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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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49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62화
162화
환비는 무면검마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나직이 명을 내렸다.
“지금 즉시 검룡부를 치시오.”
“왜 이런 짓을… 한 것이냐?”
“적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주려면 어쩔 수 없소. 귀하라면 충분히 상황을 이해할 텐데?”
“상대의 반발이 거셀 것이다. 자칫하면 전면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설마 그걸 모르고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은 아니겠지?”
환비가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눈은 웃지 않는데, 입만 가늘게 늘어진다.
“상관없소. 그러면 오히려 상황이 빨리 마무리될 테니까.”
무면검마의 붉어진 눈빛이 묘하게 이지러졌다.
“혹시… 처음부터 전면전을 바라고……?”
“나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물론 사부님께선 나와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시지만 말이오.”
대답하는 환비의 두 눈에서 파르스름한 기운이 일렁인다.
그 모습을 본 무면검마의 붉은 눈빛이 거세게 출렁거렸다.
지난 이십여 년,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참아왔다.
그런데 뭔가가 잘못되었다. 자칫하면 이십여 년 고생이 공염불이 될 판이다.
‘야율 늙은이는 이 아이의 속마음을 알고 있을까?’
무면검마는 입술에 이가 박히도록 세게 깨물었다.
짜릿한 통증과 함께 광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때 환비의 목소리가 울렸다.
“시간이 촉박하니 지금 출발하시오.”
무면검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환비를 바라보았다.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단호함도 때론 필요하지. 하나 남자라면, 최소한 하늘을 바라보는 데 부끄러움이 없는 행동을 해야 하는 법이다. 너는 오늘의 일에 한 푼의 부끄러움도 없다고 자부할 수 있느냐?”
옅은 조소가 환비의 입가에 떠올랐다.
“훗, 당신은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소. 얼굴을 드러내는 게 부끄러워 평생 가면을 쓰고 산 사람이 하기에는 조금 뻔뻔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소?”
무면검마는 그런 환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환비가 돌아선 무면검마의 등에 대고 강조하듯 말했다.
“최대한의 타격을 줘야 한다는 점 명심하시오.”
“그러지.”
들릴 듯 말 듯 나직이 대답한 무면검마가 석실을 나섰다.
눈이 붉어진 스물네 명의 무사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무면검마는 어둠만이 존재하는 통로를 걸어가며 또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제5장. 약속
1
광기에 물든 스물다섯 명의 무사는 쏟아지는 달빛을 등에 지고 검룡부의 담장을 넘었다. 인시가 막 지나가던 시각이었다.
운 좋게 그들의 행적을 발견한 적룡단 순찰들의 신호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삐이이익!
휘이익!
“수상한 자들이 검룡부로 들어갔다!”
“빨리 알려라! 수룡단을 친 놈들 같다!”
스물다섯 명의 무사는 소란이 이는 것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검룡부의 담장을 넘는 순간부터 지옥의 수라가 되었다.
피와 죽음!
그들은 그것만이 지상의 목표인 양 행동했다.
앞을 막는 자를 향해 뻗는 도검에 추호의 인정도 두지 않았다.
어둠 속, 난데없는 날벼락이 검룡부를 덮치고, 그때부터 지옥이 펼쳐졌다.
“으악!”
“적이다! 막아라!”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라!”
“크어억!”
검룡부의 간부들이 각자의 거처를 뛰쳐나왔을 때는 이미 사오십 명의 무사가 바닥에 널브러진 후였다.
“정상이 아닌 놈들이다! 합공해서 상대해!”
누군가가 침입자들의 상태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붉은 눈에서 뿜어지는 혈기. 입가에 떠올라 있는 기괴한 웃음. 어둠을 밀어내며 몰려드는 사이한 기운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광인들이 무서운 것은 그러한 기운 때문만이 아니었다.
핏빛 혈기를 뿜어내는 그들은 하나하나가 강했다. 절정의 고수들이 몇 번 부딪쳐 보지도 못한 채 뒤로 나가떨어졌다.
장로와 호법들, 검룡부의 자랑이라는 십팔검자조차 일대일에서 뒤로 밀렸다.
게다가 부상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자들이었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듯, 팔다리가 베어져 쩍쩍 갈라지고, 시뻘건 피가 튀는데도 움직임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피를 볼수록 두 눈에서 피어오르는 광기가 짙어졌다.
광란의 격전!
그렇게 검룡부가 지옥의 전장으로 변해갈 때였다.
