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9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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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70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98화
198화
이무환은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고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별것 없어요. 사우천에 대해 아는 대로만 말해주면 돼요.”
명위종이 이무환을 쏘아보았다.
“배신을 할 수는 없소. 다른 것을 요구하시오.”
이무환은 꿈쩍도 하지 않고 몇 마디 덧붙였다.
“당신 형제는 사우천을 이용해서 한을 풀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사우천은 당신 형제들에게 이용당할 만큼 어리석은 자들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명가의 후예인 당신들이 크는 것을 바라지 않을 걸요?”
사실이 그랬다. 형만 봐도 그렇지 않던가.
명위종이 아무런 말도 못하자 이무환이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죠. 사우천이 무너지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명가의 명예를 되찾게 해주죠.”
무공이 강한 것은 안다. 절대경지에 근접한 자신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하지만 세상일은 무공만으로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무슨 재주로…….”
이무환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명위종의 말을 끊었다.
“혹시 말입니다, 구룡성의 광룡이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봤수?”
강호에 널리 알려진 이름은 아니지만 그도 들어봤다. 최근 한 달 사이, 사우천의 수뇌부들이 모이기만 하면 술안주 하듯이 씹어댔으니까.
혼자서 구룡성을 뒤집어놓은 놈.
미친 듯이 날뛰어서 잠풍련을 부순 놈.
더러워서든 체면 때문이든, 절대고수들조차 피한다는 놈.
소문으로는 겉보기와 달리 나이가 많아서 백 살이 넘을 거라는 말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미친놈의 이름을 왜 이 자리에서 거론하는 걸까?
“천외… 광룡 말이오?”
이무환이 씨익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를 가리켰다.
굳이 많은 말이 필요없었다.
명위종은 창백하게 굳은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명위종이 떠나자 이 방 저 방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그가 누군지 정확히는 몰라도, 장원에 외부인이 들어오고, 이무환과 대화를 나눈 것 정도는 알고 있었던 듯했다.
호연청은 명위종이 사라진 곳을 잠깐 바라보고 이무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저 방에 있는 사람의 동생이죠.”
흠칫 놀란 일양신마가 침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를 그냥 보내도 괜찮겠나?”
“저에게 말씀해주신 것, 분명한 사실이죠?”
청풍산장까지 오면서 이무환이 시시콜콜 캐물었다.
천마교의 비사였기에 처음에는 망설였다. 그러나 어찌나 집요하게 묻는지, 말해주지 않으면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일양신마는 땡감을 베어 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그럼 걱정할 것 없어요. 사실이면 그는 돌아설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멍청한 사람은 아닌 것 같거든요.”
호연청이 말꼬리를 잡고 몰아세웠다.
“그래도 너무 쉽게 우리를 드러낸 것 아닌가? 조심에 조심을 기해도 모자랄 것이거늘, 어찌 그리 가볍게 노출시키는가?”
몇 사람이 동조하는 눈빛으로 이무환을 쏘아보았다.
‘역시 아직 어려서 서툴기 짝이 없군.’ 그런 표정으로.
하지만 이무환은 태연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출요? 그냥 내가 누군가 하는 것만 말했는데요? 광룡단의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 뭘 노출시켰다는 거죠?”
“자네… 정체만 말했다고?”
“그럼 제가 다 말해주었다고 생각했습니까? 설마 그렇게 멍청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겠죠?”
그렇다고 하면 멍청한 사람이 될 판이다. 호연청은 길지도 않은 수염을 쓸어 만지며 헛기침을 했다.
“험, 나는 그냥 우려되어서 물었을 뿐이네.”
쏘아보던 사람들도 슬며시 눈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그것만으로도 그 자는 간이 떨어졌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일양신마가 다시 질문을 던지면서 어색한 상황이 무마되었다.
“그런데 언제 그 자를 안 것인가?”
“싸울 때 숨어 있었는데 저에게 들켰죠. 그런데 도망가면서 형님이 어쩌고저쩌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형의 목숨을 담보로 만나자고 했죠. 이렇게 일찍 찾아올 줄은 저도 미처 몰랐지만요.”
이무환은 말을 마치고 빙긋 웃었다.
광룡단원은 물론이고, 일양신마와 역부산마저 할 말을 잃었다.
어쩐지 명위진의 목숨을 끝까지 살려주자고 할 때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그런 수작을 부려놓았을 줄이야!
제10장. 흑우령(黑雨靈), 그리고 천마교(天魔敎)
1
용호산은 봄나들이 온 사람들과 사원에 소원을 빌기 위해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삼월 중순의 어느 날. 태양이 중천으로 힘겹게 기어오르는 사시 초, 용호산을 감싸고 도는 강가에 사십여 명의 무사가 나타났다.
천응표국을 먼저 보내고 남쪽으로 달려온 광룡단과 천마교의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이십여 장 넓이의 강을 평지처럼 내딛으며 건너더니, 암봉이 죽순처럼 솟은 용호산 안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로부터 이각이 조금 못 되었을 때였다.
