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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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74화
174화
“가면을 쓴 자가 말해주더군. 그러니 죽더라도 너무 궁금해하지 마. 퉤!”
이무환은 무심히 말하고 피 섞인 침을 뱉어냈다.
그러고는 무심한 눈으로 천세도인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묻는다고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고, 시간이 없으니 이제 특조대주로서의 임무를 수행해야겠어. 네 목숨만큼은 내가 거두고 싶었거든.”
놔둬봐야 일각 이상 살지 못할 목숨.
천천히 묵린도를 쳐든 이무환은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천세도인! 구룡무제 이건천 공의 시해 교사죄로 그대를 즉형에 처한다!”
찰나! 묵린도가 허공을 수직으로 갈랐다.
부들부들 떨던 천세도인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뇌가 갈라지는 충격에 반사적인 행동이었을 뿐, 그는 두 번 다시 자의적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혈지겁난의 주인공 중 하나, 혈악 야율모궁.
마침내 그가 죽은 것이다.
담사황과 금화산의 격전은 반 각가량이 더 지나고, 삼십여 초가 더 흐른 다음에야 끝이 났다.
담사황은 헌원숭과의 대결 이후 평생 두 번째로 만겁귀원공을 펼치고 나서야 금화산의 몸을 보호하고 있던 거령풍이라는 괴공을 깰 수 있었다.
그만큼 금화산이 상대하기 어려웠다는 말과도 같았다.
얼굴이 창백해진 담사황은 고개를 저으며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저런 괴물 같은 자와는 두 번 다시 싸우고 싶지 않군. 십 년은 더 늙은 것 같아.”
그러한 마음은 헌원숭이나 소천득도 비슷했다. 그들은 천지쌍노가 도주하는 것조차 막지 못한 것이다.
도주한 사람은 천지쌍노 외에도 대여섯 명이 더 있었다. 현 상태에서 빠져나갔다는 것은 그만큼 강한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천룡부에서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 게 우선이기에 그들을 끝까지 추적하지는 않았다.
이제 남은 싸움은 황보광과 주백천의 대결뿐이었다.
두 사람은 대결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었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주백천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겼을 경우 상황이 바뀔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신룡부의 무사들은 이미 주용천에게 모두 무릎을 꿇은 상태. 어차피 모든 게 무너진 상황이다.
우내십존 중 한 사람인 황보광과의 승부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은 황보광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격전이 벌어지는 사이 제갈무진은 잠풍련의 부상자를 제압하도록 명을 내렸다.
이미 대부분이 죽고 살아남은 자는 이십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콰광!
천궁자령공과 개천권강이 부딪치며 두 사람 주위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삼 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선 주백천과 황보광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얼굴을 씰룩이던 황보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주백천.”
우내십존 중 능히 중간 이상은 간다 생각했다.
그 말인즉, 천하에 알려진 고수 중 열 손가락에 들어는 절대고수라는 말이다.
그런 자신이 백 초가 지나도록 승부를 내지 못했다는 것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대 역시. 우내십존이 왜 강호를 진동시키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군.”
주백천도 잇새로 중얼거리듯 말하고 이를 악물었다.
천궁자령공을 완성한 후로 자신의 적수는 환우사천과 천세도인을 비롯한 삼악 정도라 생각했다. 더한다면 석치상을 죽이고 구유도문을 쓸어버린 광룡 정도라고나 할까?
그런데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광룡과 천세도인의 대결은 자신이 얼마나 헛된 망상 속에서 살았는지 알게 해주었다. 폭마단에 의해 천세도인의 광기가 폭주했다는 것은 알지 못한 채.
그러함에도 황보광만은 이기고 싶었거늘, 그 정도는 되어야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것 같았거늘, 그것도 쉽지가 않다.
가슴이 타고, 머릿속이 텅 빈 기분.
자괴감에 몸과 마음이 터져 나갈 것만 같다.
갑자기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웃음이 미칠 것처럼 터져 나왔다.
