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6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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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7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64화
164화
“잘 모르겠습니다.”
“낯짝이 두 겹으로 된 놈이야. 얼마나 얼굴에 자신이 없으면 보여주기 싫어서 껍질을 썼겠어?”
영호승은 물론이고, 뒤따라가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그렇게 치사한 일인가?
영호승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이무환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나는 총대주의 얼굴이 몇 겹인지 도통 모르겠소.’
물론 묻지는 않았다. 길 걸어가다 맞아 죽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6
태양이 떠오르자 창룡부가 바빠졌다.
검은 띠를 팔에 두른 채 연무장에 모인 창룡부의 무사들은 벙어리마냥 입을 꾹 닫고 창룡전을 바라보았다.
부주가 유명을 달리한 지 이제 하루 반. 장례조차 미룬 채 다음 대 부주를 임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창룡부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구룡성주 선출이 이제 세 시진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끼이익!
창룡전의 문이 열리자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전각 안을 향했다.
드넓은 전각 안, 정면의 상석을 바라보며 양쪽으로 늘어선 인원은 총 삼십삼 명이나 되었다.
“이제 다음 대의 부주를 뽑겠소이다!”
육도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창룡전과 연무장을 울렸다.
“선대 부주님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우나, 구룡의 한 축으로써 성의 장래를 외면할 수 없음이니, 모두들 이해해 주기를 바라겠소!”
환호도 없었다. 별다른 열기도 없었다.
와중에도 육도산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우리 원로원에서는 다음 대 부주님으로 전대 부주님의 장자이신 여건평 공자를 추대키로 하였소!”
대부분의 사정을 알고 있는 창룡부의 무사들은 육도산의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모두 무릎을 꿇어 새로운 부주님께 충성을 맹세하길 바라겠소!”
순간 연무장에 모였던 창룡부의 무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충!”
“새 부주님께 충성을!”
“충!!”
육도산이 여건평을 바라보았다.
“여 대공자께선 상석으로 올라가시구려!”
여건평이 자리에서 벗어나 상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석으로 올라간 여건평이 돌아서자 육도산이 말을 이었다.
“오늘 이 시간부로, 창룡의 주인은 여건평 대공자임을 선포…….”
그때였다.
“잠깐!”
육도산은 홱 고개를 돌려 자신의 말을 끊은 곳을 바라보았다.
이무환이 특조대와 함께 창룡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일순간, 육도산의 두 눈이 가늘어지고 이마에 열 개는 됨직한 굵은 주름이 그어졌다.
“무슨 일인가?!”
“그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소!”
“해결할 일?”
“부주를 살해한 범인을 잡아갈 생각이오. 그러니 부주 위임식은 조금 미루었다 하시지요.”
주름진 육도산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범인을 알아냈단 말인가?”
“알아냈으니 잡아가겠다고 온 것 아니겠소?”
“으음, 정말 잘되었군. 한데… 그 일은 이 일이 끝난 후에 하지 그러나?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네.”
이무환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입가에 조소를 지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가 없게 되었소.”
“무슨 말인가?”
육도산의 골이 깊어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무환은 창룡전의 안쪽을 직시한 채 한 소리 내질렀다.
“여건평! 그대를 창룡부주 여후량의 살해범으로 체포하겠다!”
쿵!
갑작스런 이무환의 일갈에 창룡부가 뒤흔들렸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이무환과 창룡전을 바라보았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육도산이 곧 정신을 차리고 노성을 내질렀다.
“지금… 본 부를 능멸하겠다는 건가?”
“능멸? 귀하의 눈에는 내가 헛소리나 하는 사람으로 보이시오?”
“아니라면, 어찌 대공자를 살해범이라고 하는 것이더냐?”
“그가 여 부주를 죽인 게 확실하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과연 그럴까요?”
이무환은 조소를 지은 채 여건평을 바라보았다.
여건평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도 되는 양 무표정한 얼굴로 여전히 상석에 서 있었다.
턱을 살짝 치켜든 이무환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모른다? 하, 하, 하! 사람들은 나더러 얼굴이 두껍다고 하는데, 당신 얼굴은 더 두껍군!”
“그 말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나?”
이무환은 웃음을 지우고, 창룡부 간부들이 서 있는 곳을 가로질러 여건평을 향해 걸어갔다.
특조대가 그 뒤를 따라가자 늘어선 창룡부의 간부들이 일제히 뒤로 한두 걸음 물러나며 눈을 빛냈다.
