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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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6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68화
168화
“최대한도라고 해봐야 자네가 다 알고 있는 정도지. 좌우간 자네가 맡겠다니, 그리 알겠네.”
호연청이 대충 얼버무리고 결정을 지어버렸다.
그때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황보광이 불만을 터트렸다.
“호연 형, 그럼 우리 모두 저 친구의 명을 들어야 한단 말이오?”
“일단 잠풍련을 무너뜨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네. 놈들만 무너뜨리면 신룡부와 금룡부는 걱정할 것이 없네. 하루면 되니 광룡대를 돕도록 하게.”
하후영과 정화풍 등도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눈에서 번개를 뿜어내든 말든, 이무환은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흐흐, 이제 우내십존 중 한 사람도 내 쫄병이 되었군.’
3
콰당!
의자가 한쪽으로 날아가 산산이 부서졌다.
분노에 찬 목소리가 신룡전을 울렸다.
“빌어먹을! 어떻게 이런 일이……! 내가 그따위 애송이에게 밀리다니!”
분노한 주백천이 이를 갈며 소리치는데도, 금화산은 커다란 덩치를 의자에 묻고 눈을 실처럼 가늘게 떴다.
“구자천이 확실한 거 같소, 주 형. 지금 특조대가 도룡부에 머물고 있다고 하오.”
주백천이 이를 으드득 갈았다.
“구자천! 네놈이 감히 나를 배신하다니!”
구자천이 천룡부 편을 들었든, 아니면 기권했든 그것은 상관없었다. 그가 자신들 편만 들었어도 일이 이렇게 엉뚱하게 진행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래선지 주백천은 그 누구보다 구자천에게 더 분노가 끓어올랐다.
“괘씸한 놈! 내 그놈만큼은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오.”
금화산은 두꺼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고는, 통통한 손가락으로 콧등을 문질렀다.
“어쨌든 문제는 이제부터요. 하루의 말미를 얻긴 했소만, 계획이 있소?”
주백천의 두 눈에서 자광이 일렁였다.
“놈들이 피를 바란다면 바라는 대로 해줘야겠지요.”
“북궁만호가 나타난 이상 예상치 못했던 자가 또 있을지 모르오. 가능하겠소?”
금화산의 말이 왠지 모르게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들린다.
주백천은 자광이 서린 눈으로 금화산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그 정도 능력도 없을 거라 생각하시오?”
“내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소?”
톡톡톡.
조용히 앉아 있던 천세도인이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두들겨서 주백천을 진정시켰다.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다른 길이 없네. 오늘 밤에 모든 것을 끝내도록 하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금화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두툼한 살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미간에 두 줄기 주름이 그어져 있었다.
“호연청은 물론이고, 십이지부의 지부장들이 모두 몰려와 있는데, 그들에 대한 대비책은 있습니까?”
천세도인의 기다란 눈썹 아래서 칼날 같은 눈빛이 번뜩였다.
“혼전이 되면 그들도 쉽게 움직이지 못할 거네. 물론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싹 쓸어버리면 더 좋겠지. 자네들이 확실하게만 움직여준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지금껏 힘으로 밀어붙이는 일은 신중을 기했다.
엄청난 피해가 날 터, 남 좋은 일만 시켜줄 게 분명했으니까.
게다가 구룡성주 선출에서의 승산 또한 확실해 보였으니 굳이 무리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앞뒤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이판사판, 밀리면 끝장인 상황. 천마교나, 사우천이나, 정천무림맹을 막아내는 것은 나중 일이었다.
주백천이 먼저 단호한 결심을 잇새로 갈아 뱉어냈다.
“신룡부의 모든 것을 걸지요.”
벼랑 끝에 선 금화산도 커다란 머리통을 위아래로 끄덕였다.
“금룡부도 생사를 함께하겠습니다.”
4
천룡부는 여느 곳과 달리 고요했다.
