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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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65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94화
194화
불끈 주먹을 움켜쥔 그는 이무환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광룡단 사람들은 기대감과 걱정이 어린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밀천회 사람들은 역부산이 시원하게 욕이라도 퍼부어주었으면 싶었다. 힘으로야 어차피 상대가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이번에도 단리 노인이 말렸다.
“부산, 그만해라.”
“어르신…….”
“소란을 일으켜서 시간이 지체되면 그만큼 많은 교도들이 피를 흘릴 것 아니겠느냐?”
역부산을 입을 꾹 다문채 죽일 듯이 이무환을 노려본 후 홱, 몸을 돌렸다.
밀천회 사람들 눈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욕이라도 퍼붓고 돌아서지.’
그렇게 백 리를 가자 호수가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표행은 서서히 방향을 서쪽으로 틀었다.
2
얕은 수로는 굳이 배가 따로 필요 없어 그대로 건넜다.
하지만 파양호로 흘러드는 주 하천 중에 하나인 무하(撫河)는 그냥 건널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마차가 물 위에 떠서 갈 수 있다면 또 몰라도.
다행히 그곳에는 상시적으로 사람과 말 등을 건네주는 도선이 운항하고 있었다.
표행은 도선을 이용해 무하를 건넌 후 반 시진가량을 더 달렸다.
그렇게 진현(進賢)의 남쪽을 통과한 표행은 얕은 구릉이 보이자 그곳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사람들이야 지친 사람이 있긴 해도 더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마차를 끄는 말 중 몇 마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투레질을 해댔다. 몇 군데 젖은 땅을 지나와서 더 지친 듯했다.
일차 목적지인 동향(東鄕)까지 남은 거리는 팔십 리. 해가 지려면 아직 한 시진 반은 더 남은 듯했다.
표행을 이끄는 천응표국의 부국주, 목조릉이 표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곳에서 반 시진의 휴식을 취하고 출발한다! 쟁자수들은 간식을 준비하도록 해라!”
표행은 구릉 사이에 있는 평평한 초원 지대에 짐을 풀었다.
말은 양탄자처럼 펼쳐진 풀을 뜯으며 연신 꼬리를 흔들고, 사람들은 봄바람이 불어오는 초원에서 오랜만의 휴식을 만끽했다.
표사들에 섞인 천마교 무사들은 일양신마와 역부산, 그리고 일양신마를 호위하는 호위무사 다섯과 일반 무사 열다섯 명이었다.
그들은 철저히 일양신마와 역부산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광룡단원들은 그들과 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쉴 자리를 골랐다. 특히 밀천회의 고수들과 황산검문의 제자들은 더 뒤쪽으로 앉았다. 아직까지도 마음의 껄끄러움을 털어내지 못한 것이다.
유일한 예외라면 이무환과 남궁산산이었다.
이무환은 남들이 가자미눈으로 쳐다보든지 말든지, 역부산 옆으로 다가가 풀 위에 앉았다.
‘이 자식이 왜 온 거지?’
역부산이 내심 불안해할 때다. 이무환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 신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보쇼, 십팔마종이 천마교에서 제법 유명하다는데, 그중에 누가 제일 셉니까?”
거기까지는 그래도 들어줄 만했다. 하지만 이무환의 말이 이어지자 역부산의 이마에 서너 줄기의 핏줄이 돋아났다.
“역 형은 몇 번째나 됩니까? 설마 맨 끝은 아니겠죠?”
‘역 형? 새파란 놈이 언제 봤다고 ‘형’이야? 거기다 뭐? 맨 끝?! 이 건방진 놈을 확 때려죽이고 뇌옥으로 들어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래도 한 번은 더 참았다. 일양신마가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내가 왜 네 형이냐? 나는 너처럼 뺀질거리는 동생을 둔 적 없다!”
물론 이무환은 역부산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고 해서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다.
“아저씨라고 부르기는 좀 뭐하고, 대협이라고 하자니 천마교의 사람이라 그것도 좀 그렇고. 별수 있나요?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형이라고 부른 거죠. 뭐, 싫다면 그냥 이름을 불러줄 수도 있는데… 그건 아무래도 역 형이 기분 나쁘겠죠?”
‘개자식! 이미 기분은 머리 꼭대기까지 나빠졌어, 인마!’
역부산은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꾹 참고, 으르렁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대체 너는 뭐 하는 놈이냐? 왜 저들을 따라온 거지?”
이무환은 좌우를 돌아다보고는 나직이 말했다.
“그건 비밀이오, 비밀.”
“비… 밀?”
“혹시 모르잖수. 이 중에 첩자가 있을지.”
“별 미친……. 끄응, 후욱…….”
