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6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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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물론, 그가 진짜 여 부주의 자식이라고 해도 저로선 용서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식이 아버지를 죽인 것이니까 말입니다.”
이무환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광룡사위에게 명을 내렸다.
“자, 우리는 이자를 데리고 본 단으로 가자고.”
그러고는 멍하니 서 있는 육도산을 바라보았다.
“그럼 여러분은 계속해서 창룡부의 부주를 뽑으십시오. 아! 제가 사람 하나 천거해도 되겠습니까? 실력도 괜찮아 보이던데.”
7
이무환이 여건평을 잡아 수룡단으로 데려가던 그 시각.
이십여 명이 서너 명씩 짝을 지어 구룡성 서문으로 들어섰다.
그들 중 중간에 들어온 왜소한 체구의 노인은 좌우를 둘러보더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왜 알리지 못하게 한 것이냐?”
“오빠는 모르는 게 좋아요. 조금 있으면 모든 게 끝나는데, 사실을 알면 일이 엉뚱하게 흐를지 모르거든요.”
“그건 그렇다만……. 그런데 네가 이곳에 왔다는 걸 알면 그가 많이 걱정할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구나.”
노인과 나란히 걷던 소녀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괜찮아요, 할아버지. 아마 제가 왔다는 걸 알면 오빠는 좋아 죽을 거예요.”
“후우, 네가 하도 우겨서 오긴 했다만, 솔직히 지금이라도 다른 곳을 물색했으면 싶다.”
“너무 걱정 마세요. 객잔에 머물면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거예요. 그리고 안 되겠다 싶으면 바로 빠져나가면 되니까, 설령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생각보다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거예요. 더구나 황산의 대협들께서 함께 계시잖아요.”
그건 그랬다. 황산검문의 제자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위험한 상황이 닥친다면 그들이 그녀를 보호할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이곳이 다름 아닌 구룡성이라는 것이었다.
“가요, 할아버지. 산산이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제6장. 구룡(九龍)의 선택
1
삼월 십일, 미시 초.
삼천의 구룡성 무사들이 천룡부를 에워쌌다.
고요함 속에 질서정연한 움직임이 더욱 무겁게 구룡성의 대지를 짓눌렀다.
그리고 오시 정각.
열 겹으로 둘러싸인 무사들의 도열을 뚫고 팔부의 부주들과 삼단의 단주, 십이 개 지부의 주인들이 천룡부로 모여들었다.
둥! 둥! 둥! 둥!
성문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서른여섯 번의 북소리가 울리고, 마지막 울림이 사라질 즈음 일성이 터져 나왔다.
“문을 닫아라!”
끼이이익! 쾅!
천룡부의 정문이 굳게 닫혔다.
천룡전의 거대한 대전에는 이십사 명이 앉아 있었다.
구부의 부주, 삼단의 단주, 십이지부의 지부장들. 그야말로 구룡성을 움직이는 중추 거물들이 모조리 모인 것이다.
구부의 주인들은 구룡성주를 뽑을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 삼단과 십이지부의 지부장들은 참관인으로서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각자 대동한 단 한 명의 호위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채 서있었다.
침묵 속에 시간이 흘렀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들은 담담했다.
그러나 담담한 눈빛 깊숙한 곳에서는 번갯불이 번쩍이며 상대의 머릿속을 탐색했다. 아마 머리를 갈라 속을 알 수만 있다면, 당장 달려들어서 상대의 머리를 가르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특히 주백천과 금화산은 호연청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속으로 이를 갈았다.
광룡 이무환. 그가 서있었으니까.
‘뭘 봐?’
이무환도 두 사람을 향해 눈을 한 번 부라리고는, 두 사람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모른 척 딴청을 부렸다.
제일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신룡부주 주백천이었다.
그는 묵묵히 앉아 있는 이금환과 양류한을 보더니 비릿한 조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뜻밖이군, 자네들이 천룡부와 창룡부의 대표로 오다니.”
이금환이 담담히 말을 받았다.
“중요한 것은 천룡령의 주인이 누군가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백천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두 눈이 가늘어졌다.
