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18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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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08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189화
189화
혈사단 무사들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다.
뒤는 삼십여 장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 적을 급습하기 위해 유리한 지형을 점유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그 점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소천득은 칠성의 공력을 팔성까지 끌어올려서 한 수 한 수에 상대의 목숨을 확실하게 끊었다.
호랑이도 재수 없으면 굶주린 들개 떼에 물릴 수 있는 법. 손속에 인정을 남긴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콰직! 퍽!
그는 가슴뼈가 함몰된 자도 냉정하게 목을 쳤다.
쩍 갈라진 목에서 피분수가 솟구친다.
칙칙한 바람을 타고 퍼지는 자욱한 피안개!
누군가가 소천득의 수법을 보고 대경해 소리쳤다.
“절수……! 절명마수 소천득이다!”
“며, 명부신사도 왔다!”
천중십마 중 두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온다.
제아무리 수년간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해도 강호의 하늘인 천중십마의 상대가 될 수는 없는 일.
두 사람의 정체가 그나마 남았던 혈사단 무사들의 투지조차 흔들어놓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혈사단의 무사들 중 서너 명이 절벽 위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헌원숭이 허공에 뜬 채 활을 튕기자, 솟구치던 무사들이 날개 꺾인 기러기처럼 떨어졌다.
그사이, 모용상명과 하후영과 장화풍 등 다섯 명의 밀천회 고수가 달려와 공격에 가담했다.
그들은 이무환에게 억눌린 감정을 풀어버리겠다는 듯 혈사단의 무사들을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였다.
일검에 사지가 잘리고 일수에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진다.
옅은 안개 속에서 튀어 오르는 피분수!
콧속을 파고드는 비릿한 피 냄새!
그 순간만큼은 정파의 기재도, 강호의 협사도 그곳에 없었다. 그저 피에 미친 살귀들만이 있을 뿐.
한편, 이무환은 밀천회의 공격을 놔둔 채 길을 따라 올라갔다. 남궁산산은 광룡사위와 엽상, 종리난경, 신기영, 그리고 수룡단의 무사들과 함께 산촌에 놔두고 온 터,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시간을 끌면 도망갈지 몰라.’
좌측에서는 황산검문의 사람들이, 우측에서는 광룡단이 기러기 날개처럼 대형을 넓게 펼치고 그를 따라 움직인다.
이대로 가면 이각 안에 적들의 본진과 부딪칠 듯했다.
이미 적들은 첫 번째 계획을 거두어들인 상태였다.
자신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모르는 상황.
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것마저도 꼬맹이와 함께 궁리해 놓았으니까.
“이대로 전진할 것인가?”
도검을 거꾸로 꽂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암봉이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 오 장의 거리를 두고 움직이던 무설강이 물었다.
적들의 암습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놈들은 다시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본진 쪽과 합류했을 거라니까요. 그사이 최대한 압박을 해야 우리가 편해진다구요.”
이번에는 제갈신걸이 물었다.
“그러다 놈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질 수도 있네.”
“시간도 없는데, 설마 백 장 깊이의 땅을 파놨겠수, 아니면 머리가 우리 꼬맹이만큼 좋아서 기문진을 설치했겠수? 기껏 해봐야 지형을 이용해서 합공하려고나 하겠죠.”
그것도 그럴듯했다.
더구나 상당한 거리를 두고 움직이는 만큼 함정을 파놨다고 해도 걸리는 사람은 극히 일부일 터. 놈들도 별무효과일 것이 뻔한 일을 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무 형님은 뇌고자와 몇 사람을 데리고 뒤로 처져서 밀천회 사람들이 합류할 때까지 황산 사람들을 도와주쇼. 앞은 나와 광룡십조가 맡을 테니까.”
무설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광룡십조라니, 누굴 말하는 건가?”
“어? 내가 광룡의 발톱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던 가요?”
“광룡의… 발톱?”
“새로 뽑은 사람들 있잖아요. 그들을 광룡십조라고 부를 생각입니다. 어때요? 괜찮은 이름이죠?”
순간 십여 장 뒤에서 따라오던 열 명의 몸이 흔들렸다.
광룡의 발톱이라니!
하지만 이무환의 이어진 말을 듣고 이만 악물었다.
“그게 싫으면 광룡의 이빨, 광룡십아라고 부를 생각이죠. 하하하!”