역부산은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잖아도 약간 붉은 얼굴이 더욱 벌게졌다.
이무환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꼬맹아, 저쪽으로 가자. 아무래도 이 양반 어디 아픈갑다.”
“아이, 오빠. 왜 자꾸 저 아저씨를 놀리는 거예요?”
“내가 언제 놀려? 그냥 누가 세냐고 물은 것뿐인데. 걱정 마. 곧 괜찮아질 거야.”
역부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분노로 인해 눈앞이 노랗게 보였다.
와중에도 한마디만 더 하면 일양신마가 보고 있든 말든 주먹부터 날리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이무환은 일양신마 옆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능구렁이 같은 새끼, 재수 좋게 귀신처럼 피해가는군.’
이무환은 일양신마와 일 장 정도 떨어진 곳에 퍼질러 앉았다.
일양신마의 눈이 묘한 빛을 띠었다.
‘역부산의 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견뎌 내다니. 허어,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단 말인가?’
그때 이무환이 물었다.
“대리 단리가의 사람이라던데, 정말입니까?”
일양신마의 눈이 깊어졌다. 그는 순순히 대답해줬다.
“반만 사실이네.”
“호오, 그런데 왜 마인들의 소굴인 천마교에 계신 겁니까?”
천마교의 사람들이 일제히 이무환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일양신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담담히 대답했다.
“천마교라고 해서 다 마인들만 있는 것은 아니네. 정파에 다 선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야.”
이무환이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맞아요. 하, 하, 하. 정파라고 해서 다 선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죠.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서 십수 년 동안 꿍꿍이를 피운 사람들도 있는데요, 뭐.”
초원에 앉은 사람들 중 이무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한쪽에 앉아 있던 밀천회의 고수들 표정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물론 이무환은 그쪽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우천도 천마교에 스며든 지 십 년이 넘었죠?”
“정확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알고 있네.”
“근데 왜 여태 그냥 놔둔 거죠? 설마 아무도 몰랐던 건가요? 아니면 내부 인사 중에 사우천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있었던 건가요?”
일양신마의 얼굴에 쓴웃음이 걸렸다.
“총교에 가면 다 알게 될 거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군.”
“흐음, 미리 알면 좋을 텐데. 뭐, 할 수 없죠.”
이무환이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자 일양신마가 기회라는 듯 물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에 대해 알고 싶군. 자넨 누군가?”
이무환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천마교에 가면 알게 될 겁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군요.”
일양신마의 눈에 기이한 한기가 서렸다.
“미리 알면 안 되겠나? 그 정도는 알아도 될 것 같은데 말이야.”
“에이, 알 만한 분이 왜 그러세요. 주는 게 있어야 받을 수 있다는 말, 못 들어봤어요?”
일양신마는 역부산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거 참, 혀에 기름을 발랐나? 정말 얄밉게 말하는 놈이군.’
하지만 그는 역부산이 아니었다. 화를 내는 대신 차분한 말투로 역공을 했다.
“그건 그렇지. 하나 자네가 먼저 줄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노인네가 고집은. 그냥 조금만 참아요. 나도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우리 꼬맹이가 그래서 참고 있는 거니까요.”
노인네가 뭐 어째?
일양신마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바로 그때, 이무환이 갑자기 굳어진 표정으로 몸을 반듯이 세웠다.
동시에 하얀 미소가 이무환의 입가로 번졌다.
일양신마는 갑작스럽게 변한 이무환의 태도를 보고, 막 열려던 입을 닫았다.
‘이놈이 왜 이러지?’
그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이 이무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 꼬맹아, 어디 가지 말고 오빠 옆에 있어라.”
남궁산산은 여러 말 하지 않았다.
“예, 오빠.”
짧게 대답한 남궁산산은, 옆에 내려놓은 보따리 속에서 여덟 개의 깃발을 꺼내 양손에 나누어 쥐었다.
순간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십여 장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광룡단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천마교의 무사들과 표사들도 엉겁결에 엉덩이를 털고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 일양신마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그도 바람과 함께 밀려드는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문제는 그 기운에 살기가 실려 있다는 것이었다.
역부산도 뭘 느꼈는지 빠르게 명을 내렸다.
“구릉으로 올라가서 주위를 살펴봐라!”
목조릉이 표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경계를 철저히 하고 적을 상대할 만반의 준비를 갖춰라!”
천마교의 무사들 중 열 명이 사방으로 흩어져 구릉으로 올라갔다. 그동안 표사들은 마차를 둘러싼 채 무기를 빼 들었다.
역부산은 고개를 쳐들고 구릉 위를 주시하고, 대전에서 보았던 다섯 명의 장한은 일양신마의 주위를 에워쌌다.