이무환이 창룡전의 문턱을 넘어서며 질문을 던졌다.
“책임이라 했나? 여건평, 아니지, 여건평이라는 껍데기를 쓴 당신에게 묻지. 당신 정말 여 부주의 자식, 맞아?”
“본 부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여 부주는 죽기 전에 당신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했지?”
“훗! 헛소리는 그만하지.”
여건평과 남은 거리는 십 장 정도. 이무환은 계속 걸음을 옮기며 씩 웃었다.
“헛소리라……. 좋아! 그렇게 자신 있으면 왼손을 내밀어봐. 확인할 것이 있으니까 말이야.”
“무슨 뜻인가?”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그냥 왼손만 펴서 내밀면 돼. 만일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 왼손에서 찾지 못하면, 오늘의 일을 사과하고 이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
말하는 사이 이무환과 여건평의 사이가 사 장으로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여건평을 바라보았다.
대체 왼손에 뭐가 있다는 걸까?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서 의구심이 솟구쳤다. 육도산이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여건평에서 말했다.
“대공자, 왼손을 보여줘서 저자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시구려.”
눈살을 찌푸린 여건평은 왼손에 힘을 주었다.
보여주지 못할 것은 없었다. 다만 문제는, 광룡이 자신의 왼손을 왜 보자고 하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혹시 자신도 모르는 어떤 문제가 있던가?
그때 여건평의 일 장 앞까지 걸어간 이무환이 걸음을 멈추었다.
“여건호가 어떻게 죽었는지 잘 알 걸? 당신이 죽였으니까 말이야.”
갑자기 여건호의 이야기가 나오자 여건평의 눈에서 새파란 빛이 찰나간 번뜩였다.
“건호도 내가 죽였단 말이냐? 차라리 최근 죽어간 사람은 모두 내가 죽였다고 하지 그러나?”
“왼손만 내밀면 된다니까? 그렇게 자신 있으면 왜 못 내밀지? 혹시 왼손의 검지에 이상이 있는 거 아냐? 아니면…… 유난히 가늘어서 보여주기가 부끄러워? 하긴 어떤 지공을 익히면 손가락이 가늘어진다고 하기도 하던데. 마치 여자의 손가락처럼 말이야.”
비릿한 조소가 섞인 이무환의 질문에 냉랭히 코웃음 친 여건평이 불쑥 왼손을 내밀었다.
“흥! 내가 왜 못 내민단 말이냐? 자, 봐라!”
이무환이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럼 어디 손을 펴봐.”
서로 손을 내밀면 닿을 거리. 여건평이 손을 쫙 폈다.
찰나!
여건평의 쫙 펼쳐진 왼손에서 번개가 번쩍였다.
정확히는 여건평이 손을 펼침과 동시 이무환의 이마를 향해 검지를 뻗었다.
한줄기 시퍼런 번개가 이무환의 이마를 뚫고 지나갔다 싶은 순간! 이무환의 신형이 흐릿하게 사라지는가 싶더니 거짓말처럼 일 장 뒤로 물러났다.
“훗! 그 지법으로 여건호를 죽였나?”
회심의 일격이 실패로 끝나자 여건평이 분노의 일성을 내질렀다.
“나는 본 부의 대사를 방해하는 네놈을 제압하려는 것일 뿐이다. 네놈이 무슨 말을 해도 여기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모른단 말이냐!”
이무환은 꿈쩍도 하지 않고 또 다른 증거를 꺼내놓았다.
“내가 당신을 범인이라 하는 이유를 말해볼까? 첫째, 설미랑이 그러더군. 여 부주가 살해당하던 그 시각, 당신은 지하 연공실에 없었다고 말이야. 하긴 당연한 일이지. 당신은 그 시간에 설미랑에게 받은 검을 품속에 숨기고 여 부주를 만나러 갔으니까. 설마 그 사실마저 부인하려는 건 아니겠지?”
여건평이 바로 변명을 하지 못하고 이무환만 노려보았다.
이무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말을 이었다.
“염추인이 가져온 양류한의 검을 그녀가 당신에게 주었지. 설마 당신이 사부를 죽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야. 아! 혹시 그녀를 찾으려는 거라면 포기해. 그녀는 잠풍련 놈들이 입을 막으려고 해서 내가 보호하고 있으니까.”