분노의 호통이 구룡성을 흔들었다.
“누가 감히 검룡의 대지를 피로 물들인단 말이냐!”
검룡의 주인, 검왕 동방휘였다.
순간이었다. 스물다섯 명의 광인 틈에서 한 사람이 솟구쳤다.
상황을 주시하며 손쓰는 것을 자제하고 있던 청색가면인, 무면검마였다.
“동방휘! 그대는 내가 상대해 주마!”
“이놈들! 내 네놈들을 한 놈도 내보내지 않으리라!”
“응? 뭐지?”
지하 석실에서 설미랑을 취조하던 이무환은 고개를 발딱 쳐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적룡단의 호각 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신호음.
뒤이어 들리는 요란한 소음.
비명,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 강맹한 기운의 격돌음이 뒤섞여 있다.
‘혹시?’
이무환의 눈이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설미랑을 향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소.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니까,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시오. 알겠소?”
설미랑은 대답할 힘도 없는지 고개만 끄덕였다.
이무환은 즉시 석실을 나서며 영호승을 향해 소리쳤다.
“멋쟁이! 빨리 사람들을 소집해!”
“예, 총대주!”
하지만 영호승 등 광룡사위가 사람들을 찾아다닐 필요도 없었다. 소란스런 소리를 들었는지, 모두가 이무환의 방을 향해 몰려들었다.
“총대주, 아무래도 일이 터진 것 같습니다!”
엽상의 말에 이무환의 눈이 북쪽으로 향했다.
“검룡부야?”
“그런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동방휘의 호통이 밤공기를 타고 구룡성에 울렸다. 그리고 곧이어 동방휘의 이름이 구룡성 하늘에 울려 퍼졌다.
이무환은 욕설을 내뱉으며 눈을 치켜떴다.
“이 빌어먹을 작자가!”
동방휘마저 나설 정도라면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게다가 조금 전의 동방휘를 부른 목소리. 귀에 익은 목소리다.
청색가면인, 그자다!
그가 두더지굴에서 또 나왔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놈들이 작정하고 일을 벌였어!’
그렇다면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호연청의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릴 시간조차 아까웠다.
“자! 굴에서 나온 두더지들을 잡으러 가자고!”
콰광! 쩌저정!
세 번의 격돌이 찰나간에 이루어졌다.
절대의 기운이 충돌하자 부서진 기운의 파편이 어둠을 갈기갈기 찢으며 주위로 퍼져 나갔다.
고오오오!
인근에 몰려 있던 사람들 중 몇이 그 여파에 휩쓸리고, 일순간 대여섯 명이 사방으로 튕겨졌다.
오 장 뒤로 훌쩍 물러선 동방휘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우세는커녕 오히려 밀린 기분. 천중십마와 우내십존의 누구에게도 밀리고 싶지 않은 자신이 밀리다니!
“네놈은 누구냐!”
검을 중단으로 들어 올린 무면검마가 음울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닐 텐데?”
사실이 그랬다. 비명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온다.
사방에서 피가 튀고, 말하는 사이에도 서너 명의 무사가 죽어간다.
“오냐, 이놈! 나 동방휘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마!”
후우웅!
동방휘의 전신에서 웅혼한 기운이 솟구치는가 싶더니, 모든 기운이 우수에 들린 검으로 집중되었다.
찰나였다. 무면검마가 검을 앞세운 채 동방휘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짧은 시간, 검룡부의 정문과 담장 근처에 많은 무사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안으로 진입하지는 못하고 눈치만 보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침입자들이 누군지 확인조차 안 되고 있는 판이다.
적아마저 분명치 않은 상황. 무턱대고 들어가면 적으로 오인한 검룡부 무사들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더구나 들려오는 굉음과 비명으로 봐서 침입자들은 절정 그 이상의 경지에 달한 무인들임에 분명했다.
눈먼 칼에 목숨을 내맡기고 싶지 않은 이상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이무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며 소리쳤다.
“특조대다! 안 들어갈 거면 비켜!”
누군가가 엉겁결에 큰 소리로 이무환의 존재를 알렸다.
“광룡이 왔다!”
벼락이라도 떨어진 듯 정문 근처에 있던 무사들이 쫘악 갈라졌다.
이무환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검룡부의 담장을 넘었다. 특조대원들도 일제히 몸을 날려 이무환의 뒤를 따랐다.
검룡부 내부의 상황은 목불인견의 상황이었다.
