듯 바위처럼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사람이오.”
“걱정이오. 전에 그와 승부를 내기로 했는데…….”
“주백천과 승부를 내지 못했소. 하나 그는 주백천과 비교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소, 호 형.”
이무환을 팽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던 호연청이 아니던가.
그는 갑자기 걱정이 태산처럼 쌓였다.
그냥 놔둬야 하나? 그런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가 천룡부와 모종의 관계에 있다는 걸 아는 한 목적을 위해서는 놔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 호연청의 눈이 모용상명을 향했다.
“설마 천세도인과 싸우고 멀쩡한 것은 아니겠지?”
“천세도인과의 싸움에서 상당한 내상을 입었습니다. 아닌 것처럼 움직이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지닌 무공의 반도 쓸 수 없을 정도의 중상처럼 보였습니다.”
호연청의 눈이 다시 헌원숭 등을 향했다.
세 사람이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생각이라는 뜻.
호연청과 동방휘의 얼굴이 밝아졌다.
광룡이 무공의 반을 상실하고 깊은 내상을 입었다?
그렇다면 천세도인이 아니라, 환우사천을 때려죽인 광룡이라도 상관없었다. 자신들 중 누구라도 제거할 수 있을 테니까.
정 안 되겠으면 둘이 손을 쓰면 될 일.
모용상명을 바라보는 호연청의 입가로 하얀 살소가 번졌다.
“다행이군. 그래, 놈은 언제 돌아온다고 하더냐?”
4
지하 통로를 빠져나온 이무환은 일단 천룡부 별원에 둥지를 틀었다. 말로는 뒷정리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와중에 엽상을 비롯한 수룡대의 일부와 구룡수호단은 수룡단으로 돌려보냈다.
수룡단에 일할 사람이 없을지 모르니 보낸다는 말과 함께. 물론 그 말 역시 사람들은 반밖에 믿지 않았다.
그렇게 이무환은 수룡단과의 관계를 깨끗하게 끊어버렸다.
호연청은 수룡대와 구룡수호단이 돌아오자 즉시 이무환을 호출했다.
하지만 수룡전에 보고하러 나타난 사람은 북리웅이었다.
그의 보고가 호연청의 심장을 철렁 떨어뜨렸다.
“광룡이 저희만 돌려보내고 자신은 천룡부에 남았습니다.”
“천룡부에 남았다고?”
“예, 단주. 천룡부가 안정될 때까지 만이라도 잠시 그곳에 머무르겠다고 했습니다.”
모용상명이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들만 보낸 것이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중상을 입었다 했다. 하기에 돌아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광룡의 힘을 무력화시킬 작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룡부에 거처를 마련하고 눌러앉다니!
잠시 동안이라고 하지만, 광룡의 성격상 믿을 수 없는 말이다.
호연청의 입에서 상소리가 절로 나왔다.
“빌어먹을! 상명, 놈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자세히 알아봐라!”
“예, 숙부.”
5
별원 하나를 통째로 차지한 이무환은 느긋이 차를 들이켰다.
천룡부의 차맛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광룡대에 있는 것을 가져와야 하는데, 엽상이 제대로 가져올지 모르겠네.”
그랬다. 가지 않겠다는 엽상을 보낸 것은 다름 아닌 차가 든 자루 때문이었다.
남들이야 그 말을 듣고 어이없어했지만, 이무환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크크. 지금쯤 골치가 좀 아플 거다, 호연청.”
킬킬대며 차를 한 모금 홀짝인 이무환의 눈빛 깊은 곳에서 싸늘한 빛이 일렁였다.
“밀천회라고? 흥! 딱 한 번의 기회를 줄 거야, 호연청. 그것도 그동안 잠풍련 놈들을 견제해 온 점을 정상참작해서 기회를 주는 거라는 걸 알아야 할 거야.”
그때 문밖에서 영호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총대주, 담 궁주께서 오셨습니다.”
담사황은 찻잔을 내려놓고 이무환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왜 그렇게 보시는 거요?”
“후우, 도무지 자네 얼굴을 보면 볼수록 살아온 세월이 헛되게 느껴지는군.”
아무리 봐도 얼굴만 번지르르한 말썽꾸러기 한량 같은 얼굴이다. 그런데 저 속 어디에 천 년 묵은 능구렁이가 들어 있는 걸까?
오십칠 년의 삶으로도 이무환의 본질을 알아볼 수 없다는 것에 자괴감이 느껴질 정도다.
‘좌우간 강호사에 별종이 하나 나온 것만큼은 분명하군. 광룡이라… 딱 어울려.’
담사황의 속도 모르고 이무환은 별거 아니라는 듯 환하게 웃었다.
“제가 좀 잘생겼지요.”
그래, 너 잘났다.
담사황은 입안에서 그 말이 맴돌았지만, 겉으로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언제 한번 장사에 오지 않겠나? 내게 딸이 하나 있는데…….”
“잠깐!”
이무환이 눈을 크게 뜨고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말을 멈춘 담사황은 의아한 표정으로 얼굴이 굳어 있는 이무환을 주시했다.
“왜 그러는가?”
“저는 오직 옥이뿐이었지요.”
그래서?
“그런데… 지금 꼬맹이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꼬맹이?
“혹시라도 따님과 저를 맺어주시려 한다면, 포기하십시오. 저는 둘이면 충분하고, 에, 또… 둘 다 아주 사납거든요.”
누가 딸을 준다고 했나?
담사황은 어이가 없어 입이 벌어지려는 것을 억지로 닫고 나직이 말했다.
“내 말은, 기왕 올 거면 딸 혼인식 즈음해서 와줄 수 있냐는 거네.”
이무환이 씨익 웃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 하, 하. 난 또…….”
바로 그때, 영호승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
“총대주, 남궁 소저가 천룡부에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순간 이무환이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