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2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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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01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203화
203화
순우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소리를 듣느니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이 나을 듯했다.
‘이상한 아이군.’
이제 열대여섯 정도의 계집아이에 불과했다. 그런데 왜 눈이 마주친 순간 가슴이 얼어붙는 것처럼 느껴진 걸까?
하지만 그녀는 일단 남궁산산에 대한 생각을 접고, 주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무설강, 제갈신걸, 공손척, 유철상…….
놀랍게도 자신에 비해 뒤지지 않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광룡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었나?’
그녀는 광룡에 대한 소문을 반도 믿지 않았다.
직접 보니 자신의 판단이 옳은 듯했다.
나이도 어리고, 강한 구석도 없어 보이고, 오히려 조금 모자란 듯 보이는 애송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나마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소문은 사실처럼 보였지만.
그런데 저들은 또 뭔가? 저 정도의 고수들이 왜 광룡을 따르는 걸까? 광룡에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나?
그녀의 콧잔등에 주름이 두어 개 그어질 때였다. 이무환이 손뼉을 치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자, 멋쟁이, 단칼, 도끼. 가서 조장들 다 오라고 해! 내일 할 일에 대해 의논하자고.”
잠시 후.
이삼사조의 조장들과 주요 조원들이 이무환의 방으로 찾아왔다.
호연청, 황보광, 헌원숭, 소천득, 모용상명, 염환, 담환…….
그들을 살펴본 순우경은 달라붙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맙소사! 뭔가가 잘못되었어! 어떻게 이런 자들이……!’
그때 이무환이 입을 열었다.
“일이 시작되면 번갯불에 콩 튀겨 먹듯이 끝내야 합니다. 인정사정 봐주지 마십시오.”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바라던 일이었다. 그만큼 천마교의 힘이 약화될 테니까.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에… 일단 우리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 눈 밑을 가릴 수 있는 면사를 쓸 생각입니다. 기왕이면 멋진 걸로요.”
천마교의 교도들 중 광룡단원을 알아보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 자칫하면 강호에 좋지 않은 소문이 날 수도 있었다.
정파인으로서 마도를 돕는다는 소문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누구누구가 광룡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더라.’란 소문이 더 싫었다.
―광룡이 웬일로 괜찮은 생각을 다 해냈군.
사람들은 그런 눈빛으로 이무환을 바라보며 또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고개만 끄덕이다 보니 박자가 딱딱 맞았다.
이무환은 반박하는 자가 없자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개인행동은 금물이라는 것, 잘 아실 겁니다. 설마 무섭다고 몰래 도망칠 분은 없겠죠?”
조장과 단원들 중 몇 사람의 눈빛이 파란빛을 띠기 시작했다. 이제 길을 잃기라도 하면 무서워서 떠난 놈 취급을 할 것이 분명했다.
‘비겁한 놈!’
호연청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우리 걱정 말고 자네나 똑바로 하게.”
이무환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쇼. 나는 누구처럼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 말에 호연청과 몇 사람의 얼굴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대부분이 밀천회 사람들이었다.
‘빨리 끝내고 저놈 얼굴 안 봐야 제명 다 살고 죽을 텐데!’
‘징그런 놈! 기회만 되면 어떻게든 속을 긁는군!’
한쪽에 앉아 있던 순우경은 그런 광룡단의 대화를 괴상한 표정을 지은 채 지켜보았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군.’
그녀의 눈에는 광룡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그 사람이 그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 모용상명이 슬쩍 말을 돌렸다.
“그런데… 저 여인은 누구요?”
이무환이 힐끔 순우경을 바라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 교주께서 우리를 도와주라고 보낸 사람이오.”
“이름 정도는 우리에게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오?”
순우경이 먼저 대답했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게 싫기라도 한 듯.
“순우경이에요.”
듣는 사람이 흠칫할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다.
모용상명이 엉겁결에 포권을 취하며 답했다.
“모용상명이라 하오.”
그 모습에 이무환이 고개를 모로 꼬고 중얼거렸다.
“모용 형이 마음에 든 모양이네?”
모용상명이 황급히 변명했다.
“그, 그게 아니라…….”
“그럼 싫어요?”
“그 말이 아니고…….”
“이상하네, 왜 저러지? 모용 형이 원래 말을 더듬었던가?”