처음에는 새롭게 부주가 된 이금환이 구룡성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에 천룡전이 무너질 것처럼 환호했었다. 그러나 환호도 잠시, 곧 죽음 같은 침묵만이 천룡부를 짓눌렀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역천사룡이 하루를 덧없이 보내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마룡부와 도룡부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빠진다 해도 신룡부와 금룡부, 그리고 암중에 도사리고 있는 잠풍련을 천룡부 혼자서 막아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과거와 달리 검룡부와 수룡단마저 도움을 바랄 수 없었다. 자신들이 먼저 검룡부에 등을 돌렸으니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이금환을 지지한 곳이 세 곳이나 된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도움도 바람으로 끝날지 모르는 일이지만.
침묵에 눌린 천룡전 안에는 아홉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이금환과 북궁만호, 이건천의 사촌동생인 이강천과 장로 이충신, 그리고 이금환을 따르기로 맹세한 천룡부의 원로들과 간부들이었다.
이충신이 먼저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을 깼다.
“오늘 밤이 고비네. 저들은 절대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것이야.”
“저도 알고 있습니다, 오숙.”
알고 있다면서 큰 걱정을 하지 않는 눈치다. 이충신은 그런 이금환을 보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하겠네. 차라리 검룡부를 밀고 나중을 생각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저라고 해서 왜 오숙의 고충을 모르겠습니까. 하나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검룡부를 밀고 있는 자들이 누군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검룡부를 밀고 있는 자들이라니? 수룡단주 호연청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호연청이 끌어들인 자들을 말하는 것인가?”
“오숙께선 호연청이 누구를 끌어들였는지 아십니까?”
담담하면서도 진중한 이금환의 질문에 이충신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명부신사 헌원숭과 절명마수 소천득이 호연청을 돕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그들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수룡단에 와 있다는 외부인들을 말하는 건가? 대체 그들이 누군데 부주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인가?”
그동안 검룡부와 창룡부, 수룡단과 우호적인 관계를 암암리에 이끌어온 이충신이다. 그런 그조차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판국이니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원로인 이강천이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호연청이 끌어들였다는 자들이 누군가, 부주?”
이금환이 북궁만호를 바라보았다.
“어르신이 말씀해 주시지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북궁만호가 원로와 간부들을 둘러보았다.
“지금 수룡단에 개천신권 황보광이 와 있다. 설마 그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우내십존 중 한 사람인 개천신권 황보광.
누가 그를 모를까?
이충신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개천신권이 수룡단에 와 있단 말입니까, 어르신?”
“그자뿐이 아니다. 도왕 하후중천의 아들인 하후영이라는 아이와 일도진천검이라 불리는 정화풍 등 중원에서 내로라하는 자들이 다수 와 있지.”
말을 멈춘 북궁만호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들은 황보광이 어디에 속해 있는 줄 아느냐?”
개천신권 황보광이 황보라는 성을 쓰기는 하나, 무림맹의 중추 세력 중 하나인 황보세가의 사람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더구나 하후중천과 정화풍도 무림맹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북궁만호는 그들이 어느 세력의 사람이라는 듯 말한다.
우내십존이 속한 미지의 세력이 있다는 것. 그것은 생각만으로도 경악할 일이었다.
“그들이 어떤 세력에 속해 있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이충신이 다시 묻자, 북궁만호가 낯선 이름을 하나 꺼냈다.
“밀천회라고 들어봤느냐?”
“밀천회요?”
이충신은 물론이고, 이강천 등 천룡부의 원로와 간부들이 눈만 멀뚱히 뜨고 북궁만호를 바라보았다.
밀천회(密天會)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것이다.
북궁만호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긴 너희들이 알 리가 없지. 나 역시 건천의 부탁으로 강호에 나간 후 이름을 아는 데만도 몇 년이나 걸렸으니까.”
마침내 무운천수 북궁만호가 왜 삼십 년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밝혀졌다.
천룡부의 원로와 장로들은 해연히 놀란 눈으로 북궁만호를 바라보았다.
건천의 부탁.
구룡무제가 북궁만호에게 뭔가를 알아보도록 명이나 다름없는 부탁을 한 듯했다.
대체 어떤 일인데 천하의 북궁만호가 그 이름을 알기 위해 몇 년 동안이나 조사를 했단 말인가?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듯 북궁만호가 설명을 이어갔다.
“밀천회는…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정천무림맹의 극비 조직 이름이다. 황보광은 바로 그 밀천회의 다섯 거두(巨頭) 중 하나지.”