찢겨지고, 갈라지고, 터지고, 몸체와 떨어져 나간 팔다리들이 핏구덩이를 이룬 사방에 널려있다.
그 숫자가 족히 일백이 넘어 보였다.
검룡부의 고수들과 아귀다툼에 가까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자들은 모두 이십 명 정도. 광기에 찬 붉은 눈빛을 빛내는 그들은 지옥에서 뛰쳐나온 아수라의 화신과도 같았다.
이무환은 광기에 찬 자들을 보는 즉시 상황을 이해했다.
“약을 처먹었군!”
무창에서 만났던 혈귀들. 그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차이라면, 그들보다 이곳에 있는 자들이 몇 배 더 무서운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자식들이 절정의 고수들에게 약을 처먹였어!”
무서운 일이었다.
적은 기껏해야 이십여 명 정도. 그 숫자로 검룡부를 뒤집어놓다니.
“손에 인정을 남기지 마! 죽일 때는 확실히 죽여!”
누굴 따로 지목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모두에게 들으라는 말이었다.
일전 마단에 대한 것을 들은 적이 있는 특조대원들은 전장을 향해 달려가며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무환도 망설이지 않고 격전이 벌어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특조대원들이 가세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그러잖아도 절정의 무위를 지닌 사람들이 철저히 함께 손을 썼다.
제아무리 마단의 약효를 빌려 두세 배의 무위를 발휘하는 광인들이라 해도 절정고수 서너 명이 합공하자 뒤로 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헌원숭과 소천득이 담장을 넘어온 것은 전세가 서서히 기울 즈음이었다.
이무환은 그들이 합류하자 두 명의 광인을 때려눕히고는 무면검마와 동방휘의 격전장으로 다가갔다.
비록 다른 광인들에 비해 약하긴 해도 청색가면인의 두 눈 역시 붉게 변해 있었다. 마단을 복용했다는 말.
그래선지 동방휘가 밀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천중십마, 우내십존에게도 밀리지 않는다는 검왕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청색가면인이 광기에 완전히 지배당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무환이 다가갈 때였다. 무면검마가 동방휘를 향해 전력을 다한 일검을 내뻗었다.
“동방휘! 이것도 받아봐라!”
찰나! 검첨에서 벼락이 뿜어졌다.
어둠을 가르며 쭉 뻗은 검강이 거대한 화살처럼 동방휘를 향해 날아갔다.
동방휘도 더는 밀릴 수 없다 생각했는지 이를 악물고 혼신의 공력을 다 쏟아냈다.
“오냐, 이놈!”
쩌저저적! 콰앙!
굉음이 검룡부를 뒤흔들고, 부딪친 검강의 위력이 일대를 진공으로 만들었다.
일순간, 강기의 회오리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하늘의 달도, 구름도 모조리 부숴 버릴 것처럼!
콰아아아!
의외의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끝장을 볼 것 같던 무면검마가 강기의 회오리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격돌의 충격에 이 장이나 뒤로 물러선 동방휘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이놈!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내부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는 무면검마를 따라가지 못하고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핏물을 삼켰다.
이무환이 대신 무면검마를 쫓아가며 소리쳤다.
“이곳이나 정리하십시오! 제가 쫓겠습니다!”
무면검마는 곧장 북쪽 성벽을 넘더니 구룡성을 빠져나갔다.
이무환도 철천지원수를 쫓는 것처럼 속도를 더해 그 뒤를 쫓았다.
그렇게 오 리, 이무환은 그와의 거리가 십 장으로 줄어들자 전음으로 소리쳤다.
<어디까지 갈 거요?>
순간, 무면검마가 땅을 박차고 십 장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무환은 그가 갑작스럽게 솟구치자 잔뜩 긴장한 채 속도를 늦추었다.
고오오오오!
그때 하늘에서 거대한 검이 떨어져 내렸다.
일검에 하늘을 두 쪽으로 갈라 버릴 것 같은 가공할 기운!
석치상에게서조차 느껴보지 못했던 무거움과 웅혼함이 담긴 일검!
‘한번 해보자, 이거지?’
이무환은 천광지령의 기운을 십성 끌어올리고는 하늘을 향해 천광수뢰장 중 천광뇌령을 펼쳤다.
우르릉!
천지를 뒤흔드는 은은한 뇌성!
어둠이 진저리쳤다.
콰르르릉! 쩌저저적!
단 한 번의 격돌로 방원 십 장이 들썩이며 그 안의 모든 것이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