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20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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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2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200화
200화
그 정도의 공격에 고개를 숙이면 광룡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슴을 떡 편 이무환은 방귀 뀐 놈이 성내듯이 큰소리쳤다.
“오늘, 우리 꼬맹이하고 내가 아니었으면 저 속에 묻혔을 거요. 은혜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그래도 남자라면 이런 일은 잊는 게 아닙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 하, 하!”
비록 찰나의 차이라 하나 그 작은 차이가 결과에 얼마나 큰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이무환이라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아는 이무환이라면 이 상황에서도 뭔가 대가를 바랄지 모를 일. 사람들은 넌지시 딴청을 부렸다.
“험, 누가 뭐라고 했나?”
호연청이 딴청을 피우며 몸을 돌리자, 소천득이 일양신마를 재촉했다.
“일양신마 선배, 죽은 사람은 안됐지만, 이제 갈 길을 가야 하지 않겠소?”
일양신마마저 발길을 서둘렀다.
“알겠소. 적이 언제 또 공격할지 모르니, 이만 출발하겠소이다.”
그 말이 핑계일 뿐인지, 아니면 정말 걱정되어서인지는 그만이 알 일이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일양신마를 따라 움직였다. 부상당한 사람들도 대충 상처를 돌보고 그 뒤를 따라갔다.
남은 사람들은 광룡 일조뿐.
이무환이 앞서가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향해 투덜거렸다.
“사람들이 말이야, 고마운 줄 알면 뭐라도 주면서 고마움을 표시해야지, 쩨쩨하기는…….”
3
협곡을 빠져나간 후로도 이십 리를 더 들어갔다.
불쑥불쑥 솟은 암봉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간간이 보이고, 산봉과 산봉 사이는 수천 년 동안 자라온 나무들로 가득 찬 원시림이었다.
천마교로 가는 길은 그 원시림을 갈지자로 가르며 흐르는 물가에 나 있었다.
처음에는 오 리마다 천마교의 경비무사들과 마주치더니, 십 리를 가자 이백 장 간격으로 천마교의 경비무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역부산과 일양신마를 대하고는 감히 검문할 생각조차 못했다.
그렇게 고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계곡을 지나 능선에 올라섰을 때다. 갑자기 앞이 탁 트였다.
순간 광룡단 모든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무이산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가 우뚝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완만한 지세를 이루며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좌우를 둘러봐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웅장한 산세(山勢).
검은 띠처럼 보이는 담장이 바로 그 웅장한 산세의 산자락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백여 채의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천하제일마세 천마교!
마침내, 마도 성지 천마교의 총교에 도착한 것이다.
이무환은 역부산과 일양신마를 따라가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얼래?’
그들은 천마교의 정문 쪽으로 가지 않았다.
그거야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최대한 사우천의 눈길을 피하겠다는 생각일 테니까.
하지만 눈에 보이는 광경만큼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보쇼, 역 형.”
“왜 그러는가?”
“저 넓은 길은 뭐요?”
이무환은 천마교의 정문 쪽이라 짐작되는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마차 두 대가 다닐 정도로 넓은 길이 청석으로 잘 다듬어져 있었는데, 아래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관도와 이어진 길이네.”
“그럼 우리가 온 길은……?”
“그야 뒷길이지.”
이무환의 눈이 가늘어졌다.
산 넘고 물 건너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하마터면 바위에 깔려 묵사발이 날 뻔했다. 차라리 관도로 왔으면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그러니까, 뒷길로 오다 벼락을 맞았다는 말이군요.”
조금 불안해진 역부산은 슬금슬금 일양신마의 옆으로 피했다. 일양신마 옆에 바짝 붙은 역부산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서 대답했다.
“그냥 재수가 좀 없었을 뿐이네.”
“아하, 재수가 없어서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 그 말이죠?”
이무환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곱지 않은 눈으로 역부산과 일양신마를 노려보았다.
이무환이 한 번 미쳐서 역부산을 두들겨 팼으면, 하는 눈빛이었다.
이무환은 미치지도, 역부산을 패지도 않았다. 이곳이 천마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길, 생각보다 더 썩었나 보군.”