무설강은 내심 자신이 그 안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는, 그래도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그래도 지형을 모르면 곤란해지지 않겠나?”
“골치 아프게 깊이 생각할 것 없어요. 그냥 달려가면서 막는 놈들 있을 때마다 다 때려부수면 된다니까요.
과연 광룡다운 무식한 작전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무환을 비웃지 않았다. 무식한 작전을 시행하기 이전에, 그만큼 철저히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이 바로 광룡 이무환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초문광은 그 점을 알지 못했다. 하기에 광룡단과 황산검문의 제자들이 몰려오는 걸 보고는 싸늘히 비웃었다.
“겁도 없는 놈들. 죽을 자리로 잘도 찾아오는군.”
“그만큼 자신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흥! 본 단의 무사들도 결코 약하지 않네.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야.”
초문광이 코웃음 치며 아집에 가까운 고집을 버리지 않는다. 환비는 그런 초문광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광룡이 어떤 괴물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곧잘 그런 생각을 하지. 하긴 당신이 그를 어찌 알 것인가?’
추적대에 광룡이 끼어 있다는 걸 알고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말해봐야 믿지도 않을 게 뻔했으니까.
환비는 잠시 초문광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옆에는 십여 명이 두 사람의 명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중 잠풍련의 사람들은 모두 넷. 환비는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보일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말한 대로 시행하시오.>
3
칼날처럼 솟은 암봉 숲을 지나 백오륙십 장을 전진하자, 깎아지른 절벽이 위용을 자랑하는 깊은 협곡이 나왔다.
백 장 높이의 절벽과 절벽 사이가 이십여 장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
협곡의 길이는 칠팔십 장. 수룡단의 대원이 그려놓은 지도에 나와 있는 곳이었다.
대열을 바꾸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이무환은 냉소를 머금고 선두에 서서 협곡 안으로 들어갔다.
그 바로 뒤를 광룡단이 따르고, 황산검문의 제자들이 뒤로 처졌다.
각자의 간격이 삼 장 정도 되다 보니 협곡을 다 지날 즈음이 되어서야 마지막 사람이 협곡으로 진입했다.
바로 그때, 협곡의 출구 쪽에서 백여 명의 적이 나타났다.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왔으니, 우리의 무정함을 탓하지 마라!”
“놈들을 쳐라!”
수장으로 보이는 두 명의 갈의중년인에게서 살기 가득한 목소리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나타난 자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거의 동시에 뒤쪽에서도 백여 명의 적이 모습을 보였다.
협곡 안에 가둬놓고 집중 공격을 하겠다는 뜻.
‘훗, 꼬맹이 말대로군. 이곳에서 적과 마주칠지 모른다고 하더니. 좌우간 귀신이 따로 없단 말이야.’
이무환은 걸음을 옮기며 묵린도의 도병을 잡았다.
공격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 적들이 달려든다.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행동. 일치된 몸놀림. 철저한 수련을 거친 자들이다.
협곡의 출구를 꽉 메운 채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자들.
선두에 선 이무환을 별 볼일 없는 애송이라 생각했는지, 그들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눈 깜짝할 새 거리가 십 장 이내로 줄어들었다.
순간 이무환의 입가에 하얀 웃음이 번졌다.
찰나, 이무환의 신형이 죽 늘어나는가 싶더니, 허공을 가르며 기다란 묵선이 그어졌다.
쩌저적! 따다당!
묵선에 걸친 서너 자루의 도검이 바싹 마른 갈대처럼 꺾어지고, 다섯 명의 무사가 달리던 그대로 꼬꾸라졌다.
비명도 없고, 신음도 없었다.
털썩, 털썩.
그들이 쓰러진 후에야 시뻘건 피분수가 솟구쳤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경악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조심해! 보통 놈이 아니다!”
대경한 자들이 이무환과 거리를 벌리는 짧은 시간, 세 명의 무사가 더 쓰러졌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묵빛 도강이 스치는 곳에서는 여지없이 피가 튀고, 두세 명의 무사가 허수아비처럼 무너져 내렸다.
“크어억!”
“물러……. 켁!”
구궁산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진정한 광룡이 되기로 작정한 이무환이다. 구궁산에 지옥이 펼쳐지더라도 그는 손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막는 자는 모조리 벤다!
이무환에겐 오직 그 생각만 했다.