설미랑의 이름이 나오자 육도산을 비롯한 창룡부의 간부들도 눈빛이 흔들렸다.
그사이 이무환의 말이 이어졌다.
“두 번째는 여 부주가 남긴 흔적이지. 사실 여 부주가 남긴, 십(十), 하(下)라는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무척 궁금했어. 그런데 말이야, 당신이 여 부주를 죽였다는 말을 들으니까,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알게 되지 뭐야.”
설미랑은 직접적으로 여건평이 죽였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무환은 설미랑이 그렇게 말한 것처럼 몰아붙였다.
“네놈의 말은 다 헛소리일 뿐이다, 무환.”
이무환은 피식, 싸늘하게 웃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십, 하’가 아니었어. 죽기 직전 시간이 없어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한 것뿐이지.”
육도산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이무환이 여건평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여 부주는 자, 부(子, 不), 바로 저자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을 쓰고 싶었던 것이죠. 죽기 전에야 그걸 확신했으니까.”
“큭, 아예 이야기를 꾸며내는군.”
“글쎄, 과연 다 내가 꾸며낸 이야기일까? 알고 보니 당신은 오 년 전에 부친을 찾아 창룡부로 왔더군. 뭐, 친아들일 경우를 가정할 때의 이야기지만. 그런데 말이야…….”
이무환이 조소를 흘리며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흔들었다.
“이것은 부주 부인께서 주신 여 부주의 일기인데, 여 부주도 당신이 자신의 아들이 아닐지 모른다는 걸 의심하고 있었어. 다만 당신이 워낙 철저하게 정체를 감추어서 확신을 하지 못했던 것뿐이지. 그런데 말이야, 당신이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를 나중에야 발견했지 뭔가? 이제 알겠나? 순순히 무릎 꿇지 그러나, 여건평!”
“죽어라, 이놈!”
여건평이 느닷없이 손을 뻗었다.
순간 그의 양손에서 시퍼런 번개가 줄기줄기 회오리치며 뻗어 나왔다.
이무환이 뒤로 미끄러지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 역시 잠풍련의 무공인가?”
동시에 책을 뒤로 내던지고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쩌저정! 콰광!
순식간에 서너 번의 격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건평이 강하다 해도 이무환의 적수는 아니었다.
더구나 단숨에 끝낼 작정을 하고 손을 쓴 이무환이다.
절대고수도 받아내기 힘든 천광수뢰장을 여건평이 막아낸다는 것부터가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네 번째 장력이 여건평을 뒤덮은 순간!
쾅!
“커억!”
단말마와 함께 여건평의 몸이 뒤로 튕겨지며 커다란 태사의와 함께 나뒹굴었다.
두어 바퀴를 구른 여건평이 부르르 몸을 떨며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이무환은 홍옥지를 튕겨 반쯤 몸을 일으킨 여건평의 마혈을 제압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나도 물어볼 게 많으니까. 진득하게 말이야.”
한편, 이무환이 던진 책을 받아 든 제갈신걸은 책을 펼쳐 보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이건……?”
이무환이 널브러진 여건평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씩 웃었다.
“전에 와룡부의 일기가 생각나서 한 번 써먹어봤지. 그건 ‘창룡야사’라는 책인데, 꽤나 볼만하더군.”
육도산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부주의 일기가 아니라고? 그, 그럼 조금 전의 말이 다 거짓이었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요. 어찌 되었든 덕분에 저자가 여 부주의 살해범이라는 것을 빨리 밝혀냈지 않습니까?”
“여건평이 여 부주의 아들이 아니라고 한 것은……?”
“그건 십중팔구 사실일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배에서 나온 자식이니 다를 수도 있다지만, 여건평은 다른 자식들과 너무나 많이 다릅니다. 게다가 여 부주와도 전혀 닮지 않았지요. 특히… 특이한 특징을 지닌 귀와 손가락은 더욱 그렇고요. 그리고 여기 오기 전에 부주 부인을 뵙고 왔는데, 그분께서도 오래전부터 조금은 의심을 하고 계셨더군요.”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여건평을 향했다.
여후량과 그 자식들은 작은 귀와 투박한 손가락을 지녔다. 그런데 여건평의 손가락은 길쭉하니 미끈하게 빠져 여인의 손가락처럼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귀는 부처의 귀처럼 크고 넓었다.
그런데 과연 그 정도만으로 부자간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그런 의문을 담아 쳐다보자 이무환이 싸늘한 표정으로 결론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