대경한 이충신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럼… 호연청이… 정천무림맹의 비밀 조직을 끌어들였단 말입니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천무림맹을 끌어들였다고 봐야겠지.”
정천무림맹이 제아무리 천하정파의 결집체라 하나, 구룡성의 일에 그들이 관여하는 것은 구룡성의 무인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이강천이 분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동안 혼자서 구룡성을 위하는 것처럼 행동하더니, 결국 구룡성을 정천무림맹에 넘길 작정이었단 말입니까?”
“놈이 구룡성을 정천무림맹에 넘기려 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정천무림맹을 이용하려 한 것인지,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오늘이 지나면 윤곽이 드러나겠지만.”
그때 이금환이 입을 열었다.
“그 사실은 결정적일 때 터뜨릴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모두 입을 다물고 밖으로 그 말이 새지 않도록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들이 알면 일이 더 복잡해지니까요.”
“으음…….”
“알겠네, 부주.”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로와 간부들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이금환은 어제의 힘없는 천룡공자 이금환이 아니다.
천룡부의 부주이며, 대구룡성의 성주가 될 사람인 것이다.
장내가 다시 조용해지자 북궁만호가 입을 열었다.
“오늘 밤 놈들의 발호를 막지 못하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모든 무사들을 철저히 관리하도록 해라.”
이충신이 난색을 표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희 힘만으로는 저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
이금환이 하얗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우리들뿐이라면 어림도 없지요. 하나 오늘 천룡부에 손님들이 올 것입니다.”
이강천이 그 말뜻을 알고 눈을 빛냈다.
“부주를 지지한 곳에서 무사들을 보내주기로 했는가?”
“그렇습니다. 그들 역시 천룡부가 저들에게 무너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천외광룡이 광룡대를 이끌고 올 겁니다.”
“광룡이? 호연청이 그를 보내줄까?”
보내주지 않아도 이무환은 온다. 하지만 그 전에, 호연청으로선 천룡부를 돕는 시늉이나마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중에는 어떻게 변할지 몰라도, 당장은 구룡성 무사들의 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그것이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무조건 힘으로 누르려는 마도와 남의 눈을 꺼리며 명분을 찾는 정파의 차이다.
이금환으로선 천룡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구룡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적의 힘도 마다할 생각이 없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 또 다른 적의 힘으로 적을 치는 것도 과히 나쁠 것은 없지요.”
5
석양이 질 무렵, 이무환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 당신이 어쩐 일로……?”
찾아온 사람은 공은효였다. 무창에 있어야 할 공은효가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무환은 가슴 한구석에 싸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은효가 입을 열자마자 이무환의 몸이 엉덩이에 송곳이라도 꽂힌 것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소저가 성에 들어와 있소이다, 이 공자.”
“뭐요?!”
벌떡 일어선 이무환은 마치 문밖에 남궁산산이 서 있기라도 한 듯 방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꼬맹이가 무창에 있지 않고 성 안으로 들어왔다, 그 말이오?”
“그렇소이다.”
무진장 반가웠다. 심장이 배로 뛸 정도로. 하지만 지금은 마냥 반가워할 때만은 아니었다.
“아니, 이 꼬맹이가! 안전한 곳에 있으라고 했더니, 왜 말을 안 듣는 거야?!”
“저희도 무창에 머물기를 바랐습니다만,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꼭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지금 어디 있소?”
“백룡객잔에 있소이다.”
당장 달려가서 혼을 내고 싶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꼭 꼬맹이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게 문제지.
지금 구룡성 무인들의 눈과 귀는 세 군데로 집중된 상태였다.
천룡부, 신룡부, 그리고 수룡단.
수룡단을 바라보는 이유는 호연청보다 자신 때문이었다.
신룡부와 천룡부가 다툴 경우 수룡단, 정확히는 광룡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만큼 광룡의 움직임은 구룡성 모든 무인들의 관심사였다.
‘그래도 머리에 혹이 나도록 한 대 때려줘야 하는데…….’
그때 문득, 이무환은 이상한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몰래 들어온 꼬맹이가 왜 사람을 보냈을까? 분명히 자신이 화낼 거라는 걸 알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혹시… 꼬맹이가 나에게 특별히 전하라는 말 같은 거 없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