길어봐야 다섯 호흡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천마교의 무사들이 막 구릉의 정상에 올랐을 때다. 양편의 구릉 반대편에서 공격을 알리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놈들이 눈치챘다! 쳐라!”
“한 놈도 남김없이 쓸어버려!”
일순간 수십 명의 흑의무사가 구릉 위에 나타났다. 진녹의 초원 위에 검은 띠가 둘러진 듯했다.
그들은 모습을 보임과 동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천마교의 무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상대가 누군지 알 필요도 없다는 듯 그들은 철저히 살수를 쓰며 천마교의 무사들을 몰아쳤다.
순식간에 서너 명의 천마교 무사들이 피를 뿌리며 구릉에서 굴러 떨어졌다.
몇 번의 손속을 나눠보지도 못한 채 천마교의 무사들은 다급히 구릉 아래로 신형을 날렸다.
흑의무사들은 구릉을 넘어 아래쪽으로 내달렸다.
“얼마든지 와라, 이놈들!”
역부산이 앞으로 나서며 구릉이 들썩거리는 목소리로 일갈을 내질렀다.
쏴아아아!
거센 파도에 모래사장이 쓸리듯 스산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의도적으로 한 자 길이로 자란 잡초들을 스치며 내려오는 것이다.
녹색의 대지에 먹물을 쏟아부은 듯하다.
숫자는 일백 명 정도. 삽시간에 이십여 장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그때 선두에서 달려오던 중년인이 신형을 날렸다.
“놈!”
역부산이 등 뒤의 도를 빼 들고 그를 향해 마주 쳐갔다.
찰나간에 두 사람의 간격이 좁혀지고, 중년인의 검과 역부산의 도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쾅!
중년인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역부산은 뒤쪽으로 튕겨져 터덕거리며 다섯 걸음을 물러섰다.
이를 악다문 역부산이 경악한 표정으로 중년인을 향해 소리쳤다.
“명가의 마륜검이구나!”
부릅뜬 눈이 잘게 떨렸다. 외치는 목소리도 가늘게 떨렸다.
땅으로 내려선 중년인, 명위진은 입을 꾹 다문 채 다시 쇄도했다.
냉정한 표정, 차가운 눈빛.
검이 모든 것을 말해줄 뿐, 굳이 말이 필요 없었다.
쩌저저저정!
눈 한 번 깜짝이는 동안 두 사람의 도검이 십여 번이나 부딪쳤다.
고수들의 대결에서는 무기끼리 부딪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도 서로가 물러서지 않고 도검에 부딪쳐 간다.
밀리지 않겠다는 오기. 상대의 장점을 눌러 단숨에 승기를 잡겠다는 자신감의 발로다.
“이익! 으아아아!”
뒤로 밀리자 역부산이 고함을 내지르며 도를 십자 형태로 그어댔다.
도강이 폭풍처럼 일어나며 밀려드는 검강을 몰아쳤다.
마랑십자도(魔浪十字刀). 역부산이 이십 년간 익힌 절정의 도법이었다.
그러나 명위진의 마륜검은 조금의 멈칫거림도 없이 역부산의 도강을 파훼했다.
쩌저적! 콰광!
“크윽!”
역부산이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부산! 뒤로 물러서라!”
일양신마가 소리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단걸음에 오 장여를 죽 미끄러져 간 그는 오른손을 들어 앞으로 뿌리듯 휘둘렀다.
그사이에도 흑의무사들은 멈추지 않고 중앙을 향해 달려들었다.
일양신마를 호위하던 장한들은 일양신마가 움직이자 흑의무사들을 향해 마주 쇄도했다.
광룡단이 움직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삼조는 저들을 도와주고, 나머지는 표사들을 도와줘!”
이무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천하 최강의 졸병들, 광룡단의 고수들이 흑의무사들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밀천회 사람들은 흑의무사의 출현이 무척 반가웠다. 광룡을 대신해서 기분을 풀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흑우령 오대가 아무리 강하다한들 광룡단의 상대가 되진 못했다.
쩌저저정! 콰과광!
“크어억!”
“허억!”
“어디서 이런 자들이……. 끄억!”
광룡단의 움직임은 말 그대로 광풍이었다.
광룡의 광풍!
한차례 광룡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곳에 삼십여 구의 시신만이 남았다.
광룡단과 흑의무사들이 얽혀들고, 미처 세 호흡의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던 흑의무사들이 주춤거렸다.
두려움이라는 말 자체를 모를 것 같던 그들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그들을 향해 광룡단이 나아갔다.
흑의무사들 중 한 사람이 입술을 짓씹으며 소리쳤다.
“우리는 죽어도 여기서 죽는다! 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