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2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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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38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202화
202화
순우결은 그렇게 입을 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화살은 쏘아졌다.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화살이 목표에 꽂힐 것인지, 아니면 힘없이 땅바닥에 떨어져 구를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지난 수개월 동안 그 일을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몇 사람에 대해선 증거까지 확보했지요.”
“증거까지 확보했다고? 그게 대체 어떤 놈이오? 아니, 그보다 왜 그냥 놔둔 것이오?”
“장로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대천마교는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몇 사람이 설친다고 흔들릴 정도였다면, 천하마도의 종주라는 명예도 얻지 못했을 겁니다. 해서… 그들의 배후가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기다렸던 것입니다.”
앉아 있던 사람들 중 염소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입을 열었다. 구마신 중 한 사람, 염화마군(炎火魔君) 조유였다.
“그래서, 배후가 드러났소?”
“어느 정도는 드러났지요.”
“그럼 배신자들과 그들만 잡으면 끝날 일인데, 왜 외부 사람들을 끌어들인 것이오?”
“본 교의 많은 사람들이 배신자들과 얽혀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한통속인지 정확히 모를 정도지요. 그러다 보니 본 교의 무사들로 그들을 잡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요. 왜,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해서 본 군사는 냉정하게 일을 집행하기 위해 외부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조 장로님.”
“으음…….”
조유가 신음을 흘리며 눈살을 찌푸린다.
가염천도 순우결을 더 몰아세우지 못하고,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도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아꼈다.
그때 순우결이 말을 이었다.
“아는 분들에게 본 군사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전해주십시오. 본 군사는 멋모르고 그들과 엮인 사람들은 죄인 취급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니, 이제라도 마음을 바꾸는 사람들은 모두 용서할 생각입니다. 설령 본 군사가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집니다. 제 이름을 걸고, 그들이 지닌 비밀을 철저히 지켜줄 것입니다.”
이제 간부들의 가슴에 미풍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곧 미풍이 폭풍으로 변할 것이었다.
‘다급해지면 오늘의 내 말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겠지.’
십수 년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제 막, 시작의 종소리를 울렸다. 그 종소리가 어디까지 울릴지 그것은 누구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순우결의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3
위엄 있는 모습으로 거대한 태사의에 몸을 묻고 있는 한 노인이 보였다.
나이는 육십 정도?
노인의 머리에는 황금실로 만들어진 건이 얹어져 있고, 몸에는 황금실로 아수라가 새겨진 묵빛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일반인이라면 숨도 쉬기 힘들 만큼 무거운 기운이 전신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무환은 그를 보며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상대가 천마교주 앙천마존 순우천이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우내사천 중 한 사람이어서도 아니었다.
순우천의 체구는 순우결보다 컸다. 그냥 큰 정도가 아니라, 같은 형제가 맞는지 모를 정도로 컸다.
‘어릴 때 동생 것까지 다 뺏어 먹었을지도 몰라. 순우결이 바싹 마른 게 분명 형 때문일 거야.’
그런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몸 안에 깃든 기운은, 그가 정말 우내사천 중 한 사람인 앙천신마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약했다.
이무환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조용히 물었다.
“왜 그렇게 된 겁니까? 누구하고 대판 싸웠나요?”
버릇없는 말투도 말투지만, 뜬금없는 질문이다. 그런데도 순우천은 이무환의 말뜻을 바로 알아듣고 선뜻 대답했다.
“어느 날부터 몸이 무거워지더니, 오 년쯤 지나니까 이렇게 되어 있더군. 벌써 칠 년 전의 이야기네만.”
담담한 목소리,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할아버지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두 눈에서 일렁이는 눈빛에는 스스로조차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이 담겨 있었다.
“독을 쓴 건가요?”
“사지가 잘려 죽어가던 놈이 웃으면서 그러더군. 천하의 어느 누구도 해독할 수 없을 거라고 말이야.”
대체 어떤 독이기에 천하의 누구도 해독이 불가능한 걸까. 정말 그런 독이 있을까?
그런데 사실인 것 같다. 이곳은 천마교. 독의 대가들이 득시글대는 곳인데도 해독을 못하다니.
“해독을 하기 위해서 많은 방법을 써봤겠군요.”
