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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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59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93화
193화
갑자기 냉기가 흘렀다.
역부산이 부릅뜬 고리눈에 힘을 주고, 뒤에 서 있던 다섯 명의 장한이 싸늘한 살기를 뿜어냈다.
이무환은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턱짓을 하며 다시 물었다.
“저 양반이 성질이 불같다는 열혈마종 역부산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노인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거든요. 척 보니 함께 가실 분 같은데, 이름 좀 알려주면 안 됩니까?”
역부산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어린 친구, 어른들이 있는 자리네. 궁금한 것이 있어도 참아야 하지 않겠나?”
“아따, 이름 좀 알려달라는데 뭘 그렇게 성질을 내십니까?”
“성질을 내는 게 아니라…….”
역부산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성질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그러나 자리가 자리인만큼 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노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노부는 단리라는 성을 쓰는 늙은이네.”
“그래요? 하, 하. 저는 성이 이 씨지요. 정말 반갑습니다, 단리 노인장. 가는 동안 재미있는 이야기 있으면 많이 들려주십시오.”
“저……!”
역부산이 당장 달려들 것처럼 씩씩거렸다.
자신이 존경하는 노인에게 저 따위 태도라니!
하지만 노인이 손을 살짝 들어 제지하자 차마 더 이상 나서지 못했다.
“부산, 도와주러 오신 손님들이다. 함부로 나서지 마라.”
“끄응, 알겠습니다, 어르신.”
‘빌어먹을 놈. 어디 가면서 보자.’
역부산의 발작을 막은 노인은 기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무환과 남궁산산이 왜 이들 일행에 섞여 있는지 그도 궁금했다. 천마교의 어려움을 도와주러 온 사람으로 보기에는 너무 어리고 천방지축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아무도 이무환의 행동과 말을 말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는 눈빛들이다. 그 점이 더 이상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놈이로고……. 생긴 것은 기생오라비 같은데, 뭔가 숨긴 재주가 있나?’
그때 이무환이 물었다.
“그건 그렇고, 한 시진 후에 간다면 좀 쉬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하는 거요?”
처음의 장한이 목조항을 쳐다보았다.
목조항이 장한을 향해 명을 내렸다.
“네가 안내해 드려라.”
“예, 국주.”
첫 번째 만남은 그렇게 지나갔다.
아마 목조항이든, 역부산이든, 처음부터 세심히 살폈더라면 광룡단원 중 서너 사람 정도는 알아봤을지 몰랐다.
헌원숭이나 소천득도 그렇고, 황산의 제자나 만겁궁의 사람 중 몇은 그래도 강호 활동을 한 사람들이니까.
그러나 이무환이 덤벙거리는 바람에 그들은 살펴볼 정신이 없었다.
더구나 구룡성에서 나온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 사이에 십마십존에 속한 사람과 만겁궁과 황산검문의 사람들이 섞여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터였다.
하긴 어쩌면 알지 못한 게 다행일 수도 있었다. 알았다면 심각한 고민을 했을 테니까.
늑대를 쫓아내려다 호랑이를 끌어들인 것 아닐까?
그런 고민을.
돕고 도움을 받는 관계라 해도 껄끄러운 사이인 것만큼은 분명했다. 어설프게 인사를 나눈 광룡단은 처음에 안내를 했던 장한을 따라 대전을 나왔다.
장한은 광룡단을 장원의 뒤쪽에 외따로 떨어진 별원으로 안내했다.
별원으로 들어간 후에야 남궁산산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오빠, 그 노인이 누군지 생각났어요.”
뒤에서 따라오던 사람들도 궁금했는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래? 누구야?”
“그 노인이 바로 천마교의 장로인 구마신(九魔神) 중에서 서열 칠위에 올라 있는 일양신마예요. 천마교의 장로들은 대부분이 안개에 싸인 것처럼 알려진 것이 없는데, 일양신마가 대리 단리세가의 후예라는 것을 언뜻 본 적이 있거든요.”
“흠, 그래? 그러니까, 그 노인이 천마교의 장로인 일양신마란 말이지?”
“아마 십중팔구는 맞을 거예요.”
일양신마(日陽神馬)라는 말에 몇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
실력은 천중십마나 우내십존에 뒤질지 몰라도, 이름이 가진 무게는 결코 그들 못지않은 사람들. 그게 천마교의 구마신이었다.