강호의 청년들 중에서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모용상명의 얼굴이 벌게졌다.
어지간해선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아, 모용세가에 불자가 나올지 모른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들었던 그가 말이다.
‘제길! 나도 그냥 눈 한번 부라리고 말걸!’
“일을 할 때 그렇게 어영부영하면 안 되는데…….”
이무환은 마지막 한 방을 날리고 고개를 돌렸다. 모용상명이 눈을 부라렸을 때는 이미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정신들 차리쇼. 이곳이 어딘지 잊으면 혼만 돌아갈지 모른다는 점 명심하고 말이오.”
말인즉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빌어먹게 자신을 바라본단 말인가!
모용상명은 속으로 이를 갈며 다짐했다.
다시는 광룡하고 쓸데없는 말을 섞지 않으리라!
제2장. 천마교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1
안개가 산허리를 휘감고 돌아가는 아침나절.
이무환이 오십 장의 면사를 가지고 왔다.
그걸 본 사람들이 모두 이마를 찡그리며 눈을 좁혔다.
“왜 하필 이 글자를 넣은 것인가?”
“만들어진 게 그거밖에 없다고 해서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광(狂) 자가 새겨진 걸 가져오다니. 그것도 빨간색으로…….”
“잘됐죠, 뭐. 어차피 미친 듯이 움직여야 할 텐데.”
이무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면사를 나누어 주었다.
‘크크크, 빨리 새길 수 있는 글자를 찾다 보니 광 자가 괜찮더라고.’
사실 면사는 원래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무환의 요구로 밤새 만든 것이었다. 거기에 들어갈 글자도 그가 정했다.
하지만 그것까지 알려줄 이유는 없었다.
그때 철위평이 물었다.
“자네는 안 쓸 건가?”
“나는 단주잖습니까. 어차피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요. 자, 일단 면사를 잘 묶으시죠. 빨리 일을 마쳐야 돌아가는 것도 빨라질 거 아니겠습니까?”
그로부터 이각 후, 홍실로 ‘광’ 자가 새겨진 검은 면사를 쓴 사십여 명의 무사가 우르르 마월전의 문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천마교 대내 업무를 보는 팔당 중 순찰 임무를 수행하는 홍살당에서부터 발원했다.
와장창! 콰당!
홍살당의 문이 부서지며 경비무사들이 안쪽으로 나가떨어졌다.
검은 면사를 걸친 광룡단은 마치 제집을 찾아들어 가듯 넘어진 경비무사들을 지나쳐 전각 안으로 진입했다.
넘어진 무사들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자, 무설강이 철사자의 진면목을 발휘하며 냉랭히 입을 열었다.
“무기를 뽑지 마라. 손발 잘못 놀리면 다 부러지는 수가 있으니까.”
두 명의 무사는 허리춤으로 가져가던 손을 슬며시 내렸다.
그러나 간혹 사람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구석으로 굴러간 무사가 등에 매달린 검을 잡아 뽑았다.
쨍!
순간, 가장 가까이 있던 유철상이 번개처럼 날아가더니, 검을 뽑은 자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우두둑!
“끄어억!”
“무기 뽑지 말랬지!”
표정의 무심함을 따지자면 철사자 못지않은 유철상이다. 오죽하면 이무환이 그를 석사자라 부를까.
상대의 손목을 부러뜨린 유철상은 무표정한 눈빛을 쏟아내며 으르렁거리고는 그자를 한쪽에 던져 버렸다.
또다시 우당탕거리며 소란이 일었다.
그때 전각 안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웬 놈이냐?!”
난데없는 소란에 놀란 듯 대여섯 명의 무사가 내실 쪽에서 달려나오며 소리쳤다.
“네놈들은 누구냐?!”
광룡단의 단원들은 일절 대꾸를 하지 않고 좌우로 쫙 갈라섰다.
그 사이로 이무환이 순우경과 함께 들어섰다.
이무환은 내실에서 뛰어나온 여섯 명의 무사를 둘러보고는 순우경에게 짤막하게 물었다.
“있어?”
“없어.”
“없어? 그럼 들어가서 잡아야겠군. 자, 들어가 보자고.”
단절된 말투로 광룡의 명이 떨어졌다. 동시에 광룡일조를 선두로 광룡단원들이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누구냐는 질문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밀려든다. 맨 앞에 서 있던 홍살당의 중년 무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네놈들은 누군데……?”
