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2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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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화
이무환은 차가운 눈빛으로 모용장호를 노려보았다.
묵묵히 서 있는 그의 앞에는 다섯 자가량 되는 세 치 깊이의 고랑이 파여 있었다.
절대사천좌의 극성 무공이 파천삼법이다. 다른 무공이라면 몰라도, 절대사천좌의 무공을 익힌 사람은 파천삼법에 대항할 경우 두 배의 충격을 받는다.
모용장호가 생각보다 큰 충격을 받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무환 역시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모용장호는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약을 처먹었던 천세도인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시간을 끌면 도망갈지도 모르는 일.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파천삼법을 연달아 펼쳤다.
한 번 펼칠 때마다 엄청난 내력을 소모하는 파천삼법의 특성상 그 역시 내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상태였다.
‘젠장, 역시 연달아 펼치는 것은 아직 무리야.’
그래도 이무환은 오연한 표정으로 모용장호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직 고후량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두려움에 질려 달려들지 못하고 있지만, 흔들림을 보이면 기회라 생각하고 달려들 가능성이 컸다.
그에게 지지는 않는다 해도 극심한 부상을 피할 수는 없을 터. 그런 엿 같은 경우는 원치 않았다.
그는 천마교도, 밀천회도 믿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놈들이 어디 한둘인가?
‘다른 것은 몰라도, 눈빛 하나만큼은 자신 있지. 우흐흐흐.’
이무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고후량을 노려보았다.
마치 ‘이제 네 차례다!’ 하는 표정을 지은 채.
눈빛이 마주친 순간, 고후량은 몸을 부르르 떨며 재빨리 뒤쪽을 살펴보았다.
‘제기랄! 저놈은 사람도 아니야!’
절대무적이라 믿었던 사우천주 모용장호가 극심한 부상을 입고 거꾸러지기 직전이다. 게다가 사령천마인도 거의 다 죽어가고, 사우천의 비밀 호위무사들도 태반이 죽은 상태다.
공포에 질린 그는 뒤쪽에 아무도 없자, 즉시 신형을 날려 신마전에서 도주했다.
‘살아야 나중을 도모할 수가 있어!’
“어딜 가느냐, 고후량!”
그때 신마전 뒤쪽에서 순우진성을 비롯한 천마교의 고수들이 나타나 고후량의 앞을 막았다.
그때였다.
당장 꼬꾸라져 죽을 것 같던 모용장호가 갑자기 몸을 날렸다.
“함께 죽자, 광룡!”
달려드는 모용장호의 전신에서 핏빛 안개가 뿜어졌다.
뻗은 손에서 일렁이는 녹색 기운 사이로 언뜻 작은 해골 하나가 보였다.
해골의 두 눈에서 뿜어지는 사이한 녹기!
‘저건 또 뭐야?’
그게 뭐든 상관없었다.
아무래도 놈이 마지막 남은 선천진기마저 끌어올린 듯했다.
이무환은 눈을 치켜뜨고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망할 늙은이! 곱게 죽으며 누가 뭐라고 하나? 혼자 지옥에 가면 받아주지 않을까봐서 걱정인 거야?’
이제 겨우 육 할의 내력을 찾은 터였다. 모용장호가 아무리 중상을 입었다 해도 선천진기를 끌어올렸다면 무시할 수 없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 거리도 먼데다가, 자신이 별로 부상을 입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젠장할!’
이무환은 두 손을 가슴으로 들어 올려 앞으로 내밀었다.
내력이 달려 제대로 펼쳐질지 자신조차 모른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마땅히 다른 방법도 없었다.
붉은 안개와 녹색 해골이 코앞에 닥친 순간!
이무환의 두 손 가운데에서 주먹만 한 구슬이 휘황한 빛을 번쩍이더니, 핏빛 안개를 뚫고 모용장호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퍽!
쇠북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모용장호의 몸이 훌훌 날아갔다.
심장이 박살 났는지 금포가 완전히 혈포가 되었다.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녹색 가락지는 산산이 부서져서 그의 얼굴에 촘촘히 박혔다. 그중 해골 문양이 이마에 틀어박혀서 괴이한 광경을 연출했다.
이무환은 바닥에 떨어져 버둥거리는 모용장호를 보며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먹먹한 가슴이 목구멍을 통해 밖으로 쏟아지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표를 내지 않고 악착같이 버텼다.
‘지미, 겨우 모은 내력이 다시 사라졌군. 이러면 출발이 늦어지는데…….’
무설강이 제일 먼저 이무환의 상태를 눈치챘다.