“온갖 방법을 다 써봤지. 남만의 독물들을 잡아다가 이독치독의 방법까지 써봤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아무런 효과도 없더군.”
어쩌면 그보다 더 지독한 방법도 써봤을 것이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차피 다 실패한 일이기 때문일 터.
그때 문득 당호민이 떠올랐다.
“독이라면 사천의 당가도 꽤 유명한데, 알아보셨습니까? 정파라서 뭐하면 제가 한 사람 소개시켜 줄 수도 있는데요.”
“본 교도 독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네. 본 교에서 해독할 수 없는 독이라면 천하의 누구도 해독할 수 없을 거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온전히 옳은 말도 아니었다. 세상에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니까.
이무환이 중얼거리며 차를 홀짝였다.
“그래도 당호민 그 양반, 실력이 제법 괜찮은데…….”
순우천은 순수하게 자신의 몸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왠지 즐거웠다.
그러나 당호민이라는 자가 누군지 몰라도 자신의 몸속 독을 해독하는 것은 불가능할 터.
마음이 씁쓸해진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돌렸다.
“좌우간 그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하고……. 광룡에 대한 말은 나도 들었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더군.”
“다 믿지는 마십시오. 원래 소문이라는 것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나는 어느 누구의 말도 완전히 믿지 않는다네. 이 자리에 앉은 이십 년 전부터는 더욱 그랬지.”
“하, 하. 그럼 제가 미친놈이 아니라는 것도 아시겠군요.”
순우천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거기에 대해서는 당장 말하기가 뭐하군.”
이무환이 순우천을 째려보았다.
아마 천마교의 사람들이 봤으면 당장 눈알을 빼겠다고 덤벼들었을지 몰랐다. 그리고 실제로 방 은밀한 곳에 은잠해 있는 여덟 명은 분노한 채 명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물론 이무환은 그들의 분노를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내뱉는 말투가 더욱 까칠해졌다.
“좀 믿어주면 어디가 덧납니까?”
순우천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천하의 누가 자신 앞에서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
혹시 겉만 번지르르 할 뿐, 정말로 미친놈이 아닐까?
어쩌면 그래서 순우천은 이무환이 마음에 들었다.
“그게 아니라, 기왕이면 확실히 미쳐주길 바라기 때문이라네. 한데 자네가 미치지 않았다면 내 바람이 헛되지 않겠는가?”
“정말… 입니까? 거참, 교주님도 정말 이상한 성격을 지니셨군요.”
순우천의 웃음이 짙어졌다.
이토록 아무런 생각도 없이 웃은 것이 얼마 만일까?
아마 지난 수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일 것이었다.
그는 이무환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때로는 혼돈을 정리하기 위해서 더욱 큰 혼돈이 필요할 때가 있지.”
“지금이 그때라고 본다, 이 말이죠?”
“그렇다네.”
“어느 정도까지 미쳤으면 좋겠습니까?”
“자네 능력껏 해보게.”
이무환은 씩 웃으며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그러고는 나직이 말했다.
“그래도 지나치면 절 원망할지 모르니까, 주춧돌 정도는 남겨놓죠.”
그때라도 한 번 더 생각해 봤어야 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즐거워진 순우천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까짓 게 하면 얼마나 하겠는가?
어쩌면 그런 마음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가볍게 대답했다.
“걱정 말고 자네 마음대로 해보게나. 절대 자네를 원망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덕분에 이무환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뭐, 그렇다면야…….”
순우천은 그 모습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품속에서 시커먼 영패를 하나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을 받게. 앞으로 자네가 하려는 일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야.”
“그게 뭡니까?”
“천마령이라는 것이지. 당분간은 자네가 천마령주일세.”
“높은 자립니까?”
대천마교 교주의 대리인이나 다름없는 천마령주가 높은 자리냐고?
순우천은 대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고 이무환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높지. 천마령주에겐 나 외에는 누구든 죽일 수 있는 생살여탈권이 있으니까.”
“그래요?”
이무환은 순우천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잽싸게 천마령을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한마디 하며 곧바로 품속에 집어넣었다.
“아수라가 금으로 돼 있네. 꽤 비싸겠는데요?”
끝내 순우천이 풀썩 웃었다.
“훗! 그래, 혹시 더 필요한 것은 없는가?”
이무환의 눈이 오른쪽을 향했다.