사람들은 갑자기 내지른 이무환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산산이 이무환의 속내를 짐작하고 한마디 거들었다.
“어차피 아무도 믿을 생각은 아니었잖아요, 오빠.”
“그건 그렇지. 가자, 꼬맹아. 뭐 하쇼? 안 들어갈 거요?”
그때 일양신마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우리도 못 믿겠다는 건가?”
이무환은 평소와 달리 무심한 얼굴로 한 자 한 자 쿡쿡 못을 박듯이 물었다.
“우리가 뒷길로 올 거라는 것, 비밀이었을 것 아뇨? 그런데 오자마자 공격을 받았죠. 그렇죠?”
“그건 그렇네만…….”
그제야 이무환의 말뜻을 알아들은 일양신마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이무환이 무심한 눈으로 일양신마를 직시한 채 나직이 말했다.
“아는 사람이 누구누군지, 아마 노인장은 알 거요.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이야기해 주고, 일단은 안으로 들어갑시다.”
일양신마는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이번 일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열 명도 채 되지 않는다. 만일 이무환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 사람들 중에서 말이 새어나갔다는 뜻.
문제는, 그들이 모두 믿을 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젠장할!’
4
고요함이 무겁게 대기를 짓누른다.
청삼중년인은 짓눌린 기운을 밀어내며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핏빛만큼이나 붉은 적포를 걸친 초로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그의 상관이자, ‘천’의 삼인자라 할 수 있는 사유전의 주인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놈들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전주.”
“놈들의 정체는 파악했는가?”
“아직… 다만 구룡성에서 온 자들이고, 제법 강한 자들인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음, 교의 졸개들만 몇 죽고, 정작 죽여야 할 놈들은 한 놈도 죽이지 못했다고?”
“예, 전주. 부상을 입은 놈은 몇 되는 것 같습니다만.”
적포초로인은 잠시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시고 나직이 물었다.
“천주께선 어찌할 생각이신지 아직 말이 없으신가?”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인 걸 문제 삼아서, 이 기회에 모든 것을 해결하실 생각인 듯합니다.”
“그것도 괜찮겠지. 더 길게 끌어봐야 좋을 것도 없으니까. 그래,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은 어떤가?”
“전력을 집중시키고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적포초로인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걸렸다.
“훗, 그럼 우리도 사람들을 모아야겠군.”
“하온데…….”
“뭔가?”
청삼중년인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그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
“복건 쪽의 모든 권리를 넘겨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적포초로인의 눈에서 싸늘한 한광이 일렁였다.
“살모사 같은 놈이 욕심도 많군.”
“어찌하실 것인지요?”
“요랑(妖郞)이 놈을 사로잡은 것은 분명하겠지?”
청삼중년인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어렸다.
“요랑의 말대로라면, 제 부모도 팔아먹을 놈입니다.”
“흥, 그래? 그럼 네가 적당히 말을 돌려서, 일단 놈의 뜻을 들어주는 것처럼 해라. 당장은 놈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알겠습니다, 전주.”
5
천마총교의 뒷문을 통과한 광룡단은 고색창연한 기와로 뒤덮인 삼층 전각으로 안내되었다.
역부산의 말에 의하면, 천마교의 군사전인 마월전(魔月殿)에 딸린 부속 건물이라 했다. 아마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야 할 듯했다.
여장을 풀자마자 이무환은 남궁산산과 공손척, 염환, 모용상명을 대동하고 역부산과 일양신마를 따라 마월전으로 향했다.
원래 이무환은 염환이나 모용상명 대신, 호연청 등 밀천회의 절대고수들을 대동할 생각이었다.
이유야 단순했다. 그런 사람들을 수하로 거느리고 가면 더 멋지게 보일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남궁산산이 반대해서 포기해야만 했다.
“어디에 적의 눈이 있는지 모르는데, 미리부터 다 보여줄 필요는 없어요.”
아주 당연히, 호연청 등은 환영하며 남궁산산의 의견을 반겼다.
광룡과 잠시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공기가 맑게 느껴지거늘, 왜 따라가서 답답함을 자초한단 말인가.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무환도 남궁산산의 말이 옳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들어간 마월전은 생각보다 수수했다.