“크크크크, 와하하하하하! 정중지와(井中之蛙)라더니, 참으로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구나!”
그는 황보광을 앞에 두고도 하늘을 쳐다보며 웃어댔다.
“우하하하하! 주백천아, 주백천아! 네가 바로 개구리로다!”
순간이었다.
광소를 터뜨리는 주백천의 입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헛! 저, 저…….”
사람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고 있는 사이, 주백천은 가슴을 피로 적신 채 주용천을 응시했다.
“용천! 모든 뒤처리를 너에게 맡기마!”
그러고는 사십 명의 승룡에게 둘러싸인 채 내력을 다스리고 있는 이무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광룡! 나 하나로 모든 것을 끝내자!”
찰나!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손을 쳐든 주백천이 자신의 천령개를 내려쳤다.
퍽!
너무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리는 주백천을 보고 할 말을 잊었다.
그때 이금환의 목소리가 천룡부에 울려 퍼졌다.
“신룡과 금룡은 누가 뭐래도 구룡의 일부요! 그것만큼은 변함이 없을 것이오! 모두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시오!”
제갈무진도 이금환의 뜻을 알고 사람들에게 명을 내렸다.
“죽은 사람들을 한쪽으로 모으고, 부상자들은 속히 치료토록 하시오!”
천룡과 와룡과 철룡과 창룡의 무사들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잘잘못은 나중에 가려도 된다! 속히 사상자들을 챙기도록 해라!”
주인을 잃고 엉거주춤 서있던 신룡과 금룡의 무사들은 주용천의 명이 떨어지자 침중하게 굳은 얼굴로 동료들의 시신과 부상자를 챙겼다.
구룡성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쟁은 그렇게 시작된 지 반 시진이 조금 넘어서야 끝이 났다.
천룡부를 지지하는 자들의 승리로.
그러나 환호하는 사람도, 밝게 웃는 사람도 없었다.
죽은 사람만 삼백 명에 이른다. 그중 이백 가까이가 구룡성의 사람들, 한때 웃으며 마주쳤던 동료들인 것이다.
하거늘 어찌 웃음이 나올 수 있으랴.
제9장. 강호에서 보자, 광룡!
1
아마 그의 마음이 이렇듯 격동한 것은, 스스로 설 수 있다 생각한 이후 처음일 것이었다.
“말도 안 돼!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환비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기광이 황촛불의 흔들림을 따라 출렁였다.
누구보다 그의 강함을 자신이 잘 알았다.
천하에 적수가 몇 없는 천세도인이다.
환우사천과 사우와 묵운의 주인만이 그와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을 뿐이라 여겼다.
솔직히 광룡이 석치상을 죽였지만, 천세도인의 적수는 안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천세도인의 약에 폭마단 세 알을 탄 것은, 보다 확실하게 천룡부를 피로 씻어내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계산대로라면, 천세도인은 평소의 두 배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할 것이었다. 적어도 한 시진 이상은.
그런 천세도인을 누가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모두 죽을 것이다. 천중십마라는 자들도, 우내십존이라는 자들도, 구룡부의 부주라는 자들도. 그리고 그 가운데 광룡도 있을 터였다.
자신은 나중에 피로 뒤덮인 천룡부로 갈 생각이었다. 신룡부주 주백천의 제자라는 두 번째 신분으로.
그곳에 나타나 폭주한 공력이 대부분 소실된 천세도인을 죽이면 일차적인 계획이 마무리된다.
우내십존과 천중십마가 죽은 호연청과 검룡부 정도는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단숨에 구룡성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혈겁의 중심에서 광분해야 할 천세도인이 광룡의 손에 죽고, 자신은 나서보지도 못했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자신이 광룡의 무위를 잘못 알았단 말인가? 아니면 폭마단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으음, 미완성인 폭마단을 너무 과신했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주군, 주백천과 금화산도 무너졌다 합니다. 놈들이 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환비의 옆에 서 있던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환비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천세도인은 지난 이십 년 동안 친위대 성격의 삼백여 고수를 키웠다. 그리고 자신은 그들 중 핵심 고수 상당수를 오 년 전부터 하나씩하나씩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천세도인의 묵인하에.