공짜를 마다한다면 광룡이 아니었다.
“저 벽 뒤에 있는 사람, 누굽니까? 제법 강해 보이는데, 저 좀 도와주라고 하시죠. 아무래도 이런저런 일을 아셔야 할 텐데, 제 곁에 한 사람 정도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순우천의 두 눈이 묘하게 반짝였다.
“그럴까? 흐음. 그래, 그것도 괜찮겠군.”
“역시 그렇죠? 하, 하, 하, 하!”
이무환이 너털웃음을 흘릴 때다. 순우천이 오른쪽 벽을 향해 누군가를 불렀다.
“경아야, 네가 이 사람 좀 도와주도록 해라.”
한 사람이 휘장 뒤에서 나오며 고개를 숙였다.
“예, 교주님.”
일순간, 이무환이 웃던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렸다.
‘제길, 잘못 찍었네. 하필이면……. 차라리 저쪽에 있는 자를 찍을 걸.’
“그럼 수고하게. 나는 그만 쉬어야 할 것 같으니, 가보게나.”
수고하라는 순우천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무환은 대충 대답하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그러죠, 뭐.”
이무환이 나가며 천마궁의 문이 닫혔다.
순우천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보느냐?”
어느새 한 사람이 거짓말처럼 순우천의 옆에 나타났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님.”
묵의를 입은 그는 이제 서른 중반의 나이로 보였다.
턱밑에는 검은 수염이 잘 다듬어져 있었는데, 키가 큰데도 몸이 말라서 그리 큰 체구로는 보이지 않았다.
“네가 모르겠다고 할 정도면,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닌 것 같구나.”
“저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실 생각이십니까?”
“당분간은 그래야겠지. 놈들이 다 드러날 때까지는…….”
장한은 이무환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눈을 좁혔다.
‘놈은 고개를 돌리며 내가 있던 곳에서 잠시 시선을 멈추었었다. 내 존재를 눈치챘던 것일까?’
천외광룡에 대한 말은 그도 들었다.
구룡성을 전복하려던 잠풍련을 와해시켰다는 자.
중원에 오신룡이 있다면, 천외에 광룡이 있다 했던가?
은근한 호승심이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그러더니 일순간, 항거할 수 없는 욕망의 불꽃처럼 그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언제고, 누가 진정한 하늘인지 알 수 있겠지!’
4
이무환이 한 사람을 데리고 전각으로 돌아오자, 광룡단원들이 이상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특히 남궁산산은 눈빛을 반짝반짝 빛냈다.
“누구예요?”
“어… 교주가 우리 도와주라고 보낸 사람.”
“그런데 왜 여자예요?”
“나도 몰랐어.”
정말 몰랐다. 하지만 남궁산산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이무환을 흘겨보았다.
“정말이에요? 정말 몰랐어요?”
“그러어엄!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하는 거 봤어?”
‘제길, 누가 여자인 줄 알았나?’
이무환은 겉으로 큰소리를 치면서도 괜히 식은땀이 났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껄끄러웠다.
꼭… 순우경이 아름다워서만은 아니었다.
‘근데, 이쁘긴 정말 이쁘네. 얼음을 깎아 만든 것처럼 차가워 보여서 그렇지.’
순우천에게는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는데, 순우경은 순우천이 나이 마흔이 되던 해 얻은 수양딸이었다.
그녀는 양부인 순우천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양부의 명을 거역할 수 없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따라왔다.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저 예쁘장한 계집아이는 왜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보는 걸까?
그녀가 의아해하는 사이, 남궁산산이 싸늘함마저 느껴지는 표정을 지은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언니, 정말 오빠 말대로 교주님이 우리를 도와주라고 보낸 거예요?”
순우경은 차가운 표정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음꽃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맞아. 교주님께서 그리 명하셨다.”
그 대답을 듣고서야 남궁산산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그래요? 저는 산산이라고 하는데, 언니 이름은 뭐예요?”
“순우경.”
정말 정나미 떨어질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다.
남궁산산은 그래서 순우경이 마음에 들었다. 오빠는 이렇게 싸늘한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순우경이 먼저 달라붙을 것 같지도 않고.
“여자가 둘뿐이었는데, 언니까지 왔으니까 이제 셋이네요. 우리 잘 지내봐요.”