평소라면 입을 다물고 있을 이무환이 아니다. 그런데 너무 조용하지 않은가 말이다.
“괜찮은가, 아우?”
이무환은 주위를 둘러보는 것처럼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수?’
무설강은 재빨리 공손척과 제갈신걸과 유철상을 전음으로 불렀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나와 함께 아우를 호위하세.>
세 사람은 무설강의 말뜻을 알아듣고 이무환을 쳐다보았다.
이무환은 여전히 턱을 쳐들고 사우천주가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부상을 입었나?’
조금은 의심스러웠지만, 어차피 싸움도 끝나가는 판이었다. 나머지는 광룡십조와 밀천회 사람들에게 맡겨도 될 듯했다.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상의 방위에 서서 이무환을 호위했다.
그제야 이무환은 품속에 손을 넣어 두 알의 폭령잠마영단을 꺼내 입속에 털어 넣었다.
호연청이 그 모습을 곁눈으로 보고 눈빛을 번뜩였다.
아무래도 광룡이 중상을 입은 것 같았다.
지금 광룡을 제거할까?
절호의 기회였다. 아마 다시는 이런 기회가 안 올지 몰랐다.
질리도록 끈질긴 놈들도 거의 다 제거된 상태. 절대고수 넷이 몸을 빼낸다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문제는 무설강 등이었다. 자신들도 지친 상태다. 저들을 물리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듯했다.
그사이 광룡이 힘을 되찾는다면?
‘끄응, 죽이지 못하면 날벼락이 밀천회에 떨어지겠지…….’
그는 한 번의 판단 실수로 밀천회가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때 소천득의 전음이 귀청을 울렸다.
<호령주, 광룡이 중상을 입은 것 같은데…….>
다시 욕심이 꿈틀거렸다.
‘그냥 확 저질러 버려?’
그때 이무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우, 약을 먹었더니 속 쓰린 게 조금 가라앉는군.”
호연청은 욕심을 구만 리 밖으로 내던지고 정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군. 나는 또 내상을 크게 입은 줄 알았네. 허, 허, 허.”
웃음까지 흘리며 대답한 호연청은 고개를 돌려서 밀천회의 고수들을 독려했다.
“자, 빨리 끝내세!”
이무환은 그런 호연청의 뒤통수를 흘겨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어디서 잔머리를 굴려?’
공력을 오할 정도까지 회복한 것은 반 각가량이 지나서였다.
이무환은 두어 번 내력을 끌어올려 보고는, 나머지 싸움은 천마교에 맡기기로 하고 곧바로 몸을 돌렸다.
더 이상 남아 있어봐야 좋을 게 없었다.
광룡단원들은 시신과 부상자를 챙겨 신마전을 떠나왔다.
천귀쌍도 중 잔도, 만겁궁의 고수 중 묵청, 황산검문의 하진악이 죽었다. 그리고 밀천회의 조광익도 중상을 입고 옮기던 중에 숨을 거두었다.
모두가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천마교를 집어삼키려는 사우천과의 싸움에서 네 명이 죽은 것은 피해라고 볼 수도 없을 만큼 미미했다.
그러나 한 명이 죽으나 백 명이 죽으나 가슴이 아픈 것은 마찬가지였다.
전쟁은 신마전의 건물이 무너지면서 급격히 끝을 맺기 시작했다.
신마전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팔백에 이르는 사우천의 무리들 중 삼백여 명이 도망을 친 것이다.
그리고 교주파가 공격한 지 한 시진이 지날 무렵, 마지막까지 버티던 천마교의 부교주파들도 결국 손을 들고 투항을 했다.
3
이무환이 거처로 돌아오자 남궁산산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귀신처럼 이무환의 상태를 눈치챈 것이다.
“많이 다쳤어요? 괜찮아요?”
“쳇, 그 늙은이가 잠풍련의 늙은이보다 더 강할 줄은 미처 몰랐어. 약을 처먹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강하다니. 아무래도 바로 떠나지는 못하겠다. 너무 무리를 했어.”
“왜 무리를 하고 그래요?”
“빨리 끝내려고 그랬지. 아버지 구하러 가야잖아. 아이고, 네가 자꾸 물으니까 더 아픈 거 같다.”
광룡사위와 엽상이 이무환을 흘겨보았다.
‘하여간 엄살은…….’
그래도 남궁산산은 이무환의 품에 반쯤 안겨서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약은 먹었어요?”
“어, 두 알이나 먹었어.”
“그래서 눈이 빨개진 건가?”
남궁산산의 말에 영호승 등은 움찔하며 슬며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폭령잠마영단을 이미 지나치게 복용한 광룡이다. 눈이 빨개졌다면 이번에는 진짜로 미칠지도 몰랐다.