이충선과 이충현도 자신의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한다. 하거늘,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받는 이금환이다.
“의외군. 그동안 잘못 생각했어. 천룡부에 사람이 없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저 역시 잘못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이금환의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이금환을 바라보았다.
“저는 신룡부에 신룡이 사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신룡은 보이지 않고 땅속에 웬 악룡만 가득한 거 같더군요.”
주백천의 가늘어진 눈에서 새파란 노기가 번뜩였다.
반면 동방휘와 호연청 등은 속이 다 시원해졌다.
호연청이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자네도 알지 모르겠네만, 밤새 악룡의 무리들이 설치는 바람에 구룡성이 피로 물들었지.”
주백천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이금환을 노려보고는, 손을 뻗어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때, 천룡전 안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언뜻 봐도 백 살은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를 본 순간, 천룡전에 앉아 있던 반수가 벌떡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고, 누군가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맙소사! 저분은 무운천수 북궁만호 어르신이 아니신가?”
순간 앉아 있던 사람들마저 자리에서 튕기듯이 일어났다.
“어, 어떻게 오래전 본성을 떠나셨다는 저분께서……?!”
무운천수 북궁만호.
구룡무제 이건천의 외숙부이며, 삼십 년 전 이건천과 함께 구룡성주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던 절대의 고수가 바로 그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천룡부의 살아 있는 신화라 불렀다.
사십 년 전, 천마교와의 대회전에서 혼자 서른 명에 달하는 천마교의 고수들을 물리치고, 천마교를 강서에 묶어놓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비천룡!
그러나 그는 이건천이 구룡성주의 자리에 오르자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들은 그가 모습을 감추자 갖가지 억측을 했다.
어떤 자는 북궁만호가 구룡성주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구룡성을 떠났다고 했다. 또한 어떤 자는 천룡전에서 암암리에 그를 제거했다고도 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북궁만호가 모습을 보이지 않은지 삼십 년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북궁만호가 모습을 보이자, 주백천과 금화산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급히 전음을 주고받았다.
<주 형, 아무래도 상황이 이상하게 흐르고 있소. 왜 저 늙은이가 나타난단 말이오?>
<너무 걱정할 것 없소. 제아무리 북궁만호라 해도 구룡성의 법을 뒤집을 수는 없으니까.>
그사이 북궁만호는 걸음을 옮겨 이금환의 뒤에 서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동방휘에게서 멎었다.
“흘흘, 동방가의 별도 벌써 흰 머리가 반은 덮었군.”
동방휘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북궁만호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백천을 바라보았다.
“성주를 뽑는 자리라 들었네. 진행하지.”
“어르신, 어르신께서 주관하시지요.”
북궁만호는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웃음 지었다.
“아니네. 나는 천룡부의 호법으로 나온 사람이야. 그러니 예정대로 진행하도록 하게.”
주백천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럼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의 시선이 앞쪽으로 향했다. 맨 앞에는 북궁만호만큼이나 늙어 보이는 노인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금 장로님,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시작하지요.”
덩치가 금화산 못지않게 큰 그는 금룡부의 원로로, 현 구룡성의 원로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금교신이었다.
그는 북궁만호를 바라보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지 칼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마하니 자네가 아직도 천룡부에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구먼.”
“살다 보면 가끔 의외의 일이 벌어지곤 하지. 그냥 그렇게 아시게나.”
“클, 자네가 있는 줄 알았다면 이 일을 맡지 않았을 거네.”
“신경 쓰지 말고 진행하시게.”
“하아,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그렇게 해야겠지.”
금교신은 주름진 입술로 쓴웃음을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폈다.
곧 그의 입에서 나이 백두 살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우렁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대 구룡성주께서 불의의 일을 당하시는 바람에 성주 후계가 정해지지 않았소이다! 해서 이제부터! 구룡률에 따라 대구룡성 제오대 성주님을 선출할 것이오! 각 단체의 주인들은 그 결과에 무조건 따르겠다는 맹서를 해주시오!”
곧 구룡부의 부주들을 시작으로, 삼단, 십이지부장들이 그 어떤 결과가 나와도 구룡률에 따르겠다는 맹서를 했다.