그들은 길게는 이삼십 년, 최근이라 해도 십여 년 전부터 강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들 중에 십마십존과 비등한 고수가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자가 직접 마중 나왔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천마교의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
그러니 어찌 신경이 쓰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이무환은 태평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밥은 언제 주지?”
반 시진쯤 지나자 식사가 나왔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후, 남궁산산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는데 연락이 왔다. 출발 준비가 끝났다는 것이었다.
이무환은 일어나기 싫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내일 출발해도 되는데…….”
“빨리 끝내고 섬에 가야죠.”
“그건 그런데…….”
“사람들이 기다릴 거예요. 가요, 오빠.”
쪽.
남궁산산이 볼에 입을 맞추자 이무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래, 가서 빨리, 왕창 뒤집어놓고 비룡도로 가야지.’
4
다섯 대의 마차. 이십여 명의 쟁자수. 거기에 표사가 백 명에 이른다. 평소 보기 드문 대단위의 표행에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감탄하며 구경했다.
표행은 남창 성내를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러다 남창성이 까마득해질 즈음, 쟁자수들을 마차에 태우더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다섯 대의 마차에 꽂힌 천응표국의 표기가 바람에 휘날린다.
그 옆을 따라 백 명의 표사가 빠르게 달린다.
그 광경이 파랗게 펼쳐진 파양호와 어우러진다.
누가 봐도 가슴이 불끈 달아오르는 기분이 느껴질 정도의 멋진 광경이었다.
그러나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 갈의중년인과 청삼장한은 오히려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단순한 표행이라고 보느냐?”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표사가 너무 많습니다.”
“마차 다섯 대다. 중요한 물건이라면 당연한 숫자다.”
“총교로 가는 표행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지 몰라도 반이면 충분합니다.”
강서 땅에서 천응표국의 표행을 건들 만큼 간 큰 도적은 없다. 아니, 그게 아니라도 천마교로 가는 표행이라면 그 어떤 도적이든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사실 오십 명의 표사가 움직인다 해도 천응표국의 위용을 내보이기 위함일 뿐, 도적이 걱정되어서가 아닐 터이다.
갈의중년인도 그걸 알기에 질문을 돌렸다.
“그럼 이유가 무어라 생각하느냐?”
“최근 며칠간 천응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남창 내의 순찰을 강화하고, 내부의 경비무사들도 알게 모르게 증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처음 보는 무사들이 남창으로 들어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제가 볼 때는 그들과 관련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주.”
“모두 몇 명이었지?”
“사십 명 정도였는데, 열 명 내외로 나누어져서 들어오는 바람에 신경을 덜 쓴데다가, 알아보려 했을 때는 이미 모습을 감춰서 정확한 정체를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저 표행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고 보는 거냐?”
“모르는 표사들이 상당수 섞여 있는 걸로 봐서 확실한 것 같습니다.”
“사십여 명이라… 그 정도의 숫자는 본 천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 대주님의 말씀도 맞습니다. 하나 분명한 것은 뭔가 수상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갈의중년인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숨을 서너 번 쉰 다음에야 나직이 물었다.
“천응표국이 총교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고 보는 것이냐?”
“천응표국은 일개 표국이 아닙니다. 강호의 어떤 세력과도 자웅을 겨룰 정도로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울었다면 ‘천’에 충분히 위협이 될 것입니다.”
“건방진 말! 지금 네 말이 뭘 뜻하는지 아느냐?”
갈의중년인은 싸늘한 눈빛으로 장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장한은 눈을 빛내며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말했다.
“‘천’의 능력을 모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천응표국이 과거의 관천검문만 한 힘을 이루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함에도 천에서는 지금까지 저들을 너무 소홀히 다루었습니다. 속하는 그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대주.”
뚫어지게 장한을 바라보던 갈의중년인의 눈빛이 서서히 수그러졌다.
“천의 결정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위종. 하나 너무 날카로우면 스스로의 몸을 찌르는 법이다. 나는 네가 욕망으로 물든 자들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어찌 제가 대주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장한이 고개를 숙였다. 갈의중년인은 묵묵히 장한을 바라보다 다시 눈을 표행으로 향했다.