옆에 서 있는 중년인도 그들 중 하나였다.
“마곡, 남은 사람이 몇이지?”
“아흔다섯 명입니다.”
아흔다섯의 고수.
천세도인의 무위를 믿고 뒤처리를 위해 아꼈다.
만약 이들이 모두 갔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자신이 움직였다면 수룡단과 검룡부 역시 본격적으로 움직였을 테니까.
오히려 천세도인이 기대치에 못 미친 지금 같은 결과라면 승리는 요원한 일이라고 봐야 했다.
어쨌든 천세도인이 죽은 지금은 망자계치(亡子計齒)라,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나 마찬가지.
환비는 미련을 바로 털어버렸다.
“즉시 비로(秘路)를 통해 구룡성을 빠져나간다. 그대와 혈소가 그들을 둘로 나누어 인도하도록 해라.”
“예, 주군. 하면 통로를 먼저 봉쇄하겠습니다.”
“아니, 신룡부 쪽의 통로만 무너뜨리고 나머지는 그대로 놔두어라. 뚫고 들어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니 차라리 지금은 그것이 낫다.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빠져나간 뒤에는 비로를 무너뜨려라.”
“예, 주군.”
환비는 마곡이 대전을 나간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것이 아깝긴 하지만, 나는 아직 젊다.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아. 세상은 넓으니까.’
그의 입가로 하얀 웃음이 떠올랐다. 대범하게 웃음으로 모든 것을 털어내겠다는 듯.
“광룡, 이번에는 네가 이겼다. 하나 다음에 만나면… 절대 지지 않을 것이다. 강호에서 보자, 광룡.”
그러나 그 웃음에 분노가 섞였다는 것을 자신조차 느끼지 못했다. 치욕의 분노가 말이다.
2
천룡부의 대연무장이 대충 정리될 즈음, 이무환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공력이 반 정도밖에 회복되지 않았지만 마냥 시간을 보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는 것이다.
“멋쟁이.”
이무환이 갑자기 영호승을 부르자, 근처를 정리하던 사십여 명의 승룡 중 대여섯 명이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남들에게 멋쟁이 소리 몇 번쯤 들어본 자들인 듯했다.
하지만 이무환이 찾는 멋쟁이는 오직 한 사람이었다.
영호승이 어깨를 펴고 고개만 슬쩍 숙였다.
“예, 총대주!”
그의 옆에는 막위와 단우경과 혁수린이 서 있었다. 상황이 끝나자 승룡들도 주위를 정리하고, 광룡사위를 비롯해 부상이 덜한 특조대원들이 호법으로 남은 상태였다.
광룡사위 모두가 피로 범벅된 모습. 거기다 부상도 작지 않은지 여기저기 상처가 보이고, 얼굴도 창백했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어느 때보다 밝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쯔쯔쯔, 완전 걸레가 됐군. 깨끗하게 만들려면 시간 좀 걸리겠어.”
비속한 말투에 주위를 정리하던 승룡들이 다시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물론 무설강과 제갈신걸 등 특조대원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정도 말투야 뭐.
모두가 그런 얼굴로 담담할 뿐.
“특조대 피해가 얼마나 돼?”
“들은 말로는 광룡대원 중 일곱, 사십팔객 중 열여덟, 구룡수호단에서 스물다섯 명 정도가 죽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수룡단에서 충원된 자들 중 열세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모두 마흔아홉이 죽었다. 물론 부상자는 더 많을 것이고, 그들 중에서도 사망자가 몇 명 정도는 더 나올 것이 분명했다.
특조대가 잠풍련의 고수들을 집중 공격했으니 어쩔 수 없는 피해였다고 해도 예상보다 많은 피해였다.
“지금 감 씨가 두더지 굴을 감시하고 있겠지?”
“그럴 것입니다.”
“좋아,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 아예 뿌리를 뽑아버리겠어.”
“예, 총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