용호산 깊고 깊은 계곡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타고 비명과 고함 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일양신마와 역부산을 필두로 광룡단이 태진궁의 담장을 넘은 지 반 각. 태진궁 안에서 굉음과 비명과 악다구니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널따란 마당은 쓰러져 신음을 흘리는 도인들로 순식간에 가득 찼다.
쓰러진 자들은 모두 흑포를 입은 무사들이거나, 갈색 도포를 입은 도인들이었다.
하지만 그 도인들 중 진짜 도인은 하나도 없었다. 피를 갈구하며 살기를 번뜩이는 마귀들만 득시글거릴 뿐.
광룡단은 이미 이들이 사우천 전위 세력 중 하나인 흑우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특히 밀천회의 고수들은 그들을 향해 속에 쌓인 울화를 풀었다.
개개인이 십여 명을 때려눕히는 것쯤은 절대고수인 그들에게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대항하던 적이 다 쓰러지자, 다른 사람의 상대까지 넘봤다.
그렇게 일각, 서 있는 자들보다 쓰러진 자들이 훨씬 많아졌다.
공포에 질렸을 법한데도 흑우령의 무사들은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광룡단의 고수들은 그들의 굴하지 않는 저항 정신을 높게 사주며 흡족한 마음으로 때려눕혔다.
“하하하, 진정한 무사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 법이지!”
광룡의 목소리가 용호산을 뒤흔들었다.
흑우령의 령주인 노응사는 헛것을 본 것처럼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사우천의 전위 세력 중 하나인 흑우령이 손도 써보지 못하고 무너질 줄이야!
일대와 이대가 없다지만, 노응사에게는 그 사실이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네놈들은 누구냐? 웬 악귀들이 도인들의 수양장에서 살겁을 자행하는 것이더냐!”
노응사의 일갈에 이무환이 피식 웃었다.
“내가 악귀라고 불렸던 적은 있으니 그에 대해선 뭐라 하지 않겠는데, 이곳이 도인들의 수양장이라고? 차라리 마귀들의 소굴이라고 하는 게 낫지 않겠어?”
“어린놈이 감히 어디서 나서는 게냐?!”
“딱 보니까 이 마귀굴의 대장인가 본데, 당신이 흑우령의 령주라는 사람이야?”
노응사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사우천에 흑우령이라는 곳이 있다고 하던데, 아냐?”
“누가… 그런 헛소리를……?”
“초문광이라는 사람 알지? 혈사단의 단주 말이야. 그가 죽기 전에 알려주더군.”
물론 그가 말한 것이 아니다. 명위종이 말했지.
하지만 노응사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혈사단뿐 아니라 초문광이라는 이름까지 알고 있지 않은가. 강호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그 이름마저 알고 있는 이상 흑우령에 대해 아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그가 충격을 받은 것은 이무환이 흑우령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초문광이… 죽었다고?”
“며칠 전에 죽었지. 그리고 이제는 당신 차례야. 그러니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헛소리! 그는 이곳에서 천 리 떨어진 곳에 있다. 하거늘, 며칠 전에 죽었다니! 흥! 네놈은 나를 바보로 아는구나!”
“당신 바보 맞아. 구궁산에 있는 혈사단을 치면서 초문광도 우리가 죽였거든.”
“이놈!”
노응사는 노성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말끝마다 신경을 건드린다.
그는 이무환의 목을 단숨에 꺾어버려야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거리라고 해봐야 이 장여 정도. 어린놈의 목을 꺾는 것쯤이야 썩은 가지 부러뜨리는 것보다 쉬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무환은 결코 썩은 나뭇가지가 아니었다.
단단히 벼르고 있는 십마십존마저 손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아야 할 만큼 질기고 단단했다.
쾅!
일장의 격돌.
노응사의 신형은 날아가던 만큼이나 빠르게 튕겨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무환은 천광수뢰장으로 노응사를 튕겨내고는, 따라가며 삼장을 내갈겼다.
노응사는 눈을 부릅뜬 채 이무환의 장력을 악착같이 맞받았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일 장의 거리를 둔 채 연이어 세 번의 격돌음이 울렸다.
쾅쾅쾅!
일 장에 손목이 부러지고, 이 장에 어깨가 뒤로 꺾어지더니, 삼 장에 가슴이 움푹 꺼졌다.
“커억!”
오 장 밖으로 나가떨어진 노응사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푸헉!”
입에서 피분수가 뿜어낸 그는 비칠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안쓰러울 정도로 다리가 흔들렸다.
이무환은 더 이상 손을 쓰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 있는 적은 이제 열 명도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그들도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무기를 늘어뜨린 그들의 표정은 죽어 나자빠진 사람들이나 별다르지 않았다.
그때 문득, 흑우령의 무사 둘을 때려눕히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발로 툭툭 차고 있는 역부산이 보였다.