이무환이 손을 쭉 뻗자, 그의 손에서 아수라 형상이 황금으로 새겨진 시커먼 패가 번쩍였다.
“천마령의 명을 집행하러 왔다! 막는 자는 역도로 취급할 것인즉,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라!”
천마령! 역도!
그 말에 여섯 명의 무사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헉! 진짜 천마령이다!”
“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오? 역도라니!”
중년 무사가 용기를 내 앞을 가로막았다.
쩡!
공손척이 유난히 기다란 장검을 뽑더니 중년 무사를 향해 휘둘렀다. 중년 무사도 얼떨결에 무기를 뽑아 대항했다.
쩌정! 퍽!
단 일격에 중년 무사의 몸뚱이가 뒤로 날아갔다.
“하도 오랜만에 보니, 천마령을 보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잊었나 보군.”
공손척의 말에 남은 무사들이 부들부들 떨며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천마령을 뵈오이다!”
“만마의 주인이신 천마의 성물을 뵈옵니다!”
동시에 광룡단원들이 우르르 앞으로 나아갔다.
내실 쪽으로 향하는 통로는 겨우 세 명 정도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그래선지 광룡단원들은 좁은 통로를 이용하지 않았다. 막힌 것이 있으면 무조건 뚫고 지나갔다.
쩌적, 콰광! 와르르…….
벽이고 뭐고 소용이 없었다. 도검이 번뜩일 때마다 벽이 갈라지고, 손짓이 한 번 저어질 때마다 단단한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조금 지나쳐 보였지만, 이무환은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둥을 발로 걷어차 건물 전체를 흔들었다.
우르르릉!
건물 전체가 무너질 듯이 흔들리자 이십 명의 무사가 더 뛰쳐나왔다. 그들은 방을 부수며 전진하는 광룡단원들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뭐 하는 짓이냐?!”
“이봐! 너희들 뭐야?”
이무환이 씩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단걸음에 삼 장을 좁힌 그는 한 사람의 목을 움켜쥐었다.
“홍살당주 공서단은 어디 있지?”
“컥! 네, 네놈은 누구……?”
딱!
천마령이 그자의 이마에 떨어졌다.
“이게 뭔지 알지?”
“허억! 처, 천마… 령?”
“맞아. 그리고 지금은 내가 주인이지. 좋게 말할 때 불어. 공서단은 어디에 숨어 있지?”
“이, 이층에…….”
홱, 무사를 한쪽에 던진 이무환은 이층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층에 있다는군! 올라가서 잡아! 막는 자는 누구든 때려눕혀도 좋아! 이보쇼, 호연 조장, 철 조장! 놓치면 알아서 하쇼!”
홍살당주 공서단이 잡힌 것은 광룡단이 홍살당에 진입한 지 채 반 각이 지나기도 전이었다.
그는 이층에서 직속 수하 넷과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호연청에게 정신을 반쯤 잃을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그리고 끌려 나오면서 철위평의 주먹질에 서너 대 더 맞은 후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렸다.
“이놈이 엉큼하게 수작을 피우려 하잖아?”
철위평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켰지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차마 광룡에게는 대들지 못하고 공서단에게 그 화풀이를 했다는 걸.
그렇게 첫 번째 집행이 벌어진 지 일각 후, 광룡단은 요마각으로 몰려갔다.
아직 시간은 많고, 잡을 사람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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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령의 명을 집행하러 왔다! 비켜라!”
요마각(妖魔閣)은 천마교의 사각(四閣) 중 하나였고, 각주인 요화선랑 손화련은 서열 삼십위 이내에 들어가는 최고위급간부였다.
그런 그녀라 해도 천마령이 현신하면 무릎을 꿇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하물며 경비를 서고 있던 자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감히 마주 설 생각조차 못하고 무릎을 꿇은 채 길을 터주었다.
이무환은 곧장 요마각주의 거처로 향했다.
장소는 굳이 다른 사람에게 물을 것도 없었다. 순우경이 한 발 앞장서서 걷고 있었으니까.
‘햐, 뒷모습은 더 예쁘네. 우리 꼬맹이보다 엉덩이가 더 둥근 거 같아.’
이무환은 힐끔 순우경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때 영호승이 이상할 정도로 크게 이무환을 불렀다.
“단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