사방에 마귀들이 잔뜩 그려져 있고 방에서 사이한 마기가 느껴질 줄 알았는데 일반 대전이나 별다를 것이 없었다.
양쪽 벽에 커다랗게 그려진 아수라와 나찰이 눈에 띄었지만,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줄 만했다.
오히려 그보다는, 사방에 숨어서 눈을 번뜩이는 비밀 호위무사들이 더 신경에 거슬렸다.
‘스물두 명이군.’
이무환이 숨어 있는 호위무사의 숫자를 대충 셀 즈음 역부산이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쪽으로 오시오.”
아수라가 금실로 새겨진 검붉은 휘장이 전면에 보였다.
그 앞에는 검은 칠이 칠해져 유난히 육중해 보이는 서탁이 하나 놓여 있고, 방 중앙에는 여덟 명이 앉을 수 있는 탁자가 있었다.
상당히 큰 그 방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있었는데, 그는 서탁에서 뭔가를 보고 있었다.
일양신마와 역부산을 필두로 이무환 일행이 들어가자, 서탁 너머에 앉아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칠흑빛 장포를 입고, 머리에는 도관도 아니고 유생건도 아닌 조금 묘하게 생긴 뾰족한 건을 쓰고 있었다.
나이는 오십 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얼굴이 깡마른데다가 하얘서 사이하게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아마 눈꼬리마저 아래로 처지지 않았다면, 마주 대하고 이야기하는 게 꺼려질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자였다.
그가 바로 천마교의 태군사인 귀곡마유(鬼谷魔儒) 순우결이었다.
“모시고 왔습니다, 태군사.”
역부산이 고개를 숙이자, 순우결이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시오. 먼 길을 오느라 고생하셨소.”
공손척이 먼저 포권을 취했다.
“또 뵙게 되었습니다, 태군사.”
“이렇듯 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네. 저분들을 소개 좀 시켜주시겠나?”
순우결은 공손척에게 말을 거는 와중에도 이무환과 남궁산산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공손척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먼저 염환을 소개했다.
“만겁궁의 장로이신 염환 장로님이십니다.”
염환이 포권을 취했다.
“염환이라 하오. 대천마교의 태군사를 뵙게 되어 영광이오.”
순우결이 가볍게 놀란 표정으로 마주 포권을 취했다.
“허어, 만겁궁의 삼존자 중 한 분께서 오실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고맙소이다.”
“별말씀을.”
그때 공손척이 모용상명을 가리켰다.
“저 공자는 모용상명이라 합니다, 태군사.”
순우결은 담담히 모용상명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의 이름이 떠오른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모용상명? 혹시… 잠천신룡 모용 공자가 아니신가?”
“강호의 친구들이 그렇게 불러주고 있긴 합니다만, 태군사께서 염두에 둘 정도의 사람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신가? 차대의 강호를 이끌어갈 신룡을 어찌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허허허.”
순우결에게는 염환에 이어 잠천신룡의 출현이 뜻밖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가진 정보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모용상명은 초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고수가 아니던가.
‘온 자들이 하나같이 고수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 정도의 고수가 몇 명만 섞여 있다면 상당한 도움이 되겠어.’
그러나 흡족한 마음도 잠시, 순우결은 의아해하는 눈으로 이무환과 남궁산산을 향해 눈을 돌렸다.
공손척이나 염환이나 모용상명은 두말할 것 없는 고수들이다. 그러니 이곳에 온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스물 남짓한 이무환이나 열대여섯 정도로 보이는 남궁산산은 어떤 이유로 이곳에 왔는지, 천마교의 머리라는 그조차 판단할 수가 없었다.
‘뭔가 특별한 재주가 있는 아이들인가?’
역부산과 일양신마는 순우결의 표정을 보고 묘한 쾌감을 느꼈다.
천하제일의 모사라는 순우결이 저런 표정이라니!
두 사람은 슬그머니 눈을 돌리고 이무환이 직접 입을 열기만 기다렸다.
순우결에게 이무환의 정체를 미리 말해주지 않은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하지만 이무환이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 자신들도 할 말은 있었다.
공손척마저 두 사람을 소개하지 않자, 순우결이 먼저 공손척에게 물었다.
“저 두 어린 친구는 뉘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