이무환은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역 형!”
역부산이 고개를 돌렸다. 역 형이라는 말에 조금도 거부감이 없는 얼굴이었다.
“왜… 그런가?”
“저 사람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죠.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아무래도 말로 해서는 안 들어갈 것 같으니까, 대충 몇 군데 부러뜨려서 데리고 오쇼.”
“그러지.”
역부산의 눈이 노응사를 향해 돌아갔다.
평소라면 한 수 위의 고수가 바로 흑살마자 노응사다. 일양신마조차 승부를 장담하기 힘든 고수.
그러나 그것은 조금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흐흐흐, 흑살마자 노응사를 내 손으로 끌고 가는 날이 오다니.’
역부산은 즐거운 미소를 흘리며 노응사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노응사가 안간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
“뭘… 물어보고 싶은 것이…냐? 나는 내 발로…….”
순간이었다.
역부산이 펄쩍 몸을 날려 단숨에 사 장 거리를 좁히더니, 노응사의 이마를 후려쳤다.
이무환에게 자신이 맞을 때처럼!
서 있기도 힘든 노응사가 피하기에는 역부산의 동작이 너무 빨랐다.
퍽!
노응사를 내려놓은 역부산은 대들보만 바라보았다.
너무 세게 때렸는지 일각가량이 지나서야 노응사가 눈을 떴다. 그동안 사람들이 혀를 찰 것 같은 표정으로 역부산만 주시했다. 역부산으로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시선을 둘 수밖에 없었다.
‘지미, 나는 이각이나 정신을 잃었는데.’
그래도 이무환은 별 불만이 없었다.
그 일각 동안, 남궁산산이 사방을 뒤져서 구해온 차를 두 잔이나 마셨으니까.
이무환은 노응사가 눈을 뜨자 곧바로 심문에 들어갔다.
“시간이 없으니까 두 번 묻지 않을 거야. 잘 판단해서 대답해.”
한쪽 이마가 벌게진 노응사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차라리… 그냥 죽여라.”
“별로 어려운 대답은 아니야. 말해도 별 상관없는 것만 물어볼 거니까. 어때? 대답하고 살겠어, 아니면 그냥 죽겠어?”
노응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말해도 상관없는 질문이라고? 살려주겠다고?
이무환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담담한 말투로.
“사실 힘줄을 뽑고, 내가 아는 열두 가지 고문을 차례대로 하면 들을 수 있지만, 오늘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봐서 특별히 봐주는 거야.”
사람 힘줄 뽑는 것을 머리카락 한 올 뽑는 것보다 쉽게 말한다. 게다가 그 정도는 열두 가지 고문에 속하지도 않는 듯하다.
노응사는 처절한 고통 와중에도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자신의 손목을 부러뜨리고 어깨마저 부순 놈이다. 그것도 웃으면서.
그전에는 두 명의 조장의 목을 수수깡처럼 부러뜨려 죽이지 않았던가. 귀찮게 덤빈다면서.
충분히 자기가 말한 대로 할 놈처럼 보였다.
혹시 저 미끈한 얼굴도 남의 껍질을 뒤집어쓴 것 아닐까?
그럴지도 몰랐다.
‘악마 같은 새끼. 나보다 열 배는 더 독한 놈. 어린놈이 어떻게……!’
그때 이무환이 소곤거리듯 물었다.
“사우천에서 제일 강한 놈, 열 명만 말해봐. 그럼 살려주지.”
노응사는 움찔하며 눈을 들었다.
사우천에서 제일 강한 열 사람만 알려주면 살려준다고?
단 열 명의 이름.
그것 역시 아무에게나 말할 수 없는 비밀인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러나 다른 정보에 비하면 그 정도는 중대한 비밀이라 할 것도 없었다.
“정말… 그것만 말하면… 살려주겠다는 것이냐?”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악마새끼와 의견이 다른 듯했다. 이 사람 저 사람 나서며 악마새끼의 의견에 반대했다.
“그 정도만으로 살려주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흑우령의 령주 정도면 알고 있는 것이 적지 않을 텐데.”
“정 뭐하면 나에게 맡기게. 내가 저자에게서 그보다 세 배는 더 많은 정보를 뽑아내겠네.”
“잘근잘근 조져서라도 최대한 많이 알아내야 하네. 그래야 빨리 일을 끝낼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자신을 잡아먹지 못해 한이라도 쌓은 목소리.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지 몰라도, 그 일을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것만이 지상 최대의 목표인 듯 말했다.
더구나 듣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한 목소리로 나서는 자도 있었다.
“단주, 속하가 손을 볼까요?”
“눈발, 네가?”
“찾아보면 톱이랑 망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몇 군데 잘라내고 잘게 부수다 보면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됐어. 저번에 이틀간이나 그렇게 했는데도 실패했잖아?”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단주. 맡겨주시지요!”
이무환은 못미더운 눈으로 엽상을 흘겨보고는, 노응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