그들은 미친 광룡에게 맞아죽고 싶지 않았다.
“저희들은 이제 밖을 지키겠습니다.”
“어? 그래? 그럼 나가봐.”
이무환은 빨리 나가라는 듯 손까지 저었다. 영호승 등으로선 바라던 바였다.
영호승 등이 나가자 이무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근데 꼬맹아, 사우천 놈들 속에 환비가 보이지 않았어. 어떻게 된 거지?”
환비가 사우천과 합류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환비는커녕 잠풍련의 무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보이지 않자 왠지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구궁산에서 당한 충격이 작지 않았을 거예요. 안 되겠으니까 일단 조용해질 때까지 어디로 숨은 거 아닐까요?”
“하아, 그 자식을 잡아야 하는데…….”
“그전에 오빠 몸부터 돌보세요. 절강에 가려면 몸부터 나아야죠.”
“쩝, 그건 그렇지.”
남궁산산이 슬그머니 이무환에게 다가갔다.
“제가 도와줄게요, 오빠. 요상에 좋은 무공을 하나 알고 있거든요.”
“응? 어떤 무공인데?”
“음양구전공(陰陽口傳功)이라는 건데요. 잘하면 오빠가 먹은 영단의 약효를 최대한 이끌어 올려줄 거예요.”
“음양구전공? 좋아, 해보지 뭐…….”
4
전쟁이 끝난 후 남겨진 것은 일천이 넘는 시신과 통곡처럼 울려 퍼지는 신음뿐이었다.
피가 골을 타고 흘러 산 아래쪽에 고였다. 무이산 일대에 사는 까마귀들과 맹금류가 천마교가 있는 무이산 서북쪽으로 모여들었다.
사상 유래 없던 혈풍이 멈추자 천마교도들은 넋을 잃은 사람들처럼 입을 꾹 닫았다.
그들이 아무리 살인을 가볍게 여기는 마도인들이라 해도 일천이 넘는 동료의 죽음에는 담담할 수가 없었다.
“사우천 놈들의 씨를 말리자!”
“하늘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찢어 죽이자!”
사로잡힌 사우천의 무사들은 광기에 찬 천마교도들에 의해 처참하게 죽어갔다.
부상당한 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천마교도들의 분노는 부상자들이라고 해서 가리지 않았다.
천마교의 수뇌들은 그들을 그대로 놔두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분노를 가라앉혀야 했다.
하지만 사우천의 무리에 가담한 자들은 철저히 그 죄를 가린 다음 처단했다.
엄청난 피해로 인해서 한 사람이 아쉬운 판이었다. 상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담한 자는 용서하고, 앞장서서 가담한 자는 처참하게 단죄했다.
그리고 그 즈음, 천마궁의 내전 깊숙한 곳에서는 순우진혁이 요랑의 목을 부러뜨렸다.
“너는 아느냐? 스스로 지옥에 뛰어들어 청춘을 소비해야만 했던 내 마음을…….”
순우경이 이무환을 찾아온 것은 그날 오후, 막 떠날 준비를 마친 광룡대가 거처를 나서기 직전이었다.
그녀의 얼음처럼 얼어붙은 얼굴에도 그늘이 져 있었다.
“지금 떠날 건가요?”
“가야지.”
몸은 이제 칠 할 정도의 내력을 찾은 상태였다. 음양구전공이 생각보다 뛰어난 효력을 발휘한 덕분이었다. 남은 삼 할은 가면서 회복해도 될 듯했다.
“아버님께서 뵙자고 해요.”
이무환 역시 떠나기 전에 순우천을 만나야만 했다. 아무리 급해도 할 일은 하고 가야 하니까.
이무환은 광룡단 사람들에게 잠깐 기다리라 하고 순우경을 따라갔다.
5
순우천이 머무는 천마궁에는 여섯 명이 모여 있었다. 침중하게 굳은 표정인 사람도 있는 반면, 승리에 대한 감격이 그대로 드러난 자도 있었다.
‘킁, 누가 마도인들 아니랄까 봐 그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즐거워하는군.’
이무환이 다가가자 순우천이 입을 열었다.
“덕분에 놈들을 물리칠 수 있었네.”
“나머지 정리는 교주님이 하십시오.”
“그래야겠지. 후우, 어쨌든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어.”
“어차피 이 정도는 각오했을 것 아닙니까? 그래도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피해가 적은데요, 뭐.”
“그래,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있나?”
있다. 그것도 두 가지나.
이무환이 순우천을 직시하고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