“저들을 시험해 볼 것이다. 너는 네 조원들과 함께 뒤로 처져 있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즉시 천으로 돌아가라.”
장한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주, 위험합니다.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갈의중년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너는 위현이와 함께 우리 가문의 희망이다. 네가 할 일은 따로 있다. 뭘 해야 하는지는 네가 더 잘 알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의 일은 우형에게 맡겨라.”
“대… 형님, 하지만 본대만으로 시험하기에는 적들을 너무 모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모르니 알고자 하는 것 아니더냐? 너무 염려하지 마라. 흑우령 최약체라던 본대를 지난 일 년 동안 열심히 키운 덕에 전력도 이제는 다른 대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다. 정 안되겠다 싶으면 물러설 것이다.”
저들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물러서는 것은 어렵지 않을 듯했다. 그런데도 장한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가슴이 무거웠다.
“형님…….”
그의 마음을 아는지, 갈의중년인은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고 한마디 더했다.
“나도 결코 약하지 않다. 너도 알잖느냐? 령주가 왜 나를 곡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지. 후후후…….”
형이 웃는다. 조소에 가까운 웃음이다.
장한, 명위종은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 있기에 이를 악다물었다.
그의 형인 명위진은 강하다. 흑우령의 일개 대주로 있다는 것이 말도 안 될 만큼.
‘천’에서도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한데도 ‘천’에서는 형을 멀리한다.
겉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하나. 천마교의 전대 호교신장가였던 명가의 후예라는 것 때문이다. 득세하면 배신하고 천마교와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하지만 웃기는 소리였다.
어차피 천마교를 등진 명가다. 더구나 등을 진 이유가 무엇이던가. 명가가 순우가보다 더한 신망을 받는 것에 불안해진 교주의 견제로 집안이 몰락했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 사실을 ‘천’도 안다. 천마교주와 다시 손잡을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천에서 명가를 멀리하는 진짜 이유는 단순하다.
명가 후예들의 자질이 너무 뛰어나다는 것!
사우천의 집권자들 역시 천마교의 교주 가문인 순우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형님……!’
명위종은 더 이상 말릴 수 없음을 알고 고개를 숙였다.
“저들 중 어떤 고수가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최대한 조심하셔야 합니다, 형님.”
명위진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자신감에 찬 미소였다.
“걱정 마라. 나 명위진, 비록 너만은 못하지만, 십마십존만 아니라면 누구와 붙는다 해도 쉽게 밀리지 않는 실력이니라.”
명위종도 모르지 않았다.
‘후우… 믿자, 형님의 실력이야 내가 잘 알지 않는가?’
제8장. 광룡의 말에 토를 달지 마라
1
표행은 남쪽으로 길을 잡고서 쉬지 않고 달렸다.
백 리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면 호수가 끝난다. 표행은 그곳에서 서쪽으로 꺾어질 계획이었다. 그래야 자잘한 수로를 거치지 않고 시간을 아낄 수가 있으니까.
이무환은 남궁산산의 손을 잡고 유람하듯 걸었다.
바다처럼 드넓은 파양호를 끼고 달리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소호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으아, 소호보다 더 크다던데, 정말이야?”
“몇 배는 될 거예요. 남북으로 길게 뻗은 길이가 오백 리나 된다고 하잖아요.”
“오.백. 리? 으아아, 그렇게 커?”
연속되는 이무환의 괴상한 탄성에 광룡단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음을 옮겼다.
심지어 얼마 전부터는 천응표국의 표사들도 두 사람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그래도 이무환은 쉴 새 없이 좌우를 둘러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꼬맹아, 저기 봐라! 오리 떼가 백 마리도 더 될 것 같다!”
말발굽 소리에 놀랐는지 물가의 오리가 떼 지어 날아오른다. 백 마리가 아니라 수천 마리는 될 성싶었다.
“삼천 마리도 넘겠는데 백 마리라니, 자네는 숫자도 못 세는가?”
역부산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이무환이 슬쩍 그를 돌아보고는 별 웃기는 사람 다 봤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백 마리 넘는다고 했잖수? 별걸 가지고 다 시비야. 생긴 것은 꼭 산도적같이 생긴 양반이.”
역부산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 쥐방울만한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