몇 번의 칼질에 이십여 명이 속절없이 쓰러지자, 진득한 공포가 혈사단 무사들의 가슴속으로 안개비처럼 스며들었다.
죽음만이 존재하는 공포의 도법.
묵빛 도강에 스친 것은 그 무엇도 성한 것이 없었다. 검도, 도도, 그 어떤 무기도 견디지 못하고 잘려 나갔다.
그뿐이 아니었다. 좌수에 걸린 것도 모든 게 부서졌다.
팔다리든, 가슴이든, 심지어 무기조차 부서졌다. 마치 상대의 좌수가 인간의 손이 아닌 듯 느껴질 정도였다.
당랑거철(螳螂拒轍)!
수레를 막는 사마귀가 된 기분.
도저히 안 되겠는지 수장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악을 쓰듯 외쳤다.
“그놈은 놔두고 다른 놈들부터 쳐라!”
혈사단의 무사들은 전진도 멈춘 채 좌우로 간격을 벌리기에 급급해졌다.
그러나 광룡만이 사나운 것이 아니었다.
바로 뒤따라오던 광룡십조가 좌우로 물러선 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무환은 묵린도를 옆으로 늘어뜨리고 냉랭히 소리쳤다.
“좋아! 광룡십조! 놈들에게 광룡의 매운 발톱 맛을 보여주라고!”
이무환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광룡십조의 손에서 펼쳐지는 공세도 더욱 거세졌다.
마치 상대가 이무환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은 한 수 한 수 철저히 살수만을 펼쳤다.
그러잖아도 개개인의 무위에서 현저한 차이가 나던 터였다. 거기에 공포심으로 정신마저 흔들린 혈사단의 무사들은 연수합공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빠르게 무너졌다.
아무리 극한의 수련을 했다 해도 그들 역시 사람임은 분명한 일. 채 반 각이 지나기도 전,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들던 혈사단의 무사들이 하나둘 전장을 이탈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스물을 셀 즈음에는 협곡의 출구에 시신만이 남았다.
한편 그 시각.
뒤쪽도 앞쪽이나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밀고 당기는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었다.
그러나 호연청과 황보광 등 밀천회의 고수들이 합류해 등 뒤를 치자, 앞뒤로 적을 맞이한 혈사단의 무사들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세 배의 인원 차이도, 끈질긴 정신력도 무위가 크게 차이나지 않을 때의 이야기였다.
절대고수 한 명의 무력은 절정고수 열 명이라 해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 하거늘, 네 명의 절대고수가, 그들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고수들 칠팔 명과 함께 뒤를 친 상태다.
혈사단의 무사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일각이 지날 무렵.
협곡에 울려 퍼지던 비명과 악다구니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싸움이 끝났을 때 남은 시신은 모두 혈사단 무사들뿐이었다. 도망친 자는 오십 정도에 불과했다.
이무환의 일행 중에서는 밀천회의 고수 세 명과 황산검문의 제자 대여섯 명만이 부상을 입었을 뿐, 사망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부상을 당한 사람들 중 중상을 입은 사람은 단둘이었다.
완벽한 승리!
그러나 승리의 환호성을 올리기에는 아직 일렀다.
적이 아직도 반 가까이가 남은 상태인데다 환비의 얼굴은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잠풍련의 마귀들도.
“일단 부상당한 분들은 산 아래로 내려가쇼.”
이무환의 명령에 부상당한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수의 적을 물리친 상황. 그들이 없다 해도 별 상관이 없을 듯했다.
그때 제갈신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옆으로 돌아간 만겁궁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소. 여차하면 본진과 마주칠지 모르잖소?”
이무환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억지로 참여한 담사황이 부지런떨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반이나 올라왔으면 다행이지 뭐.’
그래도 겉으로는 무지 걱정된다는 투로 말했다.
“함정에 빠지면 위험할지 모르니 빨리 가보죠.”
4
산중턱, 절벽 위의 목옥으로 보고가 전해진 것은 싸움이 끝난 직후였다.
보고를 받은 초문광은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초문광의 창백하게 굳은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백 명의 혈사단 무사가 일각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줄이야!
뭔가가 어긋난 느낌. 왠지 모르게 모든 일이 비틀어진 것만 같았다.
고개를 홱 돌린 그가 불길이 이는 눈으로 환비를 노려보았다.
“나에게 알려준 정보가 확실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