구룡률에 대한 맹서!
맹서에 따른 무조건적인 복종!
그것이 곧 구룡성을 지탱해 온 정신이다.
이제 맹서를 한 이상, 어기면 모든 구룡성 무인들의 적이 될 것이었다.
오직 그에 대해서만큼은 구룡부주가 가진 면책권도 소용이 없었다.
맹서가 끝나자 금교신이 우렁찬 목소리로 일을 진행시켰다.
“먼저! 추천권이 있는 각 부의 부주들과 삼단의 단주와 십이지부장들은 구룡부주님들 중에서 차대 구룡성주가 될 분을 추천하기 바라오!”
제일 먼저 금화산이 통통한 손을 들었다.
“현재 본 성에서 신룡부의 주백천 부주 외에 어느 분이 더 구룡성주의 자리에 어울리겠소이까? 나 금화산은 주백천 부주를 추천하겠소이다.”
뒤이어 주백천이 손을 들고 말했다.
“허허허, 나보다는 금룡부의 부주께서 더 적임이외다.”
서로가 한편임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서로 간의 낯 뜨거운 추천이 오가자 장내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다시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호연청이 손을 들었다.
“검룡부의 동방휘 부주를 추천하겠습니다.”
세 명의 이름이 나온 후로는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금화산은 있으나마나 한 추천. 주백천과 동방휘의 이름이 나온 이상 더 나올 이름도 없었다.
금교신이 입을 열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추천이 더 없으면 세 분 부주님 중 한 분을 구룡성주님을 선출하겠소이다.”
그때였다.
창룡부를 대표해 나온 양류한이 손을 들었다.
“저도 한 사람을 추천하겠습니다.”
뜬금없는 그의 말에 모두가 양류한을 바라보았다.
특히 호연청은 모호한 표정으로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묘하게 흐르는 상황이다. 당연히 검룡부를 밀 줄 알았던 양류한이 추천을 하다니.
하지만 추천을 하는 거야 누가 뭐라 할 것인가.
“말해보시오.”
금교신의 말이 떨어지자 양류한이 고개를 돌려 한곳을 바라보았다.
“천룡부의 이금환 부주를 추천하겠습니다.”
호연청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동방휘도 눈살만 찌푸렸을 뿐, 살짝 떼었던 등받이에 다시 등을 기댔다.
주백천이나 금화산은 내심 기대했던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에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다못해 철군평이나 제갈무진을 추천했다면, 동방휘를 지지하는 세력 중 한 곳이라도 이탈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금환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마 자신들이 금화산을 동반 추천하는 걸 보고 무작정 한 사람을 추천한 것이리라.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묵묵히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그 후 더 이상 추천이 나오지 않았다.
금교신은 주위를 둘러본 후 선언하듯이 말문을 열었다.
“더 이상 추천이 없다면! 이제부터 부주들께선 한 분씩 앞으로 나와서 추천된 분 중 한 사람의 이름을 쓴 후 이 늙은이에게 주도록 하시오!”
2
천룡부의 정문이 닫히자 특조대 대부분이 도룡부 인근에 머물렀다. 심지어 식사도 도룡부에서 했다. 전날 도룡부주 구자천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일부는 구룡부의 주변을 다시 한번 은밀하게 샅샅이 훑었다.
숫자는 모두 열세 명. 광룡대에 속한 수룡단원 열둘을 감이랑이 이끌었다.
부단주로 있던 십여 년 동안 적룡단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던 감이랑이 아닌가. 하기에 새로 쌓은 담장이나 바뀐 지형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 잘 안다고 봐야 했다.
구룡부의 부주들이 추천을 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을 무렵. 이무환이 그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조소를 짓고 있던 그 시각. 감이랑은 적룡단의 정보를 토대로 몇 곳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기를 이각. 창룡부의 북쪽 담장 근처, 창룡부와 신룡부와 중간 지점에 있는 야트막한 가산에서 첫 번째 수상한 곳을 발견했다.
멀쩡하던 소나무 두 그루가 옆으로 기울고, 바위 하나가 밑으로 푹 꺼져 있는 게 보인 것이다.
“파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